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화. 문무대 (1)
* * *
강한월과 진가린이 함께 돌아왔을 때, 문무대에는 신입을 환영하는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대단한 연회는 아니고 조촐한 회식 정도의 자리였지만, 맛깔나는 음식과 향기로운 술이 넉넉하니 흥겨움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오늘은 우리 문무대에 신입 대원이 들어온 기쁜 날입니다. 사실 그보다는 제가 막내 생활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요. 헤헤.”
사회를 맡은 위청보의 실없는 농담에 야유와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자, 그럼 대장을 제외하곤 문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인 ‘막내’ 자리를 차지한 진가린 대원에 대한 소개가 있겠습니다. 무림맹 인사 정보를 바탕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이름 진가린. 나이 스물셋. 길림성 청송문 장학송 문주의 수제자. 주로 검을 다루며, 무림맹 입맹 시험 병장기, 권각술, 내공, 필기 모두 일등! 당연히 전체 수석입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있는 진가린과는 대조적으로 선배들은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들어도 대단하네. 전 과목 일등이라니.”
“길림성 청송문이라… 미안하지만 나는 못 들어본 곳인데?”
광군영이 청송문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제갈윤이 나서서 설명을 해주었다.
“광 선배는 잘 모르실 수도 있죠. 사실 정파 내에서도 이름이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니까요. 신선(神仙)의 무학이라는 동방선도(東方仙道)의 정통이 계승되는 곳입니다. 문주이신 장학송 대협은 주화입마를 겪었던 이유로 극상승의 경지에 오르진 못했지만, 선도 무학에 대한 이해와 학식만큼은 따를 자가 없다고 저희 가친께서도 극찬하신 분이죠.”
“그렇군. 어쩐지 육합흑철마기를 하룻밤 사이에 스스로 치료하더니. 이제 이해가 되네.”
어머? 우리 사부님이 그렇게 대단한 분이셨어?
오히려 놀란 것은 진가린이었다.
눈물 많고 소심한 시골 영감 같은 사부님이 그런 높은 평가를 받는 분이라니.
“막내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으시겠지만 앞으로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가린이도 선배들이 궁금할 테니 제가 대신 소개를 좀 하겠습니다. 우선 제 소개 먼저 하면….”
위청보가 진가린에게 정중히 포권을 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강소성 모산파 출신인 위청보라고 해. 특기는 부적, 환술, 강신, 기문둔갑 뭐 그런 잡술들이야. 나이는 스물넷.”
“청보. 소개가 너무 부실한 거 아니야? 모산파 상청일맥의 위대한 비술을 잡술이라니? 그리고 네가 유력한 차기 장문인 후보라는 이야기도 해야지.”
제갈윤이 위청보를 타박하며 설명을 추가했다.
모산파의 상청 일맥이라… 진가린도 들어본 적 있었다. 동방선도에서도 드물게 인정하는 도교 좌도 방술의 태두.
문도의 수가 극히 적고 폐쇄적이라 강호 활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들었는데, 문무대에 들어와 있다니 제법 놀랄 일이었다.
“그럼 다음 분을 소개하자면, 여기 똑똑하게 생긴 분은 제갈윤 선배. 아버님이 제갈세가의 가주이시고 숙부님이 무림맹 총군사이시지. 나이는 스물여섯. 특기는 말할 것도 없이 머리 쓰는 일. 정보분석, 작전수립, 진법, 기관, 산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제갈윤은 제갈세가 출신이었지만, 가주의 아들이라는 것은 뜻밖이었다.
오대세가 가주의 자녀들은 청룡대 등 인기 부대도 눈에 차지 않아 보통은 간부급으로 무림맹 활동을 한다고 하던데….
모산파의 계승자에 오대세가의 직계까지.
정말 알면 알수록 궁금증만 늘어갔다.
하지만 진가린의 놀람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으니, 앞으로 소개될 선배들의 이력은 더욱 특이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 유일한 여자 선배는 소영영 선배. 나이는 음… 모르겠고, 특기는 경공, 암기술, 영환대법, 섭혼술….”
“호호호, 소개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내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미모와 성격이지!”
아무도 동의해주지 않고 딴청을 피우는데도 해맑게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성격이 좋다는 것은 사실 같았다.
그러고 보니 미모도 꽤 대단하긴 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을 입어 귀신 같아 보이는 것만 빼면.
그나저나 특기가 영환대법과 섭혼술이라고? 그건 금지된 술법 아닌가?
“저, 소영영 선배님은 어느 문파 출신이신지…?”
“아, 내가 그 이야기를 안 했던가? 소 선배는 천마신교(天魔神敎)의 차기 신녀(神女) 후보 중 한 분이셔.”
“네? 천… 마… 신교요? 혹시 십만대산에 있는 그 천마신교?”
너무 큰 충격에 진가린은 들고 있던 술잔을 놓칠 뻔했다.
무림맹 소속 부대에 천마신교 출신의 대원이라니… 말도 안 돼!
“그 이름을 쓰는 곳이 또 있었던가? 내가 알기론 한 곳밖에 없는데. 그나저나 뭘 그렇게 놀래? 지하실에서 광 선배와 소 선배 마공 수련하는 것 보고 대충 눈치챈 것 아니었나?”
물론 두 선배가 마공을 익힌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한권을 익혔다고 해서 모두 소림사의 승려는 아니듯, 마공을 수련한다고 반드시 천마신교 소속이라는 법은 없었다.
마교에 속하지 않고 홀로 수련하는 마인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럼 선배들은 천마신교를 나와서 정파로 전향하신 건가요?”
“전향은 무슨. 그냥 특별 파견 형태로 천마신교에서 지원 나오신 거지.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 거고, 소개를 마저 하면….”
흠흠, 헛기침을 두어 번 한 위청보가 마치 대단히 중요한 사람을 소개하는 듯 분위기를 잡고 말을 이었다.
“이분의 이름은 아마 들어봤을 거야. 고수가 구름처럼 많은 천마신교에서도 특별한 분이지. 이십 대의 나이에 천마신교 호교사신장에 임명되어 강호를 떠들썩하게 했던… 흑철기린(黑鐵麒麟) 광군영!”
당연히 들어보았다.
마도의 젊은이들에겐 하늘과 같은 우상이며 정파의 후기지수들에겐 악몽과 같은 이름.
이대로면 삼십 년 후의 천하제일 고수 자리는 마인이 차지하게 될 거라며, 구파일방의 수장들이 어린 제자들을 달달 볶게 만든 자.
어머? 그럼 내가 감히 흑철기린에게 선공을 날렸던 거야?
놀란 눈으로 한동안 광군영을 바라보던 진가린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대장을 보았다.
대원들이 이렇게 대단하면, 대장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다는 말인가?
진가린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위청보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장의 이름은 강한월. 그냥 그렇게만 알아. 잠시 후 우리 조직을 설명할 때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
애걔? 겨우 이름만?
입을 삐죽 내민 진가린이 곰곰이 대장의 이름을 곱씹었다.
강한월. 차가운 달….
제법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자, 소개는 얼추 되었으니 이제 우리 문무대의 임무에 대해 말해야겠지? 이건 조금 복잡하니 나보다는 제갈 선배가….”
“그래, 내가 설명할게. 음… 그러니까 전전대 무림맹주셨던 팽소월 대협께선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으셨어. 무인들도 사회에 기여를 해야 한다며 무림맹 내에 문화 사업단을 발족하신 거야. 몇 가지 사업을 펼쳤지만 크게 주목받진 못했고, 이후 전대 맹주셨던 신주의협께서 퇴임 전에 고대유물 조사를 목적으로 하는 우리 문무대를 만드셨지. 목적은 말 그대로 천하에 퍼져 있는 숨겨진 유물을 조사하고 발굴하는 거야.”
“아! 그래서 천마신교와도 협업을 하게 된 거군요. 문화라면 정(正)과 마(魔)를 굳이 가를 필요가 없으니.”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진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막내가 수석 입맹이라 척하면 척이구나. 바로 그런 거지. 그런데… 너 정말 이해가 되는 거니?”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제갈윤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고, 진가린은 반대로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 난 무림맹과 천마신교가 고작 문화사업 하겠다고 협력할 리 없잖아요.”
“그럼 어떤 경우에 협력할 수 있는데?”
“흠… 글쎄요? 혹시 사파 연합이 갑자기 미쳐서 정파와 마교를 동시에 공격한다고 하나요? 아니면 반정을 꿈꾸는 대역죄인을 소탕하라는 황제의 밀명?”
“하하하, 진가린 너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구나.”
“아닌가요? 어쨌건 정과 마가 협력하는 일이라면 천하의 안위나 인류의 생존이 걸린 중요한 일이 틀림없어요. 그게 고대 유물 발굴은 아닐 것 같네요.”
“역시 신입을 잘 뽑았어. 눈치가 장난이 아니네. 네 말이 맞다. 우리가 고대 유물을 조사한다는 건 다 뻥이야. 세상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거고, 거짓을 일삼아 무림맹의 예산을 멋대로 사용하고 있는 거지.”
문무대에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제갈윤이 긍정을 하니 진가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대가 사기를 치고 있다고요? 도대체 진정한 우리 임무가 뭐길래?”
“회귀자. 미래에서 도망쳐온 악당들을 체포하는 거다.”
* * *
회식을 마치고 침상에 누웠으나, 진가린은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좀 전 제갈윤이 해줬던 이야기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이백 년 후의 미래에 혈교(血敎)라는 사교(邪敎) 집단이 생겨난다.
혈교의 근원은 분명치 않으나, 천축에서 배척받은 어둠의 수행자들이 서장 밀교의 사술을 접목한 후 중원으로 옮겨온 것이라 추정된다 했다.
이름부터 으스스한 혈교는 피의 힘을 숭상하고 혈신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주요 활동이었다.
이런 사교를 누가 믿을까 싶겠지만, 교세는 의외로 빠르게 확장됐다.
최고위 제사장들인 열두 명의 혈승들이 보이는 이능(異能)과 신통이 대단했고, 무엇보다 피의 신께 드리는 제사인 혈제(血祭)를 올릴 경우 건강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고된 삶을 살고 있던 민초들, 특히 고령이거나 몸이 아파 죽음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에게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혈제가 말 그대로 피로 드리는 제사라는 것.
소(小) 제사는 백인혈(百人血), 중(中) 제사는 천인혈(千人血), 대(大) 제사는 만인혈(萬人血)이 필요하다 했으니, 여기저기서 희생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갔다.
당연히 중원의 협객들이 이를 좌시할 리 없었다.
무림맹을 중심으로 혈교를 처단하기 위한 척혈단(刺血團)이 꾸려졌고, 의와 협으로 무장한 고수 협객들이 속속 합류했다.
그렇게 척혈단과 혈교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름난 고수들이 대거 포진한 척혈단이었지만 쉽사리 혈교를 제압하지는 못했다.
혈교의 무승들이 펼치는 천축과 서장 밀교의 무공이 대단했고, 순교를 통해 영생을 얻겠다며 자살 공격을 감행하는 광신도들을 상대하기가 난감했던 것이다.
죽고 죽이는 전쟁은 삼 년 넘게 지속되었다.
하지만 결국 무림맹 척혈단이 승기를 잡았다.
혈교가 득세하는 것을 고깝게 생각하던 천마신교가 은밀히 도움을 주었고, 황제마저 혹세무민의 죄를 물어 혈교 말살을 명했기 때문이었다.
혈교의 세는 꺾였다.
중원 곳곳에서 패하고 밀린 혈교의 수뇌부는 감숙성 기련산맥의 한 봉우리로 피신했다.
기련산맥으로 숨어든 혈교의 잔당들은 쥐 죽은 듯 잠잠했다.
일체의 포교 활동도 없었고 혈제로 누군가가 희생되었다는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척혈단은 끈질기게 혈교의 수뇌부를 추적했다.
비록 지금은 잠잠하더라도, 열두 명의 혈승들이 남아있는 한 언젠가는 다시 기지개를 켤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갈윤에게 들은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을 테지만, 술이 거하게 오른 그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래,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들으면 되지. 잠이나 푹 자두자.’
하지만 진가린은 그 밤을 뜬눈으로 지샐 수밖에 없었다.
회귀자, 혈교, 척혈단… 지금껏 생각해본 적도 없는 단어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무림맹 들어와서 인생 좀 펴나 했더니… 이런 이상한 조직에 뽑혀가지고….’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한숨이 끝나고 난 후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어쨌거나 꽤나 재미있을 것 같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