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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9화 (9/210)

009화. 문무대 (3)

* * *

제갈윤이 진가린을 교육시키고 있던 그 시각, 강한월은 무림맹 깊숙한 곳에 위치한 원로원을 방문 중이었다.

후원 연못에서 잉어들이 노니는 것을 구경하고 있을 때, 풍채 좋은 노인이 수염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사백을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뒷방에서 허송세월하는 늙은이가 안녕치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하나밖에 없는 사질이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드니 그게 서운할 뿐이지.”

노골적인 핀잔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눈빛은 따뜻했기에 강한월도 그저 미소 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무림맹 원로원의 원주 사마염은 전대 무림맹주 신주의협의 사형이니, 강한월에게는 사백이 되었다.

비록 사제인 신주의협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성격이 원만하고 무공 또한 뛰어나서 결국 무림맹 원로원주의 자리에 오른 인물.

“한월이 너 주려고 아껴 두었던 양하주(洋河酒)다. 여전히 술을 즐기겠지?”

노인이 들고 온 술병의 마개를 땄다.

정자 밖에까지 퍼져 나가는 백주의 진한 향기.

“사백이 주시는 술이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 사부와 나는 그다지 공통점이 없다만 그나마 한가지 통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술이다. 둘 다 술을 즐겼기에 소통도 원활했고 깊은 우애를 다질 수 있었지. 한월이 너도 사부를 닮아 술을 즐기니 기쁘구나. 자주 좀 찾아와서 이 늙은이의 술친구를 해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허허허.”

강한월과 사마염은 옛 추억을 안주 삼아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사마염이 꺼내 놓은 양하주는 정말 좋은 술이었다.

하지만 강한월은 알고 있었다.

술이나 마시자고 자신을 부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한월아….”

술병이 바닥을 보이려고 할 때, 사마염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네가 하고 있는 일… 도대체 언제까지 그 일에 매달릴 생각이냐? 우리 금검문의 장래가 네 어깨에 달려있는데, 네가 남에게 드러낼 수도 없는 일에 빠져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애당초 한두 해에 결론을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맡아서 시작을 했으니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겠지요.”

“글쎄다. 네 의지가 굳건한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난 아직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물론 네 사부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믿지만 말이다.”

“이미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열두 명의 혈승 중 한 명을 체포한 것은 사백께서도 이미 확인하신….”

“그래. 하지만 회귀자들이 더 있다는 보장이 없지 않냐? 내 원로원 원주의 권위를 활용하여 적극 지원하고 있다만, 이렇게 비밀리에 돕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구나.”

“누군가 문무대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입니까?”

“며칠 전 신입 무사를 뽑아간 일이 있었지? 전체 수석을 한 인재를 놓쳤다고 몇몇 부대장들이 항의를 하더구나.”

“수석인 것은 맞지만 작은 문파 출신이라 청룡대 등에서는 별 관심이 없었을 텐데요?”

“그렇지. 그냥 꼬투리를 잡은 거지. 그러니 더 문제인 거다. 너의 문무대를 아니꼽게 보는 눈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니. 애당초 검을 들고 무림에 나선 그들이 문화사업을 좋게 볼 리 만무한 거고. 조만간 문무대에 배정되는 예산에 대한 불만도 터져 나올 거야.”

“사백께서 힘을 좀 써주시지요. 정보 수집을 위해서는 자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한계가 있어. 게다가 마교의 인물들이 몰래 참여하고 있으니 내가 가지는 불안감이 얼마나 크겠느냐? 차라리… 맹주에게만은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어떨까?”

“아직은 안됩니다. 맹주가 회귀자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맹주 또한 회귀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회귀자의 나이대는 이십에서 팔십 사이.

천마신교의 교주 장철성은 이미 구십이 넘었기에 회귀자가 아니라 확신할 수 있었지만, 현 무림맹주 위무진의 나이는 오십 대 중반이라 후보에서 배제시킬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맹주 위무진은 몇 번의 기연을 통해 절대경의 무공을 얻었다고 알려진 인물.

당연히 요주의 인물일 수밖에.

“흐음… 답답한 일이로구나. 마교와 공조하고 있는 것이 들통나면 너와 나는 물론 네 사부까지, 나아가 우리 금검문 전체가 정파의 공적으로 몰릴 거야. 더군다나 문무대를 고깝게 보는 눈이 늘고 있으니, 전대 맹주인 네 사부의 이름을 팔아 버틸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 술잔을 들어 목으로 넘기며 사마염이 말했다.

“회귀자 추적에 바쁘겠지만, 우선 고대 유물 한두 개라도 좀 찾아보도록 해라. 눈에 보이는 실적이 있어야 예산이 깎이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테니. 나는 나대로 별도의 자금 후원자를 물색해보마.”

* * *

문무대로 돌아온 강한월은 즉시 대원들을 소집했고, 사마염 원주와 나눴던 이야기를 설명했다.

“역시 그렇군요. 저도 그런 낌새는 눈치채고 있었어요. 맹의 총군사인 제 숙부님도 그런 안 좋은 시선을 가진 분들 중 하나인지라….”

제갈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 숙부였는데, 문무대에 합류한 이후에는 아예 남 보듯 하는 사이가 된 것.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사부님이 맹주에서 은퇴하시며 마지막으로 만들어 놓은 부대이니 쉽게 손댈 수는 없을 거야. 어쨌건 사마염 원주님의 조언도 일리가 있다. 문화재 발굴 실적도 좀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겠어. 그래서 절강성에 한 번 다녀올까 하는데, 혹시 그쪽 회귀자 조사하고 있는 것은 성과가 좀 있나?”

“아! 절강성에서 발견될 예정인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진본을 찾아오실 생각이세요? 그럼 마침 잘 되었네요. 마침 항주 오성상단에서 미끼를 물기 시작했거든요.”

오성상단은 칠팔 년 전 절강 상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객잔의 주방에서 일하던 윤대호라는 자가 오성상회라는 작은 상점을 연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하여 삼 년도 안 되어 상단으로 이름을 바꾸더니 지금은 절강성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거대 상단으로 성장했다.

지금과 같은 성장세라면 앞으로 오 년 안에 강남 최고가 될 거라는 것이 세간의 평가.

너무도 빠른 성장이라 제갈윤의 눈에 띄었고, 일 년 넘게 공들여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것이다.

“대장이 알려주신 미래 정보에 의하면, 올여름 절강성 일대에 기록적인 홍수와 태풍이 몰아쳐 엄청난 피해를 입지 않습니까? 쌀 가격이 몇 배로 뛰게 될 텐데, 얼마 전부터 오성상단이 주요 농산물의 매점매석을 시작했어요. 그들은 원래 농산물을 취급하지 않는데도 말이죠.”

“확실히 냄새가 나는군. 그런데 미끼를 물었다는 말은?”

“원래 홍수 뒤에는 전염병이 도는데, 이번에 유행할 전염병의 치료제에 고려 인삼이 필요할 거라서요… 대량으로 인삼을 팔 것처럼 소문을 흘렸더니 오성상단에서 덥석 물더라고요.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가격을 불렀는데도 말이죠.”

농산물을 매점매석하는 것에 더불어 전염병을 치료할 약재까지 비싸게 사들인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정도 고약한 냄새가 난다면 직접 가서 확인함이 당연했다.

어차피 유물을 확보하러 절강성에 들러야 하니 잘된 일.

“좋아, 그럼 오성상단을 조사하기 위해 항주로 가는 것으로 하지. 이번 임무에 투입될 대원은….”

강한월이 항주에 갈 대원을 호명하려는 순간, 소영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호호호, 나는 갈래요. 전부터 항주를 꼭 보고 싶었어요. 하늘에 천당이 있으면 땅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다는 말도 있잖아요. 가린아, 너도 나랑 같이 항주로 가자. 너도 좋지?”

“네? 아… 물론 저도 가보고 싶긴 한데요….”

소영영이 해맑게 웃으며 같이 가기를 청했지만 진가린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선배들도 눈빛에 생기가 도는 것이 몹시 가고 싶은 것 같은데, 막내인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닌 듯했으니까.

역시나 웬만하면 입을 열지 않는 광군영도 슬며시 손을 들었다.

“나도 항주로 가겠다.”

“아니, 광 선배는 서안으로 가야 해요.”

딴에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자원한 것이지만, 단칼에 제지하는 제갈윤.

“갑자기 서안은 왜?”

“실은 대장이 절강성 이야기를 안 했으면, 서안에 가보자고 하려던 참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왜 서안이냐고?”

“최근 서안 흑도를 장악한 곽철이라는 사내가 있는데 확인해볼 필요가 있어요. 정보원들의 말에 따르면 특이한 천축의 무공을 쓴다고….”

“그런가? 천축의 무공을 쓰는 자라면 확인해봐야겠네. 그렇지만 꼭 내가 갈 필요는….”

“헤헤, 흑도의 거친 사내를 잡으러 가는 거잖아요. 광 선배가 딱이죠.”

나도 부드럽고 섬세한 남자라고 항변하려는데… 강한월의 결정이 한발 빨랐다.

“자, 조는 이렇게 나누도록 하겠다. 항주의 오성상단은 나, 소영영, 그리고 진가린이 맡는다. 섬서는 광군영, 제갈윤이 맡고, 위청보는 이곳을 지키도록. 내일 아침 즉시 출발한다. 이상.”

* * *

진가린이 챙길 짐은 많지 않았다.

작은 보퉁이에 옷가지 몇 개를 집어넣으니 길 떠날 준비가 끝났다.

명색이 다 큰 숙녀인데 짐이 이렇게 단출해도 되는가 스스로 자책하다가, 문득 지하실의 혈승이 떠올랐다.

그녀는 강한월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달빛이 내려앉은 창가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객잔의 이 층에서 처음 본 그날처럼 우수에 젖은 눈빛.

왜일까? 이 사람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짧게 한숨을 내쉬어 정신을 가다듬고, 찾아온 용무를 밝혔다.

“대장, 술 있으시죠? 지하실 혈승에게 소홍주 다섯 병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이건 무슨 소린가 고개를 갸웃하던 강한월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술은 책장 위에 있다. 백주도 몇 병 가져다주도록 해. 독한 술이 필요할 테니.”

인심은 좋구나.

대장은 알고 있을까?

혈승이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 * *

양팔에 술병을 가득 품고 지하 수감실로 내려왔다.

벽에 작은 호롱불 하나만 밝혀져 있는 어둡고 음침한 지하실.

“하하하, 신입 네가 왔구나. 드디어 진실을 대면할 마음의 준비가 된 건가?”

술 냄새를 맡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진가린이 반가웠던 것인지 혈승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이름은 진가린이에요. 당신은 내 선배가 아니니 신입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역시 맑은 네 영혼처럼 이름도 예쁘구나. 그래, 앞으론 이름을 부르지. 우리는 자주 보게 될 테니.”

흥. 진가린은 티 나게 인상을 찌푸리면서 쇠창살 사이로 술병을 밀어 넣었다.

소홍주… 그리고 백주 다섯 병 더.

“제갈 그 녀석이 약속했던 것보다 양이 늘었군. 뭐 좋은 일이긴 한데… 백주 다섯 병은 강한월이 보태 준 건가?”

“그래요. 우리 대장은 당신과 달리 좋은 사람이거든요.”

“강한월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하하하. 아니야, 그럴 리가.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것이다.”

소홍주는 밀쳐 두고 독한 백주의 뚜껑을 여는 혈승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가린이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었다.

“저기… 그런데요… 다른 영혼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요?”

영혼의 흔적?

막 술병을 들고 입가로 가져가던 혈승의 눈에 묘한 빛이 감돌았다.

“왜? 그게 왜 궁금한 거지?”

“아니… 그냥요. 아까 잔혼반을 보면서 조금 놀라기도 했고… 회귀자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흥, 말했지 않느냐 난 회귀자가 아니라고. 그런 식으로 나를 떠볼 필요 없다. 진실을 대면할 준비가 안 된 자에게는 해줄 말이 없으니.”

“치, 됐거든요. 나도 궁금하지 않다고요! 다시 볼 일 없을 테니 술이나 쳐드세요!”

역시 괜히 찾아온 건가….

진가린은 화를 내며 지하실을 떠났다.

비릿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혈승이 큰소리로 외쳤다.

“진가린! 다음에 또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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