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항주 오성상단 (1)
* * *
제 이십 년 일백삼십이 일.
날씨 맑음.
인생을 오래 살다 보면… 아니, 인생을 두 번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마련이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드물다.
제천대살이라는, 제법 명성을 떨치는 살수가 우리 오성상단에 ‘살인 예고장’을 보냈다.
황당했고, 그래서 궁금했다.
살인을 의뢰한 배후는 누구일까?
살수는 어째서 ‘예고장’을 보낸 걸까?
두려울 건 없다.
오성상단은 일반 상단이 아니고, 나 또한 일반인이 아니니까.
하지만 주변의 눈이 있으니 경비를 강화하는 척 연기를 할 수밖에.
그래서 호위무사를 추가로 채용하는 공고장을 냈다.
* * *
제 이십 년 일백삼십칠 일.
날씨 흐린 뒤 맑음.
나조차도 놀랐다.
오성상단의 호위무사가 되길 희망하는 놈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공고를 낸 지 겨우 며칠인데, 백 명 넘는 무사들이 몰려왔다.
덕분에 관심도 없는 채용 과정을 하루 종일 지켜봐야 했는데.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내 눈길을 끄는 지원자가 한 명 있었다.
외모도 보잘것없고, 체격도 작은 변변찮은 놈이었는데….
비무 대결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최종 심사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검과 도를 휘두르는 지원자들 틈에서 맨손 박투술로 싸우는 모습을.
상식을 뛰어넘는 기묘한 초식 앞에 경쟁자들은 하나둘 쓰러져갔다.
그럴 수밖에.
상상도 못 했던 처음 보는 기괴한 초식과 싸움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처음 보는 초식이 아니었다.
어설프게 위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분명 ‘그 무공’이었다.
* * *
“가린이… 무사해야 할 텐데요.”
호위무사 출근 첫날.
진가린이 오성상단 정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소영영이 말했다.
“믿어보자고. 순발력도 좋고 재치도 있는 아이니까.”
“그렇긴 하죠. 그래도 조심해야 할 텐데. 그나저나… 회귀자가 과연 미끼를 물까요?”
“가린이가 선발대회 내내 혈교의 초식을 썼으니, 만약 이곳에 혈승이 있다면 분명 알아봤을 거야. 누군가 접근할 거고, 그자가 혈승일 가능성이 높겠지.”
문제는 그것이었다.
여러 정황상 오성상단에 혈승이 있을 가능성은 높은데, 상단주 윤대호가 바로 그라는 확신은 없다는 것.
안전을 위해 본인은 뒤로 숨고, 윤대호를 허수아비로 전면에 내세웠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제갈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처음부터 오성상단과 함께했던 인물은 총 세 명.
상단주 윤대호, 총관 고천식, 그리고 호위대장 이막기가 바로 그들이다.
일단 이 세 명을 용의 선상에 놓았고, 효율적인 조사를 위해 진가린이 호위무사 선발에 응시하여 위장 침투한 것이다.
그렇기에 항주로 오는 길 내내 진가린은 혈교의 무공 초식을 배워야 했다.
재능이 남다른 진가린은 그럴싸하게 흉내를 내게 되었고….
그것은 강한월이 혈승에게 던지는 첫 번째 미끼.
“가린이는 잘할 테니 걱정 말고, 소영영 너도 슬슬 준비를 해야지?”
“호호호, 제 역할은 쉬운 일인데요 뭐. 맡겨주세요!”
* * *
오성상단 상단주 집무실.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면 항상 그렇듯, 상단주 윤대호와 고천식 총관, 그리고 호위대장 이막기가 모였다.
“고려 인삼을 팔겠다는 자를 만나기로 한 것이 오늘이었지?”
“그렇습니다. 가격은 좀 비싼듯싶지만 대신 많은 물량을 공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격은 중요치 않아. 두 배를 주는 한이 있어도 최대한 물량을 확보해야지.”
“물론입니다.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모든 인삼을 사들일 생각입니다.”
“좋아. 그 건은 고 총관이 맡아서 잘 처리하게.”
값비싼 용정차로 목을 축인 윤대호가 이번에는 호위대장 이막기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새로 뽑은 무사들은 어떤 것 같은가?”
“다들 고만고만하지만 세 명은 좀 쓸만합니다. 황석, 류무담, 그리고 정발산.”
“살인 예고장 때문에 상단 일꾼들이 잔뜩 겁먹고 있네. 사람들이 안심하도록 무사들을 잘 배치하게.”
“그러겠습니다. 일단 상급 무사 세 명은 상단주님과 고 총관, 그리고 제 앞으로 각각 배치하려 합니다만….”
“잠깐. 정발산은 내 호위로 붙여주시오.”
느닷없이 고 총관이 치고 나오자 이막기는 당황스러웠다.
“고 총관의 호위로요? 안될 건 없지만….”
“내 호위들은 모두 칼잡이 아니오? 박투술을 쓰는 친구가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이막기가 슬쩍 윤대호의 눈치를 살폈다.
웬만하면 총관이 원하는 건 들어주는 상단주였지만….
“아니, 정발산은 내 호위로 쓰겠네.”
* * *
오성객잔 귀빈실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손님이 들어왔다.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넉넉한 풍채의 여인.
“어서 오시오. 소 부인. 길림성에서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처음 뵙겠습니다, 고 총관님. 거래만 성사된다면 거리가 문제겠습니까?”
“하하, 맞는 말씀. 우리 같은 장사꾼들이야 돈만 된다면 지옥에라도 찾아가는 법이지.”
“바로 그렇지요. 왠지 오성상단과는 뜻이 잘 맞을 것 같네요. 호호호.”
입에 발린 인사말이 오간 후, 고 총관은 곧바로 거래를 시작했다.
“그래, 소 부인이 공급할 수 있는 인삼이 얼마나 된다고요?”
“가격만 맞는다면 팔백 관까지는 보내 드릴 수 있지요.”
“팔백 관? 적은 양은 아니지만 기대보단 못하군. 천오백 관 정도는 필요한데….”
“석 달 안에 공급할 수 있는 건 팔백 관이 한계입니다.”
소 부인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고 총관의 눈빛이 변했다.
“석 달? 기한을 제한하는 이유가 있소?”
“글쎄요? 저희 장수상단 주인께서 그렇게 정하셔서요. 석 달이 지나면 의미가 없을 거라고.”
뭐지 이 여자는?
알 수 없는 싸한 느낌에 고 총관은 마른 침을 삼켰다.
“뭐 좋소. 팔백 관으로 합시다. 희망하는 가격은?”
“시세의 세 배.”
“미쳤소? 지금 제정신이오?”
고 총관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 부인이 태연하게 미소 짓는 것으로 보아 농담은 아닌데….
분명 뭔가 있다.
“아, 내가 흥분을 했군. 사과하겠소. 하지만 세 배는 너무 심한….”
“장수상단 주인께서 정한 거라 저도 별도리가… 가격이 맘에 안 드시면 어쩔 수 없지요. 온 김에 항주 구경이나 하고 돌아갈 수밖에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윤대호 상단주께 여쭤봐야 하니.”
“그러시지요. 이 건이 성사되면 고 총관께는 별도로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선물? 내가 뒷돈이나 챙기는 사람으로 보이는 거요?”
“그런 건 아니고. 저희 장수 상단이 약재를 취급하다 보니 가끔 특이한 물건이 들어오는데… 별 가치가 없는 거지만 어떤 사람에겐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어서요.”
“도대체 무슨 물건이길래?”
“오백 년 묵은 혈목버섯입니다.”
소 부인이 뚫어져라 자신을 살피는 것을 알았지만, 고 총관은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마음의 격동이 컸다.
혈목버섯.
구하기 매우 어렵고, 또 그만큼 필요한 것.
“처음 듣는 약재로군.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준다면 고맙게 받겠소.”
“그럼, 전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정중한 인사를 건넨 소 부인이 귀빈실을 나섰다.
이로써 두 번째 미끼가 던져졌다.
* * *
“그것들이 세 배 가격을 불렀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보다… 석 달로 기한을 정한 것이 더 수상합니다. 마치 석 달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것처럼.”
“확실히 냄새가 나는군. 그것도 아주 심한 악취가.”
“어떻게 할까요?”
“일단 가격 협상을 하는 척 시간을 끌게. 뒷조사를 할 시간을 벌어보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내일 만나기로 했으니 두 배 가격 이상은 어렵다고 튕겨보죠.”
“그리고 이막기. 내일 소 부인의 뒤를 미행해서 숨겨진 뭐가 없는지 확인해봐.”
“네. 제가 직접 뒤를 밟겠습니다.”
“그래. 믿을 건 자네밖에 없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좋아. 그 외에 보고할 내용은?”
잠시 머뭇거리던 고 총관이 답했다.
“없습니다.”
그 순간, 문밖에서 경비를 서던 신입 호위 정발산, 아니 진가린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그려졌다.
‘없다고? 그렇다는 말이지….’
* * *
강한월과 소영영의 숙소로 누군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가린이 왔네? 미행을 당한 건 아니겠지?”
“아니요. 미행이 있으면 이리로 안 왔죠.”
“그건 그렇지. 호위무사 일은 어땠어?”
“급여가 무림맹보다 세더라고요. 하하하. 하지만 이놈의 변장 때문에 불편해 죽겠어요. 피부가 늙는 것 같아.”
“호호, 괜찮아. 이 선배의 변장술을 뭘로 보고. 내가 사용하는 유액은….”
피부 미용에 대해 토론하는 그녀들을 보고 강한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가린에게 별 탈이 없는 것은 다행이지만… 애써 던진 미끼에 아무 반응이 없었단 말인가?
“진가린. 보고할 것이 없는 거야?”
“아, 그렇죠. 제가 보기엔 고 총관이 의심스러워요.”
“어째서?”
“혈목버섯에 대해 상단주에게 보고하지 않더라고요. 혼자 꿀꺽할 생각인 거죠.”
사실 혈목버섯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강한월도 알지 못했다.
다만 이백 년 후 혈교가 혈목버섯을 싹쓸이했다는 정보만 알고 있을 뿐.
그래서 슬쩍 미끼로 던져 본 것인데….
“중요한 단서구나.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해. 다른 정보는 없나?”
“그리고 이막기 호위대장이 슬쩍 말해준 건데, 고 총관이 저를 자신의 호위무사로 붙여 달라고 했데요. 윤대호가 허가를 안 했지만.”
혈목버섯에 이어 정발산에 대한 관심까지.
모든 정황들이 고 총관을 지목하고 있긴 한데….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라 보기엔 아직 부족했다.
“이제 겨우 하루 지났으니 며칠 더 지켜보자. 분명 그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테니.”
“알겠어요. 그리고 이건 오성상단 내부 지도예요. 급하게 그린 거라 어설프지만, 중요해 보이는 곳들은 제가 표시를 해놨어요.”
지도는 어설프지 않았다.
하루 만에 이걸 파악하느라 얼마나 애썼을지가 눈에 선했다.
“전 다시 들어가 봐야 해요. 짐 챙겨온다는 핑계로 잠시 나온 거라.”
“진가린. 조심해라.”
“걱정 마세요. 대장도 이따가 조심하고요.”
* * *
오성상단 내원으로 들어오는 길에 진가린은 이막기와 마주쳤다.
땀으로 흠뻑 젖은 것을 보니 막 무공 수련을 마친 것 같았다.
의외로 열심인 사람이네?
“너! 신입 무사가 어딜 함부로 돌아다니는 거냐?”
“객잔에 맡겨 뒀던 짐을 찾아오는 길입니다. 이제 이곳에서 숙식을 하게 되어서요.”
“그런가? 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는 밖에 나가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이막기를 지나쳐 내원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번엔 고 총관과 마주쳤다.
고 총관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인사도 받지 않고 황급히 사라졌다.
‘뭐야? 뭘 훔치다 걸린 사람처럼….’
멀어지는 고 총관을 응시하던 그녀의 콧속으로 비릿한 향이 스며들었다.
남다른 육감을 가지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미세한 향.
그건 분명 피비린내였다.
* * *
검은 야행복과 복면으로 전신을 가린 강한월이 오성상단 지붕 위로 스며들었다.
이제 자신의 시간.
진가린이 준 정보는 유용했다.
순찰을 도는 무사들을 피해 어렵지 않게 목표점에 도착, 오성상단의 주요 문서들을 보관하는 방이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책자와 문서들이 여럿 있었지만, 강한월의 눈길을 끈 것은 한쪽 구석에 자리한 거대한 금고였다.
정교하고 복잡한 시건장치.
강한월은 정신을 집중해 한줄기 진기를 열쇠 구멍으로 흘려보냈다.
이런 모양이구나.
얇은 철사를 꺼내 이리저리 구부린 후 구멍에 넣었다.
찰칵.
금고 속에는 봉투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강한월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길지 않은 글이었지만,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공식 유언장.
상단주 윤대호가 사망할 경우 모든 재산과 권리를 고 총관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심스레 금고를 닫은 강한월이 스르륵 천장 위로 올라갔다.
성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은신술을 펼쳐 빠져나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