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화. 신입 진가린 (2)
* * *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눈을 뜬 진가린.
‘역시… 마(魔)가 낀 것이 틀림없어.’
어제 하루 종일 되뇌었던 생각을 다시금 떠올리며, 누군가 머리맡에 가져다 놓은 죽그릇을 들어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일층의 광경은 지난밤 꿈… 아니 어제 본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종이 더미 속에 파묻힌 제갈윤, 아침나절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위청보.
광 선배라는 자와 소복 여인은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지하실에 있는 것이리라.
“어, 수습 일어났구나. 거기 좀 앉아봐. 시험을 봐야 하니까.”
몸 상태는 어떤지 안부부터 묻는 것이 예의잖아요!
진가린은 속으로 발끈했으나, 꾹 참고 시키는 대로 앉았다.
“여기 열 사람의 인생을 기록한 보고서가 있다. 이 얇은 책자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상세하게 여러 일들이 기술되어 있어. 이걸 읽고 누가 가장 위험한 자인지 찾아내라. 시간은 한 시진 준다.”
제 할 말을 마친 제갈윤은 다시 서류더미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이 문무대라는 곳은 도대체 뭐 하는 곳이지?
고대 유물을 찾는 문화사업 부대라던데… 어울리지 않게 위험한 자를 가려 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조직이라 생각하며 그녀는 일단 책자를 펼쳤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진가린은 보고서의 내용에 점차 빠져들었다.
대상이 된 열 명은 그 구성이 제각각이었는데, 정파의 명숙, 대 방파의 수장은 물론 사파의 거두도 있었고, 황실의 대학사와 천하의 거부…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시골 영감까지.
처음에는 뭐 이리 쉬운 시험이 있나 싶었다.
열 명의 대상 중 흉악한 사파의 악당과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탐관오리가 있었으니 제갈 선배가 찾아보라 한 ‘위험한 자’는 이 둘 중 한 명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묘한 기분이 들었고, 덩달아 그녀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읽고 다시 읽고… 어느 부분에선 깊은 상념에 빠져들고… 그리고 다시 읽었다.
“수습! 시간 다 되었다.”
진가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졸고 있던 위청보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고, 광 선배라는 자와 소복 여인도 탁자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집중력이 제법이더군. 답은 찾았나?”
“네… 그것이… 우선 사파 거두 황아치와 탐관오리인 항주 지사 공 대인이 눈에 띄었습니다. 황아치는 밝혀진 것만 오백 명이라지만 제 추측으론 오천 명 이상의 인생에 악영향을 줬어요.
그리고 공 대인은… 생명까지 해친 경우는 많지 않지만 항주의 흑도들과 결탁하여 민생을 피폐하게 했습니다. 이차, 삼차 피해까지 가정하면 황아치 이상일 겁니다.”
“좋아, 타당한 분석이다. 그래서 정답은? 황아치냐 아니면 공 대인이냐?”
“저의 답은… 이것이 정답일 리는 없다는 전제로 말씀드리면… 광동 거부 진관입니다.”
순간 제갈윤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천하의 악당들을 놔두고, 광동 거부 진관이 가장 위험한 자라니?
“진관이라… 너도 읽었겠지만, 그는 뛰어난 상재로 쌓은 엄청난 부를 불쌍한 민초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광동 지방에선 생불(生佛)이라고까지 불리는 인물이다. 어째서 그가 가장 위험한 자라는 거지?”
“결과만 놓고 보면… 네, 맞아요. 그는 많은 선행을 베풀었죠. 하지만 선배가 준 과제는 위험한 자를 찾는 거지 선하지 않은 자를 찾는 것이 아니니까요.”
“맞다. 그렇다고 진관이 위험한 자라 단정할 수도 없을 텐데?”
“그렇긴 한데요… 저는 그가 부를 쌓은 과정이 마음에 걸려요.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뇌물을 주고 이권을 챙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려 일곱 번의 거대한 행운이 반복되어 거부가 된 거라고요. 쌀을 사면 홍수가 나서 가격이 폭등하고, 철광산을 사면 전쟁이 발발하여 부르는 게 값이 되었죠. 상재가 대단하여 손해를 본 적이 없다 했으니, 보고서엔 적히지 않은 작은 행운들도 그사이 수십 번 있었을 것이고요.”
“흥미롭군. 하지만 운이 좋다고 하여 위험인물이라 말하는 것은 억지 아닐까?”
“저는 수십 번 반복되는 행운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요. 정말로 진관이 전생에 큰 덕을 쌓았기에 하늘이 끝없는 행운을 그에게 몰아준 것일까요? 헤헤, 설마요.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겠죠. 뻔히 눈에 보이는 악당보다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자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약이 심하군.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도대체 뭔데?”
“그야 저도 모르죠.”
진가린의 허무한 대답에 선배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줬더니 결국 모른다는 답이라니.
“너도 참… 모른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다니. 어쨌건 그건 되었고. 저기 옆에 보자기로 싼 물건 보이지? 그 옆에 약도도 있으니, 지금 당장 약도에 표시된 곳으로 가져가서 대장께 전해드려라.”
“시험은 끝난 건가요?”
“끝났으니 심부름 보내는 거겠지. 결과는 나중에 알려줄 테니 잔말 말고 물건이나 배달해. 대나무밭에 설치된 진법은 문제없겠지? 어제 한번 지나왔으니….”
아니 이 사람들은 정말 나를 뭘로 보고.
“네네, 문제없습니다. 벌써 다 외웠다고요. 그럼 저는 심부름 갑니다.”
콰앙.
삐친 표정의 진가린이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가자, 위청보가 얼른 제갈윤에게 물었다.
“선배, 그래서 정답은 누군데요? 진관이 맞나요?”
“정답이 어디 있냐? 그냥 보는 관점을 시험해보기 위해 던진 문제였을 뿐인데.”
“그럼 결과는요? 수습이 시험을 통과한 건가요?”
“나쁘진 않네. 하지만 마지막 시험이 남았으니….”
* * *
보따리를 들고 무림맹을 나선 진가린은 낙양 시내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아니 이건 사람 다니는 길이야 아님 미로야? 뭐가 이리 복잡해. 도대체 그 대장이란 사람은 뭐 하러 이런 뒷골목에… 헛?”
뚫어지게 약도를 들여다보며 길을 찾던 그녀는, 어린아이를 안고 다급히 달려오는 젊은 여인과 부딪힐 뻔했다.
진가린을 피하느라 거의 쓰러질뻔했던 여인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다시 뛰어서 사라졌다.
곧이어 골목 저편에서 서너 명의 무인들이 진가린을 향해 달려왔다.
“이보쇼 아가씨. 방금 젊은 여자 한 명이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을 보았을 테지? 어느 방향으로 갔소?”
“보긴 봤는데요… 당신이 그 여자를 왜 쫓는지도 모르는데, 제가 방향을 알려드릴 수는 없는데요.”
“뭣이라? 빨리 말하지 못하겠소? 시간이 없단 말이오! 그 모녀는 마교의 교도란 말이외다!”
“어머! 그랬군요. 그 모녀가 마교의 교도였군요. 그런데요?”
“아니, 이 아가씨가 진짜! 우리는 낙양의 명문 정파인 태청문의 제자들이오. 이제 우리를 믿을 수 있겠지? 정파인 우리가 마인들을 잡아들이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니 협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소?”
“이보세요, 태청문 무사님들. 마인을 잡으려면 나쁜 마인을 잡아야지, 힘없는 여인과 어린아이를 잡으면 쓰나요. 아니면 그 여인과 아이가 사람이라도 죽였나요?”
“마교의 교도인 것이 곧 죄다!”
“에이, 그런 말이 어딨어요.”
그녀가 협조할 기미를 안 보이자, 태청문 무사들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조장. 길을 안 알려주고 시간을 끄는 것으로 보아 이년도 마교도인 것 같습니다.”
한 무사가 억측을 내놓자 흠칫 놀란 나머지 무사들이 검을 뽑아 진가린을 겨눴다.
“그래, 이제 보니 너도 마교도였구나. 어쩔 테냐? 순순히 그 모녀가 도망간 길을 불 테냐, 아니면 네가 대신 잡혀갈 테냐?”
이런 것이 명문 정파의 무사들이라고?
진가린은 정말로 열이 올랐다.
“아 진짜. 아저씨들이 잘 모르시나 본데… 나도 고향 마을 왈패들 사이에선 상종 못 할 도른자 소리 듣던 여자라구요!”
우두둑. 주먹을 꺾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몸이 부웅 떠올랐다.
퍽, 퍽, 퍼억, 으악, 쾅, 아이고.
잠시 후, 한 손에 보따리를 다른 손엔 약도를 쥔 진가린이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나섰다.
골목 벽에 기대어 앉아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청문 무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장. 저 제대로 맞았습니다. 멍이 열흘은 갈 것 같아요.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고작 열 냥 받고 할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그렇지? 있어봐라… 내 잘 이야기해서 약값이랑 회식비는 별도로 받아낼 테니.”
“그나저나 저 여자 누굽니까? 박력 쩌는데요. 얼굴도 예쁘고.”
“관심 꺼라. 저런 여자 만나면 평생 기 못 펴고 산다.”
* * *
골목 여기저기를 몇 번 더 헤맨 진가린은 결국 약도에 그려진 객잔을 찾을 수 있었다.
문무대의 대장이 이 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는데….
손님이라고는 창가에 앉아있는 단 한 명.
저 사람인가 대장이?
“진가린. 늦었군.”
맞구나. 대장.
그녀는 창가에 앉은 사내를 자세히 살폈다.
흑색 무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사내는 제법 키가 크고 날씬한 체형이었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문화사업 부대라곤 해도 명색이 대장이라 사십 대는 될 줄 알았더니 웬걸. 많이 잡아도 서른은 안되어 보이는 모습.
게다가….
뭐야? 왜 이렇게 잘 생겼어?
“대… 대장님이십니까? 오는 길에 작은 사고가 있어서 조금 늦었습니다.”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대장의 모습에 당황한 진가린이 말을 더듬거렸으나, 강한월은 아무렇지 않은 듯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의 할 말을 했다.
“어제는 마공을 수련 중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선배를 공격했다더니… 오늘은 웬일로 마교의 교도들을 지켜준 거지?”
어, 대장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그럼… 좀 전의 그것도 시험이었던 거야?
놀림을 당한 것 같아 기분이 상했지만, 대장의 눈빛이 너무도 진지했기에 기분 나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마교도라 해서 무조건 악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밝혀지지도 않은 모녀가 신분도 불분명한 무사들에게 잡혀가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 어제는? 광 대원도 그저 마공 수련을 했을 뿐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건물 앞에 설치된 방어진으로 볼 때 문무대는 극도의 보안을 요하는 무언가가 있는 조직이라 생각되었고, 그런 곳에 마공을 수련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술잔으로 반쯤 가려 있었으나, 분명 대장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 것 같았다.
고의로 실수를 연발하여 문무대에서 쫓겨날 계획이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성의껏 설명하고 있는 걸까?
그가 잘 생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수에 찬 눈빛 때문인가?
“수습대원 진가린. 아침에 제갈 대원이 실시한 시험의 결과는 듣지 못했으나 아마 그것도 통과했을 것 같군. 더 이상의 시험은 필요 없을 테고….
진 대원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지. 나와 함께 일해볼 생각이 있나? 만약 아니라면 원하는 다른 부대로 보내주겠네.”
원하는 다른 부대로?
기대하던 말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서운한 감정도 들었다.
시험을 통과했으면 데리고 일할 생각을 해야지… 뭐야, 이 사람?
청룡대로 보내 달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으나 이상하게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저, 저는 문무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선택을 하기가….”
“인간은… 그런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고 있지. 그냥 마음이 끌리는 쪽으로 결정하도록 해.”
다행히 탁자에는 여분의 술잔이 놓여있었다.
진가린은 아무 말 없이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고, 묵묵히 술잔을 들어 찰랑이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마음이 끌리는 쪽으로 결정하라고?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이런 이상한 부대에 마음이 끌릴 리가 있을까?
놀림당하고, 얻어맞고, 시험이나 당했는데….
그럼에도 왠지 마음이 끌렸다.
절대로 대장이 잘생겨서가 아니다. 잘생긴 남자야 다른 데에도 많을 텐데 뭐.
하지만 뭔가 비밀을 간직한 듯한 그 눈빛.
왠지 그 눈빛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아, 나도 모르겠다. 청룡대여. 내 어린 날의 우상이여… 안녕.
단숨에 술을 들이켠 진가린이 술잔을 내려놓고 정중히 포권을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