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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8화 (8/210)

008화. 문무대 (2)

* * *

다음 날 아침, 눈이 벌겋게 충혈된 진가린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대장은 외출을 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다른 선배들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맑은 국물로 해장을 하고 있었다.

“가린아. 피곤해 보이네? 잠을 잘 못 잤어?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진가린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장국이 놓였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허기를 달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궁금증을 푸는 것.

“저, 제갈 선배. 어제 하던 이야기 계속해 주면 안 될까요?”

“어? 아. 그래야지. 그런데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내가 술이 좀 취했어서.”

“혈교는 기련산맥으로 숨어들었고, 척혈단은 끈질기게 추적했다는 것까지 들었습니다.”

“아, 그랬구나. 그럼 그다음을 이야기해 줄게. 해장하면서 편하게 들어. 그러니까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냐면….”

혈교는 매우 조용히 숨어들었지만 척혈단은 결국 단서를 잡았고, 혈승들이 숨어있는 봉우리를 향해 말을 달렸다.

산 아래에서부터 치열한 대결이 펼쳐졌다.

마지막 승부라는 것을 직감한 혈교 측에서도 최정예 호교 무사들을 모두 내세워 봉우리를 지키려 했다.

죽기를 각오한 적들을 하나하나 베어 넘기며 진격한 척혈단이 드디어 혈승들의 은신처에 도달했다.

은신처의 문을 열고 들어간 그들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둥그렇게 원형을 그리며 배치된 열두 개의 돌 제단 위에 열두 명의 혈승들이 좌선한 자세 그대로 죽어 있던 것이다.

패배를 직감하고 자살한 것인가?

아니면 가짜의 시체를 이곳에 두고 진짜 혈승들은 도망간 것일까?

그런데 그때, 척혈단의 대원인 모산파의 도사와 제갈세가의 고수가 돌 제단과 시체를 살피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알 수 없는 고대문자가 양각되어 있는 제단은 마치 비술을 위한 도구 같았고, 혈승들의 시체에는 혼(魂)만 사라지고 백(魄)은 남은 것 같았다.

즉시 비술과 대법에 정통한 고인들을 모셔와 제단을 살피게 했다.

한 달 넘게 분석과 연구를 계속한 결과 열두 명의 혈승들이 죽지 않고 탈출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금지된 대법. 회귀의 비술.

그들의 영혼이 도주한 것이다.

이백 년 전의 과거로.

“어때? 무시무시하지?”

찻물로 목을 축이며 제갈윤이 물었다.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하듯 그는 웃고 있었지만, 진가린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미 천하를 피로 물들인 경험이 있는 무림 공적. 황제마저 적으로 돌렸던 미래에서 온 적들을 추적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그러면서 고대 유물을 조사하는 문화사업 부대라고?

지금 장난해?

“그런데 선배. 선배 말이 다 사실이라 쳐도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미래의 그 사건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었냐는 거지?”

역시 제갈세가. 척하면 척이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진가린을 향해 제갈윤이 남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미래의 무림맹.

혈승들이 과거로 회귀했다는 결론이 전문가들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무림맹이 발칵 뒤집혔다.

혈승들이 과거로 가서 역사를 바꿔 놓는다면, 자신들의 운명 또한 바뀔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과거가 바뀌면서 자신의 존재가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맹주를 위시한 거대 문파의 존장들은 척혈단 단주에게 엄한 명령을 내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해결책을 찾으라고.

무제한의 자금이 지원되었고, 비술과 대법에 정통한 천하의 모든 학자들이 부름을 받았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척혈단 단주와 함께 밤낮없이 연구를 계속하던 학자들이 결국 방법을 찾아냈다.

“하지만 학자들이 찾은 방법은 완벽한 것은 아니었어. 원래는 제단을 복구하려고 했는데… 혈승들의 뒤를 쫓아 과거로 가서 그들을 처단할 결사대를 꾸리려고 했지.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고… 겨우 성공한 것은, 정보를 담고 있는 의식을 과거로 전송하는 거였어.”

“아, 그럼 이 모든 정보들이….”

“그래, 미래의 무림맹에서 대법을 펼쳐서 현재의 우리에게 보내준 정보야. 그 이후에 우리가 노력해서 추가로 알게 된 것들도 좀 있지만.”

“지금도 미래의 무림맹과 교신하고 있나요?”

“아쉽게도 단 한 번뿐이었어. 의식을 전송하려면 혈승들이 남기고 간 제단을 활용해야 하는데, 몇 차례 반복된 실험으로 제단의 영력(靈力)이 감소하는 바람에 단 한 번의 전송밖에 못 했다고 하더군.”

“그 한 번의 전송… 미래에서 온 정보를 받은 사람은 누군데요?”

“글쎄, 과연 누굴까?”

“혹시… 우리 대장?”

“막내가 역시 똑똑하구나. 얼추 맞췄네. 하지만 정확히는 대장이 아니라 대장의 사부님이야. 바로 전대 무림 맹주이신 신주의협 고검 대협이시지.”

아! 대장이 전대 맹주님의 제자였구나!

어쩐지… 이런 대단한 선배들을 대원으로 데리고 있더라니.

왠지 자신만 초라한 것 같아 의기소침해지려는 찰나, 제갈윤이 설명을 이어갔다.

“미래의 무림맹에서는 한 번뿐인 기회를 헛되이 낭비할 수는 없으니 이 시대의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고른 거야. 협과 의의 대명사이자 천하제일의 고수로 이백 년 후의 후손들까지 기억하고 있던 신주의협이 딱이었지.”

당시 신주의협 고검은 막 무림맹주의 자리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한적한 장원에 은거하고 있었다.

어느 날 평안한 하루를 마치고 잠들었던 고검은 한줄기 강렬한 빛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느낌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초월경의 고수였던 그는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 즉시 자세를 가다듬고 자신의 상단전 속을 관조했고… 잠시 후 경천동지할 정보를 담고 있는 의식 한줄기를 만났다.

“그럼 우리 문무대의 실질적인 대장은 신주의협이신 거네요?”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아. 문제가 좀 있었는데…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담은 의식이 강제적으로 그분의 뇌 속으로 주입되면서 상단전에 엄청난 자극이 가해졌고, 결국 장기적인 치료를 요하는 부상을 입게 되셨지. 어쩔 수 없이 신주의협께선 제자인 우리 대장에게 모든 정보를 전달해 뒷일을 부탁했고, 또 무림 맹주의 권한으로 문무대를 급히 만드셨어. 그걸 마지막으로 맹주에서 은퇴하신 후 곧바로 치료를 위한 폐관에 드셨단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의 일.”

“그렇게 된 거군요.”

“그래. 그렇게 시작된 거였어. 이후 대장이 처음으로 한 일은 자신과 함께 임무를 수행할 동료를 구하는 일이었지. 가장 먼저 대장이 찾아간 곳은…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천마신교?”

“맞아. 미래에서 온 이 놀라운 정보를 믿어줄 사람, 혈승들을 상대하는 것에 보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럼에도 회귀자일 확률은 극히 희박한 사람. 이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사람이 바로 천마신교의 당대 천마셨다.”

* * *

진가린은 떨리는 마음으로 굵은 쇠창살 앞에 섰다.

열두 명의 혈승과 미래에서 보내준 정보에 대한 설명을 마친 제갈윤이 본격적으로 회귀자의 특징에 대해 설명해주겠다며 지하실로 데리고 온 것이다.

수련실인 줄 알았던 지하실의 기관장치를 작동시키자 더 깊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지하실은 놀랍게도 사층까지 있었고, 지하 이 층부터 사 층까지 층마다 네 개씩 총 열두 개의 수감실이 있었다.

그 중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수감실 앞에 진가린이 섰다.

그녀의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선배들의 말을 듣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방안에 잡혀 있는 것이 누구인지를….

“이자가 미래에서 온 열두 명의 혈승 중 한 명이다. 신(申), 즉 원숭이 혈승이지.”

제갈윤의 설명을 들은 진가린이 떨리는 눈으로 혈승을 살폈다.

사십쯤 되었을까, 머리채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점잖게 수염을 기른 모습.

품격 있는 중년의 모습을 한 사내가 느긋한 자세로 침상에 누워있었다.

“위험하진… 않나요?”

“뭐 일단은. 공력을 폐하고 고도의 점혈 수법으로 금제를 가했거든. 수감실의 쇠창살과 벽면도 만년한철을 주조해 만든 것이니 부수지는 못할 거고. 하지만 위험한 자인 것은 분명해. 잡히기 전에는 제천대살이라는 유명한 살수였으니.”

“이 사람이… 회귀자인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소 선배가 확인시켜줄 거야. 실은 그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고.”

말을 마친 제갈윤이 손을 들어 쇠창살을 탕탕탕 때렸다.

“이보세요, 원숭이 혈승. 안 자는 거 다 아니까 눈 좀 떠봐요. 신입이 들어와서 소개시켜 주려고 그래요.”

꽤나 시끄러운 소리에 원숭이 혈승이 마지못해 눈을 떴다.

“신입이라… 강한월 그자의 거짓말에 놀아나는 희생양이 하나 더 추가된 거냐?”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였으나,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진가린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 희생양이라 치고요… 어쨌거나 신입 교육시켜야 하니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잔혼반(殘魂斑)을 확인시켜주려고요.”

“그따위 반점으로 무엇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런 거짓 놀음에 휘둘려서 나에게 옷자락을 벌리라고? 흥, 당연히 싫다.”

“소홍주 세 병 드릴게요.”

소홍주라는 말에 혈승의 눈빛이 흔들렸다.

“열 병!”

“다섯 병이요. 더는 안 돼요.”

앞자락 한번 열어주는 것으로 술 다섯 병이면 수감된 그에겐 뜻밖의 행운.

잔뜩 인상을 찌푸린 혈승이 마지못해 옷자락을 열었다.

진가린은 똑똑히 보았다.

혈승의 명치 부근에 보랏빛으로 빛나는 동그란 반점이 있는 것을.

이즈음인가? 반점이 나타나는 위치가?

진가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명치 부근을 만져보았다.

잔혼반이 나타나는 바로 그 위치… 손끝에 무언가가 만져졌다.

“잘 봤지? 저 보라색 반점이 잔혼반이야. 잔혼(殘魂), 그러니까 원래 있던 영혼의 잔유물이 새로 들어온 회귀자의 영혼과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흔적이란다. 평소엔 보이지 않지만 술법을 펼쳐 특수한 조건을 만들어주면 시약이 체내에 남아있는 한 저렇게 빛나게 되지….”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진가린은 멍하니 자신의 명치 부근을 만지고 있었다.

“저자를 원숭이 혈승이라 부르는 걸 들었지? 열두 명의 혈승은 각각 십이간지(十二干支) 열두 동물을 상징으로 가지고 있단다.”

“그럼 회귀할 때도 해당 띠에 맞는 사람의 몸으로 회귀한 건가요?”

“미래 무림맹의 정보에 의하면 그렇다더군. 저들이 회귀한 시점은 대략 이십 년 전이야. 육십갑자의 테두리 안에서 십이간지의 짝을 맞춰 회귀했다고 생각돼. 그러니 회귀자일 확률이 있는 사람은 현재 나이 스무 살에서 여든 살 사이인 것이지.”

“스무 살에서 여든 살… 그렇다면 우리도 회귀자일 확률이 있는 거네요.”

“하하, 맞아. 사실이야. 실은 회귀자인데 아직 각성하지 못한 걸 수도 있지. 그나저나 가린이 너는 무슨 띠지? 스물세 살이면 양띠인가?”

“양띠 맞아요.”

“그럼 빨리 양띠 회귀자를 잡도록 해. 그래야 너는 회귀자가 아니라고 안심할 수 있거든.”

진가린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으며, 자기도 모르게 명치 부근으로 손이 갔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런 심각한 표정 짓지 말라고.”

개구장이처럼 웃음을 터뜨린 제갈윤이 몸을 돌려 지하실을 나갔다.

선배들을 따라 계단 입구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혈승이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거기 신입! 너는 피가 맑고 고와 내 특별히 정이 가는구나. 너를 위해서 해주는 말이다. 절대로 강한월을 믿지 마라! 그 비열한 거짓말의 희생자가 되지 말라는 말이다!”

진가린은 발걸음을 멈출뻔했으나, 선배들은 못 들은 척 앞으로 나아갔다.

계단을 오르기 직전 고개를 슬쩍 돌려보는 그녀를 향해 혈승이 다시 한번 외쳤다.

“다음에는 너 혼자 찾아오도록 해라! 진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꼭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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