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신입 진가린 (1)
* * *
이름은 진가린.
나이는 이십 대 초반이고, 예쁘다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듣는 여인.
변방 중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길림성 장백산 어귀의 작은 문파 출신으로 배경은 별 볼 일 없었지만, 타고난 자질이 뛰어난 데다 근성도 좋아서 그 어렵다는 무림맹 입맹 시험을 당당히 수석으로 통과했다.
시골의 삼류 문파 출신이 게다가 여성의 몸으로 수석을 차지한 것은 유장한 무림맹의 역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기에, 합격증을 수여하던 무림맹 간부로부터 극찬을 들었는데….
하지만 그게 다였다.
수석을 했으니 당연히 무림맹 최고의 전투부대인 청룡대나, 아니면 하다못해 멋진 여류 무인들이 주를 이루는 주작대에 배치될 줄 알았는데… 결과는 그녀의 예측을 너무도 빗나갔다.
‘이건 말도 안 돼. 분명 마가 낀 거야.’
전투 부대도 아니고, 지원 부대도 아니고, 비밀 작전 부대도 아닌….
문무대라는 듣도 보도 못한 문화사업 부대라니!
억울하고 황당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채, 진가린은 자신을 데리러 온 사내를 따라 걸었다.
“저, 선배님. 아직 멀었나요? 이쪽으로 가면 무림맹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데….”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실은 우리 문무대 건물은 무림맹 밖에 있어서… 건물 좀 번화가로 옮겨 달라고 몇 번 건의를 했는데도 안 바꿔주더라고요.”
치, 그래도 존댓말은 꼬박꼬박 써주네.
선배를 따라 한참을 더 걷자, 넓은 대나무 숲이 펼쳐졌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걷는 자리만 그대로 따라와야 해요. 절대로 다른 자리는 밟으면 안 돼요. 수석이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
말을 마친 선배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뭐야 이건?
짜증이 일었지만 자신은 신입.
입술을 빼죽 내민 채 진가린도 발걸음을 서둘렀다.
얼마 못 가,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던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반복되는 선배의 발걸음에 어떤 규칙이 있음을 알게 되자 대나무 숲에 잠재해 있는 복잡한 기운들이 느껴진 것이다.
‘구궁(九宮)의 법에 팔괘(八卦)를 역으로 덧입히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둔갑술을 첨가한 건가? 도대체 문무대가 뭐 하는 곳이기에 이런 고급 방어진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나무 숲을 빠져나오니, 높고 두꺼운 돌담에 둘러싸인 볼품없는 이 층 건물이 나타났다.
현판조차 없는… 무언가 진득한 비밀과 음모의 냄새가 풍기는 건물이었다.
좁은 창문 몇 개가 뚫려 있는 감옥을 연상시키는 구조는 튼튼하다는 것 외에는 어떤 장점도 없어 보였는데….
뭐, 적의 침입을 막기엔 괜찮아 보이긴 했다.
그도 아니면 누군가 탈출하는 것을 막거나.
“제갈 선배, 다녀왔습니다. 신입 데리고 왔어요.”
안내했던 선배가 문을 열고 들어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수고했다, 막내.”
서류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서탁 뒤에서 누군가 인사를 받았다.
“헤헤, 제갈 선배. 저 이제 막내 아닙니다. 제 밑으로 신입이 들어왔지 않습니까?”
“흥, 누구 마음대로. 대장이 결정하기 전까지는 저 아이는 수습일 뿐이야. 대장 눈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모르지 않을 텐데?”
“쩝, 그건 그렇죠.”
뻘쭘하게 문 앞에 서서 선배들의 대화를 듣던 진가린의 머릿속으로 한 줄기 광명이 비췄다.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이 이상한 곳에 소속되는 것이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는 건데.
그렇다면 청룡대를 노려볼 기회가 아직 있다는 거군!
“청보. 너는 이 층 보급창고 가서 수습 입을 옷가지나 좀 챙겨다 줘라. 언제 잘릴지 모르지만 그때까진 먹이고 입히긴 해야 할 테니.”
위청보가 보급품을 가지러 올라가자, 이번에는 진가린에게 첫 임무가 주어졌다.
“수습. 저기 식탁 위에 물병 보이지? 저거 지하에서 수련 중인 선배들께 가져다드려라.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냐고?
아니 여기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말….
한 뼘은 튀어나온 입으로 불만을 표시한 진가린은 물병을 손에 들고 지하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갈 선배는 뜬금없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는데….
“하나, 두울, 세엣.”
“어? 제갈 선배. 숫자는 왜 세시는 거죠? 수습은 어디 갔고요?”
보급품 무복과 철검을 챙겨 이 층에서 내려오던 위청보가 물었다.
“수습은 지하에 물병 가지고 내려갔다. 네엣, 다서엇….”
“네에? 지하에는 광 선배와 소 선배가 수련 중이잖아요. 설명은 해준 거고요?”
“설명은 무슨. 아직 수습인데 우리 비밀을 알려줄 수야 없지. 여섯, 일고옵….”
“아니 그럼 왜 내려보낸 거예요? 물은 제가 갖다 드려도 되는구먼.”
“시험은 해봐야 하지 않겠냐, 수습이 쓸 만한 애인지 아닌지. 여덟, 아호옵…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이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콰아앙~
제갈윤이 막 열을 세려는 찰나, 기(氣)가 충돌하는 폭음이 지하실에서 터져 나왔다.
것 보라는 듯이 위청보가 눈살을 찌푸렸고, 제갈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웬 폭음이지? 폭음이 아니라 놀란 비명 소리여야 하는 건데…?”
의아해하는 사이, 지하실에서 진가린이 뛰쳐 올라왔다.
순식간에 주변을 훑은 그녀는 다짜고짜 위청보에게로 달려가 보급품 철검을 낚아챘다.
“놀라지 마세요! 지하실에 마인(魔人)이 있어요! 제가 막고 있을 테니 두 분은 어서 맹의 수비대에 신고해주세요!”
큰소리로 외친 그녀는 철검을 뽑아 들고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 앞을 막아섰다.
조금 전 폭음은 장력이 맞부딪치는 소리였던 듯 소맷자락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빨리 신고하러 가지 않고 뭐 해요? 제가 오래 막고 있을 수는 없다고요!”
두 눈을 지하실 문에 고정한 채로 진가린이 악을 썼다.
그리고 그 순간.
끼이익.
문이 열렸고, 당당한 체구의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 사람이에요! 실력이 장난 아닌 마인이라고요. 아니 거기 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신고하러 가던가 도망치던가 하라고요!”
마인이 계단을 절반 이상 올라올 때까지 선배들이 멍하니 있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다시 외쳤다.
이거 참 재밌는 수습이네.
제갈윤이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도망을 안 가는데?”
“누군가는 이자를 붙들어 놓아야죠. 제가 발견했으니 제가 책임집니다!”
“하하하, 책임은 무슨. 검 내려놓고 인사나 드려. 그분도 네 선배시다.”
“네에? 선배님이라구요? 분명 마공(魔功)이었는데… 어, 내 몸이 왜 이러지?”
쾅.
선배라는 말에 맥이 풀리면서 억지로 버티고 있던 진가린이 풀썩 쓰러졌다.
제갈윤이 깜짝 놀라 다가가 보니 오른팔이 온통 검은 기운으로 물들어 있었다.
“광 선배! 수습이 들어왔길래 좀 놀래 줄까 했던 건데 애를 이 꼴로 만들면 어떡합니까?”
“어쩔 수 없었다. 저 아이가 급습을 하는 통에….”
“수습이 먼저 공격을 했다고요? 아니 왜요?”
“낸들 아나. 물 가지고 왔다고 하더니 운기행공 중인 나와 소 사매를 유심히 보더라고. 그러더니 눈 몇 번 깜박일 시간 고민하는 듯하다 다짜고짜 공격을 하더군. 운기 중에 공격을 받은 터라 나도 당황했고, 저 아이의 내력이 선가(仙家) 계열이라 좀 위험하기도 했고. 어쩔 수 없이 맞받아쳤다.”
광군영과 제갈윤이 설명을 주고받는 사이, 지하실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소영영이 스르륵 올라왔다.
“이런 철없는 사내들을 동료라고 믿고 한배를 타고 있는 내가 미친년이지. 어린 아가씨가 육합흑철마장(六合黑鐵魔掌)을 맞고 쓰러져 있는데 빨리 치료할 생각은 않고 수다나 떨고 있으면 어떡해요!”
고운 두 눈을 매섭게 치켜떠 노려보자 둘은 무척 당황했다.
“아, 아니 소 선배. 그런 것이 아니라 우선 상황을 파악하느라….”
당황한 제갈윤이 핑계를 대는 사이 옆에 서 있던 위청보가 급히 진가린을 둘러업으려 했다.
“동작 그만! 이게 어디서 여자 몸에 함부로 손을 대!”
날카로운 목소리로 위청보를 제압한 소영영은 조심스레 진가린을 안아 들고 이 층의 숙소로 향했다.
불쌍한 것.
우선은 좀 쉬어라.
* * *
늦은 밤 문무대로 돌아온 강한월은 언제나처럼 술을 마시며 보고를 받았다.
“수습은 언제 깨어날 것 같은데?”
“한잠 푹 자도록 수혈을 짚어 놓았으니 내일 아침까진 세상 모르고 잘 거예요. 조금 전에 보고 왔는데 제법 내공이 정순한지 잠을 자면서도 흑철마기를 상당히 해소시켰더라고요.”
소영영의 대답에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강한월이 다시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저… 대장. 수습을 정식 대원으로 뽑으실 건가요? 혹시 다짜고짜 광 선배를 공격했다고 쫓아내실 건 아니죠?”
“너희가 보기엔 어떤데?”
강한월의 질문에 가장 먼저 대답을 한 것은 광군영이었다.
“난 정식 대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찬성이다.”
“왜?”
“결심이 서자 주저 없이 먼저 공격을 하는 과감함도 그렇고… 오른 손이 거의 마비가 되었는데도 검을 들고 계단을 지키고 섰던 책임감도 그렇고… 애가 야무져 보여.”
강한월이 아무런 반응 없자, 이번엔 소영영이 의견을 말했다.
“나도 찬성이에요.”
“너는 왜?”
“호호호, 시커먼 남자들 틈에 나 혼자 여자여서 심심했는데 여자 후배가 들어오면 좋잖아요. 같이 수다도 떨고. 게다가 제법 예쁘게 생겼어요. 나는 예쁜 애가 좋더라, 호호호.”
소영영의 의견에 강한월은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도 찬성이요. 일단 입맹 시험 전체 수석이니 능력은 있어 보이고… 이곳으로 데려올 때 보니까 설치된 진법도 한 번에 파악하더라고요.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것 같아요.”
“흥, 너는 막내 생활 벗어나고 싶어 그러는 거지? 네 밑으로 후배가 생기면 넌 무조건 찬성이잖아?”
위청보도 찬성을 하자 제갈윤이 지적을 하고 나섰다.
자리에서 펄쩍 뛰며 그런 거 아니라고 항변을 했지만 모두 듣는 둥 마는 둥.
“제갈, 네가 보기엔 어떤데?”
“대장! 제갈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어쨌거나… 저는 보류입니다. 광 선배나 소 선배 말처럼 장점은 있지만, 아직 부족해요. 혹시라도 일반적인 관념에 고착화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조직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상식, 고정관념, 사회적인 통념… 과연 이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알았다.”
“대장! 저는 이렇게 길게 설명을 드렸는데 그냥 ‘알았다’ 해버리면 어떡합니까?”
“알았으니, 시험을 보자.”
* * *
“아… 안 돼! 으아악!”
진가린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정말 끔찍한 악몽이었다.
문무대라는 이상한 이름의 악당들에게 끌려가, 지하실의 마인에게 공격당하는 꿈이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생생한.
마치 실제 같은….
어라? 왜 이렇게 생생하지?
진가린이 꿈에서 깬 그 순간, 강한월은 반대로 깊은 잠 속을 헤매고 있었다.
붉은 피로 그려낸 수채화 같은 꿈.
혈교의 광신도들이 자폭을 감행했고, 호교무사들은 끔찍한 천축의 무공으로 미쳐 날뛰는 꿈.
이미 여러 차례 봤던 그 장면이 오늘도 반복되었다.
청성파의 도복을 입은 어린 검수에게 쇄도하는 혈교의 무사.
상체를 노리고 날아드는 혈수인.
피하려고 몸을 뒤로 젖히는 어린 검수.
원숭이 혈승 제천대살과의 대결 장면과 겹쳐지며 오늘따라 꿈이 더 생생히 다가왔다.
소년 도사는 금강부동신공을 펼칠 수 없었기에, 이어지는 연계식에 무릎이 박살 나며 쓰러졌지만, 그 순간 강한월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조금은 홀가분해 보였다.
내가 혈승을 체포한 것이, 미래에서 이미 죽어간 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칠까?
어쩌면… 청성파 소년의 원한이 풀어진 것일까?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적어도 저 소년 만큼은 다시는 꿈에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