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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0화 (10/210)

010화. 항주로 가는 길 (1)

* * *

다음 날 아침.

신분 위장을 위한 옷가지와 고려 인삼 몇 포대를 챙긴 강한월은 소영영, 진가린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작전을 구상하느라 머리가 복잡한 강한월과는 달리, 여인들은 몹시 신난 표정이었다.

“가린아, 나 이렇게 여행하는 거 너무 신나. 내가 살던 십만대산은 정말로 척박한 곳이었거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소영영의 모습을 보며 진가린은 웃음을 지었다.

마교의 신녀(神女)에 대한 강호의 무성한 소문들이 떠올랐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마녀. 사람을 산채로 제물로 드리는 마신의 제사장. 덕이 높은 고승마저 승복을 벗게 만드는 음란한 요물….

치, 말도 안 돼. 정말로 강호의 소문이란 것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선배는 어떻게 신녀 후보가 되셨어요? 특별한 조건이 있나요? 수백만 교도들에게 추앙받는 숭고한 지위인 거잖아요?”

“응? 조건은 무슨… 그냥 그런 피를 타고난 거지. 숭고할 것도 없고….”

대답하는 눈빛이 왠지 서글퍼 보였다.

신녀는 천마와 함께 가장 지고한 위치라던데… 선배는 신녀가 되기 싫은 건가?

의아함을 느낀 진가린이 다시 질문을 하려고 할 때, 소영영이 활짝 웃으며 먼저 말했다.

“동생! 오늘같이 즐거운 날 그런 우중충한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 재밌는 이야기를 하자고. 평소에 먹고 싶었던 거 없어? 이럴 때 먹어 봐야지. 우리 대장님한테 전부 다 사달라고 조르자.”

“하하하, 좋아요. 우선 빙당호로부터 먹어요!”

* * *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객잔에 짐을 풀고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강한월은 진가린과 소영영을 한산한 공터로 불러냈다.

“우리 임무는 위험하다. 위기의 순간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본인과 동료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만 해. 그런 의미에서 비무를 하도록 하겠다.”

에둘러 표현했으나 진가린의 실력을 한번 보자는 뜻이었다.

소슬하게 뜬 달빛을 받으며 진가린과 소영영이 마주 섰다.

진가린이 검을 든 반면, 소영영은 양손에 비수 두 자루를 쥐었다.

풀어헤친 머리, 하얀 소복, 서늘한 한기를 뿌리는 비수… 그녀의 모습이 달빛과 어우러져 귀기(鬼氣)를 자아냈다.

천마신교의 신녀 후보는 과연 어느 수준일까?

진가린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강한월이 지켜보고 있으니….

하단세의 기수식으로 후배의 예를 갖춘 진가린의 선공으로 비무가 시작됐다.

단전에서 편안하고 따뜻한 기운이 일어나 온몸으로 퍼져 나가자 진가린의 차가운 검에도 온기가 스며들었고, 그 순간 유연하면서도 빠른 검이 소영영의 상단을 노리고 튕기듯 뻗어갔다.

검이 가슴 바로 앞에 도착할 때까지 움직임이 없던 소영영이 갑자기 눈부신 속도로 물러서며 검을 피하더니, 물러선 것보다 더 빠르게 튕겨 나오며 양손의 비수로 진가린을 노렸다.

진가린의 진가가 발휘된 건 그때부터.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을 읽는 건지, 아니면 비수를 타고 흐르는 기의 방향을 읽는 건지… 마치 소영영의 초식을 미리 아는 것처럼 미리 움직여 투로(鬪路)를 선점하는 진가린의 검.

당장의 움직임은 물론 이후 펼치려 했던 변화마저 막히자, 소영영은 즉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우와, 동생 대단한데!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네? 초상감각 뭐 그런 건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냥 제가 배운 검이 이런 식이라….”

“좋아, 이제 좀 빠르게 간다. 조심하라고.”

특기가 경공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영영은 전보다 두 배는 빠르게 움직였다.

긴 머리카락은 바람을 타고 공중에 휘날렸고, 양손의 비수는 차가운 예기를 뿌리며 진가린을 노렸다.

어디 이런 속도에서도 네 예측이 통할지 두고 보자는 듯이.

소영영의 가속이 격해짐과 동시에 진가린 감각도 더 예리하게 눈을 떴다.

그녀가 익힌 것은 오로지 흐름, 그리고 자연스레 그 위에 얹어지는 선검(仙劍).

무공을 단편적인 초식으로 인식하지 않고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니, 속도의 차이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진가린이 상대의 흐름을 잘도 끊어가자, 상대하던 소영영은 물론 지켜보던 강한월의 표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소영영. 속도를 좀 더 높일 수 있지? 신교의 공력도 사용해보고.

귓가에 강한월의 전음이 파고들자, 소영영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본신 공력인 마공을 억제하느라 답답했는데, 대장이 그걸 원한다면야….

몸을 옭아맸던 그물을 벗어 던진 듯 움직임이 원활해지며, 중단전에 묶어 두었던 마기(魔氣)가 피부 곳곳에서 분출됐다.

아지랑이처럼 퍼지는 검은 마기를 보고 진가린이 화들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면서 진기의 흐름마저 답답해졌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마공의 침투로구나!

천마신교의 고수들은 기세만으로 상대를 질식시킨다더니….

막연한 공포에 더해 공력 운용마저 방해받자 진가린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이러다가는 큰 부상을 입힐 것 같아 소영영이 속도를 줄이려고 할 때, 다시 한번 강한월의 전음이 귓가에 울렸다.

—늦추면 안 돼. 그대로 밀어붙여!

정말 그래도 될까?

제발 잘 막아내기를 기원하며 눈 딱 감고 공세를 퍼부었다.

아슬아슬하게 진가린의 몸 이곳저곳을 훑고 지나가는 두 자루 비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고 옷 소매와 고름도 베어졌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멈추려고 할 때, 갑자기 진가린의 입에서 맑은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압!

순간 진가린의 눈동자가 맑게 빛나더니, 별빛이 내려앉은 듯 검신이 반짝였다.

마기의 공포에서 벗어난 듯 표정은 담담했고, 날렵하게 뻗는 검은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양쪽에서 쇄도하는 비수 사이를 잉어처럼 유영하는 진가린.

비수는 거칠었지만, 이미 흐름을 탄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만 시간은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호흡하는 공기가, 상대의 투지가 보였다.

그리고 다시 뻗어오는 비수, 아니 비수가 장악한 공간이 보였고, 동시에 비어 있는 공간이 보였다.

눈앞에 몇 가지 선이 그어졌다.

비수 하나가 오른 가슴을 노리고 온다.

행로를 막을 최단 선이 그어졌다.

이런… 나의 선이 짧다. 막을 수 없다.

하지만… 한 걸음 옮기며 몸을 틀어 다른 비수 하나를 쳐내면… 새로운 선이 그어진다.

할 수 있다.

차앙!

“그만.”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강한월이 짧게 외쳤다.

소영영이 비수를 거두고 풀쩍 뛰어 물러섰고 진가린도 가쁜 숨을 내쉬며 검을 내렸다.

“동생 정말 대단한데! 명색이 내가 진마(眞魔)의 경지인데 이렇게나 잘 상대하다니!”

소영영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진가린을 끌어안았다.

실은 진가린도 스스로를 칭찬하는 중이었다.

소영영이 자신을 진마라 칭했으니 정파의 기준으로 보자면 절정의 경지.

물론 선배가 많이 양보해준 것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칭찬을 받을 만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슬쩍 강한월을 돌아보았는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냉랭한 대장의 얼굴.

뭐야 저 표정은? 설마 내 실력이 마음에 안 든 거야?

“진가린. 너 정말 엉망이구나. 수석 합격을 했다는 것이 믿기질 않는군.”

당사자가 아닌 소영영마저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심한 혹평.

진가린은 하마터면 손에 든 검을 놓칠 뻔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이 엉망이란 말씀이신지….”

“네 실력은 지금 들쭉날쭉이다. 차라리 실력이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해. 네 사부님이 그렇게 가르치셨을 리는 없고,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네 노력이 부족했던 거겠지.”

“제 노력이 부족했다고요?”

“넌 영목(靈目), 즉 심안(心眼)을 타고난 것 같다. 흐름을 예측하는 능력과 감각은 초절정 고수의 그것 못지않아. 그리고 선기를 발동해 주변의 자연지기와 동화하는 능력은 과연 동방선도라는 감탄이 나오더군. 하지만… 네 종합적인 실력은 잘 봐줘야 일류. 이십 대 무림 초출의 어설픈 솜씨에 불과하다.”

난 이십 대 무림 초출이 맞는데 어쩌라고!

울컥하는 마음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꾹 참았다.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어쨌든 그런 조화롭지 못한 몸 상태로는 혈승들을 상대할 수 없어. 이번 여행이 끝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개선되길 바란다.”

“개선이라면… 어느 수준을 뜻하시는 거죠?”

“최소한 검기를 뿌려대는 절정고수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겠지.”

* * *

“선배. 대장의 눈에 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강해야 하는 걸까요?”

침상에 누운 지 한참이지만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던 진가린이 소영영에게 물었다.

“흐아암. 아까 대장이 말한 것이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야? 그거 칭찬이었다고. 우린 네가 일류 수준이라 알고 있었는데, 대장은 일정 부분 초절정의 모습을 엿봤다고 한 거잖아. 나 같으면 기뻐서 춤이라도 추겠다.”

“칭찬 아니었다고요. 대장 표정이 얼마나 싸늘했는데요.”

“호호호, 너 단단히 삐쳤구나? 그럴 필요 없어. 솔직히 삐치려면 내가 삐쳐야지 왜 네가 삐치니? 내가 예전에 첫 작전에 투입될 때는 실력 확인을 위한 비무 같은 거 시키지도 않았어. 너한테만 특별히 관심을 가져준 거라고.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내일을 위해 잠이나 자두세요.”

* * *

‘왜 그렇게 심하게 다그쳤을까?’

진가린이 상심에 빠져 뒤척거리던 그 시각, 강한월도 뒤늦은 후회에 빠져 있었다.

솔직히 칭찬을 해줘도 모자라지 않은 실력인데….

물론 당장 혈승들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긴 했다.

하지만 방금 뽑은 신입 무사에게 그 정도를 기대하는 건 애당초 무리한 일.

그럼 왜 그리 심하게 그녀를 다그친 걸까?

진가린의 재능을 보고 무언가 기대를 품게 되었기 때문일까?

타고난 심안(心眼), 훌륭한 사부를 둔 덕에 체득한 자연과 소통하는 선기(仙氣), 그리고 마교의 고수와 첫 대결을 펼치면서도 움츠리지 않는 투지(鬪志).

이런 요소들이 합쳐졌으니 언젠가는 정상에 우뚝 서는 고수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당장엔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있으니… 그게 아쉬웠던 걸까?

아니, 비무를 지켜보며 강한월의 감정이 격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뛰어난 사문의 교육을 받고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직 고수가 되지 못한 그녀를 보자니, 자연스레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당대 천하제일 고수라는 사부를 두고, 미래의 무림맹이 보내준 마불진경(魔佛眞經)까지 연마하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한심한 자신의 모습.

‘사부님도… 칭찬이 인색하셨지.’

사부 신주의협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왔다.

병은 치료가 되신 걸까?

지금쯤 어디를 여행하고 계실까?

스멀스멀 치밀어 오르는 상념과 그리움을 억누르기 위해, 강한월은 정자세로 앉아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대원들이 볼 때는 늘 술만 마시는 그였지만, 실은 하루도 수련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여행 중일 때도 마찬가지.

우선 사부에게 전수받은 금검공(金劍功)부터 가다듬기 시작했다.

청명하고 순후한 기운이 일어, 기맥을 타고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대주천을 한 바퀴 이룬 후 상단전으로 기운이 모이자, 머리 위로 날카로운 기세가 떠올랐다.

명확한 형태를 갖추진 못했지만, 그것은 분명 거대한 검이었다.

세상 모든 삿되고 악한 것들을 단숨에 베어버릴 것 같은 올곧은 기세가 담긴 검.

검으로 천하를 내려다보는 무당이나 화산의 고수가 봤더라면 경탄을 토해냈을 모습이었지만, 강한월은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검의 형태를 온전히 이루고, 그다음엔 검을 녹여 없애 자신의 마음에 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금검문(金劍門)이 추구하는 궁극의 경지, 심검(心劍).

한 시진 가량 검의 모양을 바로잡으려 씨름하던 강한월은 가볍게 한숨을 토하며 금검공을 풀었다.

이제 마불진경을 연마할 시간.

익히기 시작한 지 고작 삼 년 남짓이지만, 꽤나 성과도 있었고 무엇보다 재미가 상당했다.

진영과 이념을 떠나 우정을 나눈 고인들의 사연도 그렇지만, 마(魔)와 불(佛)의 무공을 동시에 연마한다는 자체가 매우 어려웠기에 그의 승부욕을 자극했던 것이다.

시작해볼까.

하단전에서는 장엄한 불가의 기운이, 반면 중단전에서는 패도적인 마도의 기운이 일어났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오묘한 진동음이 흘렀고, 금광과 마기가 동시에 강한월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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