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항주 오성상단 (3)
* * *
“팔다리가 저리실 거예요. 솔직히 대장이 좀 심했어요. 혈도를 그렇게 짚었으면 되었지 뭐 하러 포승줄로 묶기까지….”
심심했던 탓일까?
진가린 혼자 말이 많았다.
이막기는 눈만 껌뻑일 뿐, 당연히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사실 아직 궁금한 게 많아요. 물론 저보다는 아저씨가 더 궁금하겠지만.”
순간 아혈만 잠깐 풀어줄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생각뿐이었다.
이막기가 뭘 알 것 같지도 않았고, 갑자기 소리라도 지르면 큰일이니까.
“헤헤, 아쉽지만 대화를 나눌 순 없겠네요.”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오르는 듯, 이막기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 * *
강한월과 소영영은 지붕을 타고 달렸다.
한 마리 야조처럼 십 장 거리를 날아 고 총관의 전각 위에 착지한 후, 기와를 들어내고 내부로 스며들었다.
윤대호의 침실에 침입할 때와는 다르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상대는 혈승.
두 번의 생을 살며 능력치를 극한으로 끌어올렸을 괴물이니까.
—이 방인 것 같아요.
고 총관은 잠을 자고 있는 듯, 안에서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을 지키는 호위무사는 단 한 명.
—경비는 생각보다 허술한데요?
—방심하지 말고. 절대로 쉬울 리 없어.
전음을 마친 그들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소영영이 바람처럼 쇄도하며 호위무사의 혼혈을 짚었고, 강한월은 방문을 부수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우우웅.
벌이 날갯짓하는 소리가 울리며 강한월의 양손에서 찬연한 금빛 광채가 뿜어졌다.
속전속결.
응축된 금강부동신공의 기운이 손끝에서 쏘아져 나갔고.
그 순간, 겨우 낌새를 챈 고 총관이 눈을 떴다.
하지만 뭘 어쩔 틈도 없이, 이불을 뚫고 들어간 금빛 광채가 가슴의 전중혈을 파고들었다.
“크억!”
강한월의 공격이 이어졌고.
소용돌이치는 회선장력이 고 총관의 백회혈에 꽂히려는 찰나….
강한월이 흠칫하며 손을 멈췄다.
고 총관은 이미 정신을 잃은 것이다.
“대장, 어떻게 된 거죠? 설마… 한 방에 제압한 거예요?”
그럴 리는 없었다.
제아무리 혈교 무공과 상극인 금강부동신공을 썼더라도 혈승이 이렇게 맥없이 쓰러질 리는 없다.
서둘러 몇 군데 혈도를 점혈한 후, 고 총관의 명문혈로 진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깨워서 알아봐야만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 * *
“…그래도 이건 정말 궁금해요. 도대체 혈목버섯의 용도는 뭘까요? 공력을 늘려주는 거겠죠? 그렇다면 나도 좀 구해서 먹어야겠는데… 피처럼 빨간 나무에서 자라서 혈목(血木) 버섯인가?”
“아니, 혈목은 나무 목(木)이 아니라 눈 목(目)이다.”
다리를 꼬고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진가린의 몸이 굳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
혈도를 짚여 말을 할 수 없는 이막기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
“어, 어떻게 아혈을 풀었죠?”
다시 혈도를 누르기 위해 진가린이 벌떡 일어섰다.
“아혈만 풀린 줄 아느냐?”
투두두둑.
이막기의 몸을 묶었던 포승줄이 썩은 동아줄 마냥 잘려 나갔다.
“안 돼!”
진가린이 몸을 날렸다.
손에는 어느새 검이 들려 있었다.
이막기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앞을 막으려는 것인데, 애당초 잘못된 생각이었다.
도망가야 하는 건 그녀였으니까.
타앙~
이막기가 중지를 뻗어 검날을 튕겼다.
파르르르 떨리는 검을 따라 그녀의 손목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검을 안 놓쳐? 제법이구나.”
비릿하게 웃음을 흘린 이막기가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손을 뻗었다.
왼손은 장법, 오른손은 금나수.
순간 진가린의 감각에 경종을 울리는 어지러운 흐름들.
두 가지 무공이 동시에 얽혀들어 흐름은 복잡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빈틈이 보였다.
진가린의 검이 흐름들을 비집고 뻗어 나갔다.
흠칫 놀라 몸을 비트는 이막기.
너무나 교묘한 위치로 파고든 검이기에, 한순간이나마 가슴이 철렁했다.
“너? 어떻게 내 초식을 아는 거지?”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궁금한 것을 알아낼 방법은 따로 있으니까.
이막기의 몸에서 거대한 기세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초식을 알고 있다고? 흐름을 읽는다고?
그런 것은 개나 줘버리라는 듯, 해일처럼 밀려오는 기세.
완전히 압도당한 그녀의 몸이 굳었다.
이런 것이었구나.
초절정 고수 앞에서도 주눅 들면 안 된다고 대장이 말한 것은….
미안해요 대장. 아직 내 실력으론….
타앙!
몸이 굳은 진가린의 뒷목을 이막기의 손날이 강타했다.
“이제 내 궁금증을 풀 시간이다.”
쓰러진 진가린을 어깨에 둘러업은 이막기가 어디론가 향했다.
* * *
순후한 생명력을 담은 금빛 공력이 고 총관의 명문혈로 흘러들었다.
사지가 파르르 떨렸고, 입술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아직 눈을 뜨진 못했다.
“대장, 어떻게 된 걸까요? 설마 혈승이 아닌 거예요? 하지만 분명 비술의 냄새가 나는데….”
“나도 모르겠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강한월의 손끝에 감도는 금빛이 한층 짙어졌다.
그러더니 결국….
쿨럭.
검게 죽은 피 한 덩이를 게워내며 고 총관이 눈을 떴다.
“으… 으으으….”
아직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닌 듯 말은 하지 못했고,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새빨갛게 변한 흰자위.
순간 강한월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꿈속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장면이 고 총관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빨갛게 충혈된 눈을 하고 혈승의 명을 수행하던 종복들.
설마… 이것이었던가?
혈목버섯의 용도가…?
“소영영. 시간이 없다. 가린이가 위험해!”
* * *
어둡고 음습한 지하실.
뒷목에서 얼얼한 통증을 느끼며 진가린이 눈을 떴다.
서늘한 느낌의 돌 침상 위에 눕혀져 있었는데, 혈도를 짚였는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긴 어디죠?”
“아, 깨어났나? 여긴 나만의 비밀공간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이고, 누구도 입구를 찾을 수 없는 곳이지.”
“그, 그런가요? 그런데 왜 저를 여기로…?”
“아까 혈목버섯의 용도가 궁금하다고 했지 않느냐? 그걸 알려주려 데려왔다. 물론 내 궁금증도 풀 겸 말이야.”
이막기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진가린의 팔뚝에 굵은 바늘을 꽂았다.
긴 대롱을 통해 붉은 액체가 담긴 그릇과 연결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게 혈목버섯의 용도다. 영력이 충만한 내 피를 다른 사람의 몸에 주입할 때 쓰는 거지. 혈목버섯의 진액을 섞어주면 피가 굳지 않거든.”
“피를 왜 내 몸에…?”
“왜겠나? 너를 내 혈복(血僕), 즉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서지. 궁금한 게 많으니까. 어떻게 본교의 초식을 배웠는지, 그리고 소 부인의 배후는 누군인지.”
“그럼… 이막기 당신이 혈승?”
혈승이라는 단어를 들었기 때문일까?
횃불에 비친 이막기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 그래, 이 몸이 바로 혈교 십이혈승 중 재물을 담당하는 해(亥) 혈승이시다.”
“그럼 어째서 윤대호와 고 총관 뒤에 숨은 거죠?”
말하는 사이에도 진가린의 몸으로 혈액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이막기가 비릿하게 웃으며 답했다.
“너는 곧 내 혈복이 될 테니 특별히 알려주도록 하지. 내가 회귀자임을 각성하기 전, 나는 그저 그런 항주 뒷골목의 건달이었다.”
이막기가 각성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을 채우는 전생의 기억에 몇 달간 혼란을 겪었지만, 그는 빠르게 계획을 세워나갔다.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고 있으니, 돈 벌 작전을 짜는 것은 쉬웠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다지 흥이 나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 회귀 전의 나는 돈 버는 일이 가장 재밌었거든.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다면 어떤 짓이라도 마다치 않는 나였는데….”
결국 원인을 찾았다.
새롭게 차지한 몸뚱이가 문제였다.
영혼은 혈승의 것으로 교체되었지만, 남아있던 백(魄)과 육체의 체질이 영향을 미쳤던 것.
이막기의 몸은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타고난 무골이었던 것이다.
“난 갑자기 무술 연마에 전념하고 싶어졌다. 회귀 전의 나는 기맥이 약하고 비만이라 절정 이상을 기대할 수 없었지. 그렇기에 돈벌이에 미쳤던 거야. 하지만 지금은… 이 강인한 육체를 봐라!”
이막기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돈벌이가 아니라 무공의 고수가 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엄두도 못 냈던… 초절정을 넘어 절대고수가 되는 꿈.
“그래서… 당신 대신 상단을 운영할 사람을 찾은 거군요.”
“맞다. 내 주변 사람 중 가장 상재에 능한 자를 찾았지. 가장 적합한 게 윤대호였다. 객잔 주방에서 일하다 막 독립할 계획을 세우던 차였지. 능력 있고 성실하고… 내가 가진 미래 정보만 더해준다면 분명 큰돈을 벌 수 있다 확신이 들었다.”
“그럼 고 총관은요?”
“흐흐. 안전장치이지. 윤대호의 능력은 믿지만, 사람을 믿을 수는 없으니까. 안전한 방법은 내 혈액을 주입하는 비술을 펼쳐 혈복으로 만드는 것인데, 윤대호의 피는 나와 상성이 맞지 않았다. 마침 윤대호가 동생처럼 아끼는 고천식이 혈복 비술을 펼치기에 적합했지. 윤대호는 가족이 없는 천애고아라서 그가 죽으면 재산을 고천식이 물려받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허수아비와 꼭두각시… 둘 다 내세웠던 거네요.”
“그렇다. 실로 완벽한 계획이었지. 그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동안, 나는 마음 놓고 무공 수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혈교의 무공은 물론, 돈을 주고 사들인 중원의 절정 무공까지.”
“그… 그렇… 게… 된… 거….”
“좀 어지럽지? 다행히도 네 피는 나와 상성이 맞더구나. 잠깐 눈을 붙였다 일어나면, 넌 내 명에 복종하는 혈복이 돼 있을 거야. 자, 네가 궁금한 건 모두 말해줬으니, 이제 내 궁금증을 풀어야겠지.”
“아… 니… 대장이… 날… 구하러….”
진가린의 눈이 감겼다.
핏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심장을 거쳐 뇌로 전해진 그 힘이 그녀의 심령을 옭아매려 했다.
이렇게 끝인 건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후후. 이제 일각만 지나면 되겠군. 그나저나 윤대호와 고 총관은 죽었으려나? 새로운 허수아비를 구하려면 골치 좀 아프겠는데….’
이막기가 손을 뻗어 진가린의 얼굴에서 변장용 면구를 뜯어냈다.
무척이나 어려 보이는 예쁘장한 얼굴.
여자인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이와 외모는 예상 밖이었다.
‘쳇, 너무 어리군. 고 총관을 대신할 꼭두각시로는 쓸 수는 없겠어.’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
어딜 가서 새로운 허수아비를 구한다는 말인가?
윤대호와 고 총관 명의로 된 재산은 무슨 구실로 넘겨받고?
장수상단.
아마도 혈교의 형제가 관여된 곳일 테지만, 모든 걸 눈감아줄 생각은 없었다.
소 부인과 그 사내는 물론이고.
정발산 이 여인도 자신의 사업을 방해한 책임을 져야한다.
‘그래, 어차피 꼭두각시로 써먹을 수 없다면….’
이막기의 눈이 잔인한 열망으로 번들거렸다.
회귀 전의 그가 돈벌이 못지않게 즐겼던 것은 피의 향연.
상단의 호위대장 행세를 하느라 참고 참아왔던 살육의 본능이 미친 듯 끓어올랐다.
작은 비수를 손에 든 그는 진가린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사아악.
허벅지 위에서 비수가 움직였다.
한 뼘 길이로 잘린 무복 위로 서서히 번져 나오는 피.
이막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엔 반대쪽 허벅지를 스윽 스윽 두 번 그었다.
순식간에 피가 번지며 하의가 빨갛게 물들었다.
비릿하게 퍼지는 혈향이 무척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어떤 맛일까?
손가락으로 상처를 한번 훑은 후 입안으로 가져갔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조금은 아쉬웠다.
만약 두려움과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이막기의 눈길이 진가린의 손으로 향했다.
가지런한 열 개의 손가락을 보니 한두 개쯤은 없어도 될 것 같았다.
어느 것을 먼저 자를까?
왼손, 아니면 오른손…?
손가락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꽤나 섬세하게 빚어진 하얀 얼굴.
그래, 이게 더 재미있겠어.
이막기가 다시 비수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