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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3화 (3/210)

003화. 제천대살 (2)

* * *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어두운 숲속을 달리며 쉬지 않고 욕설을 뱉었다.

도대체 그 연놈은 누굴까?

하필이면 백팔살 수행의 중요한 고비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기 위해 제천대살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싸한 느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리기를 멈췄다.

‘진법인가?’

주변의 지형과 기운을 살피던 제천대살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진법이 맞았다.

아무리 경황이 없었다지만, 비술(秘術)의 대가인 자신이 진법 따위에 걸리다니.

혹여라도 동료들이 알게 되면 두고두고 놀림당할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건 건착도(乾鑿度) 구궁(九宮) 진법이군. 두 겹, 아니 세 겹의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인가?’

의외로 정교한 진법이었다.

하지만 숲속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광범위한 구역에 설치된 진법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잠시 방위를 계산하던 제천대살은 결국 생문(生門)의 위치를 찾았다.

더 이상 망설임 없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제 몇 호흡만 더 달리면 진법을 벗어나리라 기대하는 순간….

【쯧쯧. 귀문(鬼門)으로 든 지도 모르고 신나서 달리는 꼴이라니】

나뭇가지 사이를 휘감으며 울려 퍼지는 귀성(鬼聲).

심령이 울렁거림을 느낀 제천대살은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진법 다음엔 주박의 비술? 술법을 쓰는 도사인가?’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술법으로는 교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나와 비술을 겨루겠다고?

비록 백팔살의 수행은 끝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비술 대결을 겁낼 내가 아니다!

“그따위 심령 속박의 주박언은 통하지 않는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썩 나서라!”

내공을 가득 담은 호통이 터지자 주변을 감돌던 귀성의 울림이 사라졌다.

그리고 멀지 않은 나무 뒤편에서 쭈뼛쭈뼛 걸어 나오는 누군가.

“헤헤, 안녕하세요? 저는 위청보라고 해요. 저도 주박언이 통할 거라 기대한 건 아니고요, 그나마 이 귀성 부적이 만들기 쉬운 거라….”

“닥쳐라! 네놈이 지금 누구에게 싸움을 건 것인지 아느냐? 진정한 비술이 어떤 건지 맛을 보여줄까?”

“아니… 저는 그냥… 작전에 따라….”

“이… 이놈이!”

채앵~

제천대살이 등 뒤에 맨 검을 뽑자 서늘한 검기가 맺혔다.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진 위청보가 서둘러 부적 다발을 꺼내 공중에 뿌렸다.

동시에 주변으로 퍼지는 짙은 안개.

안개는 스르륵 뭉치며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갔다.

하나, 둘, 셋, 넷… 네 명의 사내가 제천대살을 에워쌌다.

혼돈산아비술의 고위 술법인 분신(分身)의 술(術)이 부적을 매개체로 펼쳐진 것.

손오공을 추앙하는 자신 앞에서 분신술이라니 황당하긴 했지만, 상대가 어설픈 술법사가 아님은 인정해야 했다.

“흥, 어느 계열의 술법이냐? 동영의 인자술? 아니지. 부적을 쓰는 것을 보니 모산파의 쥐새끼구나. 쯧쯧, 진정한 비술은 부적 따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지.”

제천대살이 혀를 깨물어 피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사방에서 조여오는 위청보의 분신들을 향해 내뿜었는데.

비릿한 혈향과 함께 퍼져 나간 핏방울이 화약이 터지듯 타올랐다.

치지지직….

제천대살의 비술이 한 수 위였는지, 수증기가 증발하듯 사라져버리는 분신들.

다급해진 위청보는 급히 다른 부적을 꺼내 땅바닥에 붙였다.

“이번엔 지령속박술이냐?”

갑자기 중력이 배가되며 발바닥을 끌어당겼다.

제천대살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살짝 그어 종아리에 상처를 냈고, 거기서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을 적시자 하반신을 옭아매던 압력이 씻은 듯 사라졌다.

“하하하, 어떠냐? 어디 또 부적을 꺼내 보시지. 네놈이 가져온 부적을 모두 소진시켜 주겠다.”

“흥, 당신 몸속의 피도 무한정은 아닐 텐데요?”

“지금 네가 내 피를 걱정해주는 건가? 쓸데없는 걱정.”

쐐애액~

뒤에서 갑자기 덮쳐오는 칼날 모양의 피 안개.

위청보는 깜짝 놀라며 급히 허리를 숙였고, 머리카락 한 줌이 베어져 우수수 휘날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머리가 통으로 베였을 급작스런 공격.

“이제 알았느냐? 한번 쓰면 소멸되는 네 부적과 달리, 내 피에는 생명력이 있어 소멸되지 않는다!”

손을 치켜들자 공중에 비산해 있던 핏방울들이 스르르 모여들었고, 바닥을 적셨던 핏물도 흙을 털어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비릿한 웃음.

공중을 부유하는 흉측한 핏덩어리들.

기괴하고 소름 돋는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위청보가 마지막 부적을 공중에 던졌다.

번쩍!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오며 제천대살의 시야를 가렸다.

위청보는 뒤도 안 돌아보고 전력으로 도망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삼 단계 확인 완료! 대장, 뒷일을 부탁해요!”

대장?

제천대살은 시린 눈을 껌뻑이며 주변을 살폈다.

이곳에 대장이라 불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말인데… 자신의 육감을 피할 정도라면 대단한 고수.

“그렇게 두리번거릴 것 없소. 난 여기 있으니.”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

불과 십여 걸음 떨어진 나무 곁에 그가 있었다.

위청보가 대장이라고 부르는 사내.

고도의 은신술로 기척을 감추고 있던 강한월이었다.

제천대살은 냉랭한 웃음을 날렸다.

가소로운 듯 코웃음 쳤지만, 실은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긴장되는 순간.

이십 대 중반, 아니 후반일까?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한쪽 얼굴을 가렸고, 하얀 피부에 오똑 선 콧날이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생긴 건 꼭 계집애 같은 놈이… 어울리지 않게도 강렬한 고수의 기세를 풍기고 있으니.

“네놈이 대장인가 보군. 한 무리의 수장이 쥐새끼처럼 숨어있던 거냐?”

“어쩔 수 없었소. 당신에 대해 조금 더 확인할 것이 있어서.”

“확인, 또 확인. 너희는 매번 그 소리 군. 도대체 뭘 확인했는데?”

“여러 가지를. 일 단계에선 귀면비의 위치로 시험을 했지. 귀면비가 발견되는 건 앞으로 백이십 년 후 미래의 일. 그런데 당신은 그 위치를 알고 있더군.”

“흥,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서 얻은 정보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서 이 단계와 삼 단계의 시험도 준비한 거니까. 이 단계에선 ‘회귀자’라는 단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한 것이고….”

“삼 단계는?”

“당신이 혈교(血敎)의 독문 비술, 즉 피의 비술을 사용하는지 확인한 거요.”

“이것 참.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혈교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네만.”

시치미를 뗐지만 그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회귀자라는 단어만큼이나 혈교라는 단어도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정하기 어렵겠지. 어쨌든 당신이 혈교의 일원이라는 것은 분명해졌소. 남은 것은 당신이 회귀한 혈승 본인인지, 아니면 혈승이 키운 제자나 수하인지를 확인하는 것뿐.”

“미친 소리!”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제천대살은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치며 강한월에게 쇄도했다.

오른손에 쥔 검에는 싸늘한 검기를, 왼손엔 거뭇한 철사장의 공력을 휘감고서.

샤아악.

크르릉.

검기와 장력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압박해 들어왔다.

하지만 충분히 위협적이지는 못한 것 같았는데, 강한월은 신묘한 보법을 펼쳐 좌우로 움직이며 여유 있게 빠져나갔다.

제천대살은 분노하며 검기를 쭉 뽑아냈다.

타앙!

강한월은 손가락을 튕겼고, 한줄기 내기가 쏘아져 나가 검기를 갈랐다.

“탄지신통! 네놈은 소림의 제자더냐?”

놀람이 컸던지 제천대살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지만 강한월에게 여유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놀라는 척 연기하며 제천대살이 몰래 펼친 비술이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공기 중에 비산해 있던 미세한 핏방울이 기척 없이 모여들더니 비수의 형상을 이루며 날아든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

강한월이 낌새를 챈 순간, 피의 비수는 이미 등판에 거의 닿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다.

핏방울이 날아든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강한월의 전신에서 찬연한 금광이 퍼져 나왔다.

터엉!

붉은 비수는 금빛 호신강기에 부딪혔다.

뚫으려는 붉은 빛과 막으려는 금광이 동심원의 파장을 만든 끝에 스르르 부서져 소멸된 것은 핏빛 비수였다.

“금강부동심공을 호신강기로? 너… 정말로 소림의 제자구나!”

이번 놀람은 진짜였다.

제기랄. 하필이면 소림 중에서도 대승 계열이라니.

달마대사에 뿌리를 둔 역근과 세수 계열이라면 크게 개의치 않지만, 발타의 전승에 기인한 대승 계열이라면 그가 펼치는 피의 비술과는 최악의 상성.

‘그렇다는 말이지… 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도….’

제천대살은 생각했다.

이번 생에서 새로 익힌 쾌검과 철사장으로 소림의 절학을 상대한다는 건 어불성설.

게다가 피의 비술조차도 금강부동신공을 뚫지 못하니….

가장 자신 있는 본신 무공을 쓸 수밖에.

그리고 철포대사를 대신해 저놈을 잡아 백팔살 수행을 계속한다!

결심을 굳힌 제천대살은 들고 있던 검을 땅에 던졌다.

우드득 우드득 목을 좌우로 꺾으며 온몸의 관절을 푸는 동작이 이어졌고, 입으로는 오옴 하는 진동을 내뱉었다.

드디어…?

강한월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제천대살이 결국 그 무공을 쓰려는 것이다.

꿈속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던 무공.

천축과 서장의 전승을 기반으로 창조된 혈교의 호교 무공을.

“흐아압!”

날카로운 기합을 지르며 제천대살이 쇄도했다.

핏빛으로 물든 두 손이 기묘한 각도로 꺾이며 강한월의 요혈을 압박했고, 짧게 검을 움직여 방어한 강한월은 일단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슴이 뛰었다.

꿈에서만 보아오던 무공을 직접 상대하게 되다니.

수많은 얼굴들이 눈앞을 스쳐 갔고, 안타까운 탄식과 신음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렇다면 나도 대응방법을 바꿔야겠지?

한 마리 제비처럼 날렵하게, 강한월은 혈수인 사이로 파고들었다.

펑, 펑, 펑.

붉은 인주를 먹인 도장을 찍듯 타격을 가해오는 제천대살.

상반신의 요혈을 집중적으로 노렸으나, 강한월은 알고 있었다.

회피 동작을 펼쳐 상체를 뒤로 눕히는 순간, 혈수인의 길이가 반 자 정도 늘어나며 자신의 다리를 파고들 것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꿈속에서 수도 없이 봐왔던 혈교 전사들의 수법.

이 연계식에 당해 무릎뼈가 함몰되고, 이어지는 한 수에 목뼈가 부러진 소년 무사의 마지막 눈빛이 아직도 선한데.

견정혈을 찍어오는 혈수인을 피해 상체를 모로 눕히자, 과연 제천대살의 왼손이 폭포수처럼 낙하하며 강한월의 오른쪽 무릎을 강타하려 했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위기의 순간.

하지만 강한월은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을 선보였다.

상체를 뒤로 꺾은 자세 그대로 한 치쯤 땅 위로 떠 오르더니 나는 듯 뒤로 물러선 것이다.

퍼억!

주욱 늘어났던 혈수인은 허무하게 맨땅에 꽂혔고, 강한월이 물러서며 쏜 탄지신통에 걸려 옆구리에 혈선이 그어졌다.

“흐윽. 어… 어떻게 이 초식 변화를 알고 있는 거지?”

“당신 손에 생을 마감한 원혼들이 알려주더군.”

“닥쳐라! 우연히 한번 피한 것 같은데, 어디까지 운이 따라줄 것 같으냐?”

제천대살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회음혈 부근에서 챠크라의 기운이 솟구치며 붉은 두 손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천축의 무공에 서장의 무공을 접목시킨 밀종대혈수인(密宗大血手印).

두 손이 금강석처럼 단단해짐과 동시에, 특수한 파장을 은밀히 내뿜어 상대의 내공 흐름을 방해하는 비공(秘功).

타락한 부처님의 피에 젖은 손바닥이 벼락같이 휘둘러졌다.

강한월은 급히 물러서며 탄지신통을 날렸지만, 챠크라로 보호되는 밀종대혈수인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 낼 수가 없었다.

부피가 커지고 밀도가 상승했음에도 기괴한 움직임과 탄력은 여전했으니,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튕기듯 쳐들어오는 밀종대혈수인은 초식을 안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 전부터 내부 공력의 흐름이 답답하게 엉키고 있으니….

신묘한 발놀림으로 어찌어찌 피하고는 있지만, 이미 장포 서너 군데가 찢겼다.

강한월의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몹시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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