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항주 오성상단 (2)
* * *
제 이십 년 일백삼십구 일.
날씨 흐림.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제천대살의 살인 예고장을 받은 후 줄곧 그랬다.
정발산, 소 부인… 무엇보다도 혈목버섯.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거나, 혹은 은밀한 신호.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형제들 중 하나가 나를 찾는 것이거나, 혹은 교에 배신자가 나타난 거겠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먼저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다.
어쩌면….
지금껏 잘 사용했던 꼭두각시를 버려야 할지도.
* * *
톡, 톡, 톡, 톡.
고 총관의 손가락이 쉬지 않고 탁자를 두드렸다.
무언가 불만스러울 때 나타나는 그의 버릇.
‘흥, 마치 지가 상단을 일군 것처럼 굴다니. 실은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한번 일기 시작한 불만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더 이상 간과하면 안 되겠다 생각하는 순간 귀빈실의 문이 열렸다.
“이런, 제가 총관님을 기다리게 했군요.”
“아, 소 부인. 어서 오시오.”
“안색이 불편하신 걸 보니, 윤대호 상단주께서 인삼 가격에 동의를 못 하시나 보네요?”
“이보시오, 소 부인. 결정은 윤 상단주 혼자 하는 게 아니오. 내 의견이 상단주 의견 못지않게 중요하지. 어쨌건 우리 오성상단은 세 배 가격은 줄 수 없소.”
“그런가요? 이해하기 어렵네요. 최소 열 배의 수익을 남길 수 있는 거래를 마다하시다니.”
“흥, 무슨 자신감으로 열 배 운운하는지 모르겠군. 어쨌건 거래를 깨자는 건 아니오. 두 배 가격에 합시다.”
“제 귀엔 깨자는 걸로 들리는데요. 안타깝네요. 이번 건을 계기로 앞으로 다른 큰 건들을 함께 하고 싶었는데….”
“다른 큰 건이라니?”
“설마 전염병이 이번 한 번만 돌고 끝날 것 같나요? 이 년 후의 그 일이 터지면 우리 도움이 필요할 텐데요?”
고 총관의 안색이 굳었다.
이 년 후의 그 일이란 도대체 무얼까?
정말로 뭔가 엄청난 기회가 있다는 말인가?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오.”
“좋아요. 세 배 가격을 불렀으니 세 번은 협상을 해야겠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소 부인. 그런데… 그 혈목버섯은…?”
“호호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건 거래가 성사되면 드리겠다고.”
소 부인, 아니 소영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고 총관의 눈에 진한 아쉬움과 열망이 묻어났다.
* * *
호위대장 이막기가 은밀히 소영영의 뒤를 추적했다.
미행이 있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그녀는 강한월의 숙소가 아닌 다른 객잔으로 향했다.
팔백 관의 인삼을 거래하는 상인답게 크고 화려한 곳이었다.
고급스런 별실로 들어간 그녀는 느긋하게 차를 달여 마셨다.
그리고는 옆문으로 이어진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뽀얀 수증기가 욕실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소리 없이 별실 문이 열리고, 이막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여인이 목욕을 시작했으니 족히 이 각은 걸리겠지.
이막기는 소영영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옷가지, 화장품을 거쳐 인삼 보따리에 손을 넣었을 때, 작고 단단한 상자가 손에 잡혔다.
‘이건 뭐지? 중요한 것 같은데….’
상자를 열어보니 꼬깃꼬깃 접힌 작은 종이가 있었다.
[ 인삼 가격. 두 배 가격 밑으로는 거래 말 것 ]
[ 이 년 후 광동 대지진에 소비될 약재 거래 가능성 미리 타진할 것 ]
‘이건 장수상단주의 명령서구나. 흥, 두 배에 거래할 거면서 튕긴 거네. 그런데… 이 년 후 광동 대지진…?’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욕실에 들어가 물어볼 수도 없는 일.
잠시 고개를 갸우뚱한 이막기는 다시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발견되는 것은 없었고, 소영영이 목욕을 끝내기 전 조용히 별실을 빠져나갔다.
* * *
달이 떠오르는 시간.
강한월과 소영영이 머무는 곳에 누군가 찾아왔다.
“가린아? 네가 웬일이야? 앞으로는 상단에서 숙식을 해야 한다며?”
“급하게 보고할 것이 있어 몰래 빠져나왔어요. 이제 거의 확실해진 것 같아서요.”
“응? 무슨 일인데?”
“그러니까 오성상단 회의실에서 제가 몰래 엿들은 건데요….”
회의실에 모인 것은 윤대호와 고 총관.
소영영을 미행했던 이막기가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였다.
장수상단의 목표가 실은 두 배 가격이라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협상할 때의 상술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윤대호와 고 총관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 것은 ‘이 년 후의 광동 대지진’이란 정보인데, 이것은 한몫 챙길 큰 건 정도로 치부할 내용이 아닌 것이다.
“고 총관과 이막기가 윤대호에게 묻더군요. 미래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게 사실이냐고. 윤대호는 즉답을 못 했어요. 자기도 확인해봐야 한다며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죠.”
홀로 회의실을 나선 윤대호는 개인 서재로 향했다가 한 식경쯤 후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예언서를 확인한 결과 이 년 후 대지진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윤대호는 대지진 같은 건 잊고 인삼 건이나 신경 쓰자고 했고, 고 총관은 예언서가 세상의 모든 일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니 장수상단의 말을 들어나 보자고 맞섰다.
그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회의는 끝났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업무 교대를 한 후에 즉시 이리로 달려온 거예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오성상단에는 미래 정보가 담겨있는 ‘예언서’라는 것이 있고, 그걸 손에 쥐고 있는 건 윤대호란 말이네.”
“맞아요. 그림이 딱 그려지지 않나요?”
“무슨 그림? 윤대호가 회귀한 혈승이라는 그림?”
“아이, 선배는 참. 그게 아니죠. 고 총관이 혈승이라는 그림이죠. 그렇죠, 대장?”
묵묵히 듣고만 있던 강한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가린의 추리는 그럴듯했다.
앞서 확보한 정보와도 이빨이 잘 맞았다.
“실제 혈승은 고 총관인 것 같구나. 윤대호는 허수아비로 내세운 인물이고. 아마도 칠팔 년 전 어느 시점에 ‘예언서’라는 책자를 만들어 우연인 것처럼 윤대호의 손에 들어가게 만들었겠지. 윤대호는 그 정보를 기반으로 사업을 이끈 것일 테고. 대신 윤대호가 죽으면 오성상단이 고 총관의 수중에 떨어질 수 있게끔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게 만든 걸 거야.”
“어머, 정말 그런 것 같네요. 근데 왜 직접 안 나서고 허수아비를 내세운 걸까요?”
“그것까진 알 수가 없구나. 아마도 고 총관은 몹시 조심스러운 성격인 것 같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언제라도 몸을 뺄 수 있게 이중장치를 만든 게 아닐까?”
“혹시라도 누군가 의심하면 윤대호 혼자 뒤집어쓰게 만들어 놓은 거죠. 그리고 언젠가 윤대호는 의문의 사고를 당해 사망하게 될 테고.”
심증은 굳어졌다.
더 이상의 증거를 찾는 것은 무의미했다.
“언제 시작할까요?”
“늦출 필요 없겠지. 지금 즉시 오성상단으로 가자. 우선 이막기를 제압해서 호위대를 무력화시키고, 그다음 고 총관을 잡는다.”
“윤대호는요?”
“흠… 윤대호도 가만둘 수는 없겠구나. 그 ‘예언서’라는 것을 압수해야 하고, 가능하면 그의 기억도 지워야겠다.”
* * *
거대 상단의 호위대장은 꽤나 높은 자리이다.
도합 일백 명이 넘는 호위무사와 경비무사를 거느렸고, 무엇보다 급여가 높았다.
하지만 무림에서 인정받는 자리일 수는 없었다.
장사꾼의 호위 같은 거… 협(俠)을 추구해야 할 수준 높은 무인이 할 일은 아닌 것이다.
세간의 그런 평을 알면서도 이막기는 묵묵히 자신의 무예를 갈고 닦았다.
오성상단이 날로 발전하고 있으니 호위대장에게도 더 높은 실력이 요구됨은 당연한 일.
비록 지금까지는 상단주와의 인연으로 대장 자리를 지키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날고뛰는 고수들과 경쟁을 해야만 할 것이다.
하루빨리 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것.
그것이 이막기의 목표였다.
밤늦게까지 고된 수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최근 어렵게 연마 중인 검법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기에 표정이 밝았다.
윤대호 상단주에게 부탁해서 하수오라도 한 뿌리 얻어먹어야겠다 생각하며 숙소 문을 열었을 때….
쉬이익~
어디선가 날아온 지풍이 이막기의 명문혈(命門穴)을 때렸다.
순간 허리 아래쪽이 마비되었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연이어 날아든 지풍이 아혈(啞穴)마저 막아버렸다.
“악의는 없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잠시만 참아주십시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검은 야행복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르는 두 명… 비록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눈에 익은 체형이었다.
‘저들은 정발산과 소 부인? 도대체 어째서? 설마… 살인 예고를 한 제천대살 패거리인가?’
기습만 당하지 않았다면 최근 연마 중인 검술로 상대할 수 있었을 텐데.
혈도가 막혀 말도 할 수 없는 이막기는 미칠 지경이었다.
“가린. 윤대호와 고 총관을 처리하고 돌아올 테니, 네가 이자를 지키고 있어라.”
이막기의 혈도 몇 군데를 추가로 짚고 굵은 포승줄로 팔다리를 묶은 후, 강한월과 소영영이 떠났다.
누에고치처럼 꽁꽁 묶여 있는 이막기 앞에 진가린이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호위대장님, 너무 걱정 마세요. 사업이 잘될지는 모르지만… 오성상단은 앞으로 더 안전해질 거예요. 제가 장담해요.”
물론 아혈이 막힌 이막기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 *
강한월과 소영영은 내원의 지붕으로 스며들었다.
경비 무사들이 번을 돌고 있었지만 신경 쓸 필요 없는 수준.
고도의 은신술을 펼친 그들은 곧바로 상단주의 침실로 향했다.
쉬이익.
지풍을 맞은 호위무사가 힘없이 쓰러질 때, 바람처럼 나타난 소영영이 몸을 받쳐 조용히 눕혔다.
스르륵 문이 열렸고, 강한월과 소영영이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얕은 코 고는 소리.
역시 윤대호는 혈승이 아니었다.
아무리 조용히 움직였기로서니, 혈승이 이 정도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어떡할까요?”
“일단 깨우자.”
찰싹, 찰싹.
뺨을 두어 차례 두드리자 윤대호가 눈을 떴다.
“앗, 당신은 누구…?”
“쉿! 조용히 하세요. 큰 소리 내면 어찌 되는지 알죠?”
목 밑에 들이댄 비수에 살짝 힘을 주며 소영영이 미소 지었다.
“제, 제천대살이십니까? 제발 살려주십시오.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제발….”
“돈은 됐고요. 책자 하나만 넘기면 조용히 떠날게요. 어딨죠? 그 예언서.”
윤대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예언서라니요? 도무지 무슨 말인지….”
“그게 목숨보다 중하다면 상관없어요. 이 비수를 찔러 넣고 천천히 찾아봐도 되니까. 서재에 비밀 금고 같은 곳에 숨겨져 있겠지만, 그런 걸 찾는 건 우리가 전문이죠.”
비수가 살짝 움직였고, 피가 또르르 흘렀다.
비록 몇 방울에 불과했지만, 윤대호가 죽음을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정말 그것만 드리면 살려주는 겁니까?”
잠시 후.
강한월의 손엔 낡은 책자 하나가 들려졌다.
‘중원상계예언록(中原商界豫言錄)’이라는 어설픈 제목이 붙어있었다.
한 장 한 장 넘0기며 내용을 살폈다.
돈벌이와 관련된 내용들만 골라서 기록한 것이었는데, 강한월이 기억하고 있는 미래의 강호연감과 정확히 일치했다.
회귀자의 작품이 분명했다.
“소영영. 아직 멀었나?”
“휴우, 이제 끝났어요. 역시 윤대호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네요. 전혀 반발이 없어서 쉽게 지울 수 있었어요.”
섭혼의 비술로 윤대호의 십 년 기억을 지워버린 소영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한동안 바보처럼 지내야겠지만, 혈승과 한패가 되어 호사를 누린 대가치고는 양호한 것이리라.
“이제 진짜가 남았네요.”
“그래, 생각보다 순조롭구나.”
“우리 둘이서 될까요? 혹시 제천대살 원숭이 혈승보다 더 고수이면…?”
“그렇지 않기를 바라야지. 아마도 자금을 담당하는 혈승인 것 같으니 무공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을 수 있어. 물론 기대일 뿐이지만.”
“호호, 그럼 빨리 잡으러 가요. 가린이 혼자 심심할 테니.”
강한월과 소영영의 그림자가 다시 천장 위로 스며들었다.
오성상단의 총관으로 위장한 혈승을 잡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