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항주 오성상단 (4)
* * *
진가린의 얼굴 위에서 비수가 춤을 췄다.
닿을 듯 말 듯 스치고 지나가는 칼날.
어디가 좋을까?
눈? 아니면 코를 벨까?
이막기가 막 손에 힘을 주려 할 때….
쇄애액~
지하실 밖에서 무언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이미 문 앞까지 도달했고.
그 기세 그대로 두꺼운 철문을 가격했다.
퍼어엉!
구겨진 철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두 사람.
얼마나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소영영의 머리는 헝클어졌고 강한월마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너희일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를 어떻게 찾았지? 상단주와 총관도 여기는 모르는데?”
“우리가 대책도 없이 대원을 침투시켰을 줄 알았소? 그녀의 몸에는 한 달간 효과를 내는 추종향이 발라져 있었소.”
“추종향? 어쨌거나 잘됐군. 이 몸이 너희를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었으니.”
이막기는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복면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굳은 쪽은 강한월과 소영영이었다.
지하실을 감도는 피 냄새.
차가운 침상 위에 죽은 듯 누워있는 진가린.
지금도 이막기의 비수가 그녀의 얼굴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대장… 가린이가….”
심장 뛰는 소리가 또렷이 들리니 생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신경 쓰이는 것은 진가린의 팔에 연결된 대롱.
분명 어떤 비술에 당한 것 같은데….
“이막기.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복면을 쓴 주제에 궁금한 것이 많군. 왠지 너희는 알 것 같은데? 이게 무슨 비술인지….”
“혈복?”
이막기는 비릿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확실하다.
혈복 비술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들은 분명 또 다른 혈승의 수하.
“너희 주인은 누구냐? 말? 아니면 혹시 뱀? 누구 밑에서 일하든 간에, 감히 나에게 대적해? 내가 너희 주인과 동급임을 모르는 것이냐!”
쏴아아.
강렬한 기파가 이막기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지하실 안의 집기들이 들썩거렸고, 절정의 고수인 소영영마저 한걸음 뒤로 밀려났다.
샤아악.
강한월이 검을 휘둘러 밀려오는 파장을 갈랐다.
복면 틈으로 보이는 미간이 깊어졌다.
기세만 봐도 느낄 수 있었다.
이막기가 제천대살보다 더 고수라는 것을.
—내가 이자를 상대하는 동안 가린이를 구해!
소영영에게 짧은 전음을 보낸 후 강한월이 전면으로 쇄도했다.
우우웅 소리와 함께 검에 금빛 광채가 어렸다.
채앵, 챙.
손에 쥔 비수로 강한월의 검을 막는 이막기의 눈이 번뜩였다.
이거 생각보다 더한 고수가 아닌가!
피 맛도 보고 마음껏 무공도 펼칠 수 있다니… 오늘은 매우 특별한 날이 분명했다.
“하하하, 제법 손맛이 좋구나. 좀 더 힘을 써봐라. 아까의 무례는 용서해줄 테니.”
흥이 오른 이막기가 비수를 던져버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최근 연마 중인 절기를 펼쳤다.
쏴아악~
좁은 지하실을 가득 채우는 예리한 검기.
강한월의 모습은 풍랑 속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파랑삼십육검(波浪三十六劍)? 해남파의 진산 제자 중 선택된 소수만 익힐 수 있는 검법을 당신이 어떻게…?”
어지럽게 발을 움직여 밀려드는 검을 피하며 강한월이 물었다.
“하하하, 이 세상에 돈으로 사지 못할 것은 없다.”
해일 같은, 풍랑 같은, 용오름 같은….
바다의 기세를 담은 해남파의 절기가 연거푸 펼쳐지자, 강한월은 한 발 한 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건 밀리는 게 아니야.’
숨죽이고 대결을 지켜보던 소영영은 강한월이 일부러 물러서고 있음을 알았다.
이막기와 진가린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지금이다.’
강한월을 잡으러 이막기가 몸을 띄운 순간, 소영영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한 그녀가 진가린에게 손을 뻗는 순간.
쉭 쉭 쉭 쉭.
진가린이 누워있는 침상에서 수백 개의 강침들이 발사됐다.
탕 탕 탕….
소영영이 급히 비수를 휘둘러 강침을 쳐냈지만,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왼쪽 어깨와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며 주저앉은 그녀.
“소영영!”
깜짝 놀란 강한월이 그녀에게 뛰어가려 했으나, 이막기의 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흥, 네놈이 일부러 뒤로 물러서는 걸 모를 줄 알았나? 침상에 기관장치가 되어 있어 속아주는 척한 거다. 하하하, 바보 같은 것.”
“이막기… 당신….”
“왜? 저 여인이 네 애인이라도 되느냐? 걱정할 것 없어. 강침에 발려진 것은 강력한 마비독일 뿐이니까. 물론 오래 방치하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흐흐흐.”
이막기의 말이 맞았다.
진가린도, 소영영도 시간이 없었다.
상대는 원숙한 초절정의 고수였지만, 어떻게든 빨리 제압해야 했다.
휴우.
한숨을 내쉰 강한월이 복면을 벗어 던졌다.
“그 무공… 돈을 주고 샀다고 했소?”
“왜? 부럽나? 너 같은 놈은 꿈도 꿀 수 없지. 무려 삼백만 냥을 줬으니까.”
“돈을 낭비했군. 차라리 혈교의 무공에 집중했으면 나았을 걸.”
뭐라고?
이막기의 기세가 분노로 출렁거렸다.
분노의 양만큼 쭈욱 뻗어 나오는 검기.
강한월의 의도대로 이막기는 흥분했다.
‘열 수 안에 끝낸다.’
강한월의 흰자위에 금빛이 감돌았고, 눈동자는 검게 침잠되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불공과 마공을 동시에 끌어올린 모습.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몹시 불안했지만, 대원들을 구하기 위해선 모험을 해야 했다.
터어엉!
이막기와 강한월의 검이 격돌했다.
크으윽.
가슴 속의 진기가 격탕되어 이막기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단 한 번 검을 부딪친 것이지만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저 녀석… 강하다.
“너. 설마 불가의 기운과 마기를 동시에…?”
대답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강한월이 먼저 공격을 감행했다.
금빛을 흩뿌리며 내뻗는 검 옆으로, 검은 아지랑이가 물결치는 회선장력이 뿌려졌다.
이막기는 감히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끝까지 따라잡아 옆구리 옷자락을 갈가리 찢어 놓는 회선장력.
치잇.
공력이 급증한 데다가 끈적끈적 달라붙는 마기까지….
불현듯 회기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검은 마기를 풀풀 풍기며 악다구니처럼 달려들던 마인들.
도대체 이 녀석은 정체가 뭔가?
이렇게 당할 순 없다.
이막기도 숨겨놓았던 챠크라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수슘나 맥을 타고 기운이 뻗어가자 왼손이 부풀어 오르며 붉게 빛났다.
밀종혈수인으로 회선장력을 밀어내며 반격을 가했다.
터엉~ 촤아악~
검과 장력이 어지럽게 난무하며 공방이 이루어졌다.
얼핏 균형이 맞는 듯 보였지만 실은 강한월이 의도한 상황.
해남파의 검과 혈교의 무공은 전혀 상승작용을 일으키지 못했고.
더구나 챠크라에 기반한 혈수인이라면 파괴할 비책이 있다.
회선장력을 연거푸 날려 이막기의 검을 밀어낸 후 강한월이 검을 뻗었다.
파르르르.
범음청량의 파장을 내포한 금빛 검이 밀종혈수인의 장심을 꿰뚫었다.
“커어억.”
이막기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이제 끝났소. 목숨을 해칠 생각은 없으니 항복하시오.”
손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이막기를 향해 강한월이 말했다.
담담한 표정과 목소리였지만, 실은 엄청난 고통을 참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지금….
몸속에서 금강부동신공과 마기가 충돌하여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극의 기운이 일으키는 폭기를 금검(金劍)의 기운으로 다스려야 했지만,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
“끝… 끝이라고?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기괴한 표정의 이막기가 품속에서 빨간 자기병을 꺼냈다.
“너… 혈복에 대해 아는 것을 보면 분명 혈독(血毒)에 대해서도 알겠지? 한 발짝만 움직이면 이 혈독을 뿌리겠다!”
“이막기. 그만하시오. 혈독이 아무리 강력해도 나는 한동안 버틸 수 있소.”
“넌 그렇겠지. 하지만 저 여인들은? 아마 한순간도 버티지 못할걸?”
이막기가 자기병을 들고 쓰러진 소영영을 가리켰다.
틀린 말이 아니다.
온몸이 마비된 소영영은 운기로 독을 막을 수 없었고, 진가린도 아직 눈을 뜨지 못하는 상황.
일이 이렇게 되다니….
강한월은 심한 자책감으로 몸을 떨었다.
탄지신통을 쏜 후 몸을 날려 병을 낚아채는 방법을 고민해봤지만, 지금의 몸 상태로는 가능할 리가 없었다.
“어서 검을 버리고 스스로 혈도를 봉하지 못할까!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다!”
방법이 없는 건가?
강한월이 검을 던졌다.
챙그랑.
그리고 그 순간….
진가린이 일어섰다.
“하하하, 마침 혈복 비술이 완성됐군! 너, 어서 저 녀석을 제압해라.”
그의 목소리엔 복종할 수밖에 없는 비술의 힘이 담겨 있었다.
멍한 표정의 진가린이 침상에서 내려오더니, 소영영이 떨궈 놓은 비수를 집어 들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
혈복으로 변한 그녀의 모습이 충격이 된 걸까?
억지로 버티던 강한월이 참지 못하고 울컥 피를 토했다.
극심한 내상의 증거.
더 이상 이막기를 속일 수 없었다.
“이제 보니 너? 그랬던 거군. 혈신께서 나를 도우시는구나! 어서 빨리 저자를… 엇?”
막 이막기 곁을 스쳐 지나던 진가린이 용수철처럼 몸을 튕겼다.
한 손으로 자기병을 움켜쥐었고, 다른 손의 비수로 이막기의 복부를 찔렀다.
“아악!”
이막기의 몸은 챠크라의 기운으로 보호되고 있었지만, 비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을 파고들었다.
그 비수는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귀면비(鬼面匕)였으니까.
“너… 혈복이 어째서 주인인 나를…?”
이럴 수는 없는데.
자신의 피를 매개로 한 혈복 비술이 실패할 리가 없는데.
진기가 흩어지는 고통 속에서 이막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흥, 혈복은 무슨 혈복! 어디서 냄새나는 피를 내 몸에 주입해?”
퍼억.
진가린이 힘껏 휘두른 주먹이 이막기의 턱에 작렬했다.
쿠웅.
결국 두 번째 혈승이 쓰러졌다.
왼손이 꿰뚫리고 복부에 비수가 박힌 채로.
* * *
남은 기력을 짜내 이막기에게 금제를 가한 강한월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둘러 요상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후유증이 남을 테니까.
대장마저 꼼작 않고 운기에 들어가자, 진가린 혼자 바빠졌다.
이막기의 배에 꽂힌 귀면비를 회수하고 급하게 지혈을 했다.
칫, 이런 악당을 살려 놓아야 한다니.
이어서 소영영의 상태를 살폈다.
박혀 있는 강침들을 빼내고 명문혈로 진기를 불어넣었다.
“으으음….”
소영영이 정신을 차리는 것 같자, 이번에는 굳어 있던 팔다리를 주물렀다.
얼마나 주물렀을까?
얼굴에 혈색이 돌고, 뻣뻣했던 근육도 부드러워졌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고.
안심과 동시에 통증이 느껴졌다.
찌르르한 뒷목.
그리고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허벅지.
‘이거 며칠 목욕도 못 하겠는데….’
그나마 얼굴은 상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랄까.
역시 대장이 때맞춰 구하러 와줘서….
“진가린.”
헤헤, 대장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좀 어때요, 대장?”
“난 이제 괜찮다. 그보다….”
“어떻게 혈복으로 변하지 않았냐고요?”
“…그래.”
“모르겠어요. 비술이 엉터리였나 보죠 뭐. 처음엔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정신이 멍해졌는데… 어느 순간 다시 잠잠해지더라고요. 마치 제 몸속의 기운이 이막기의 힘을 눌러버린 것처럼….”
혈교에 단 열둘 밖에 없는 혈승의 비술이 그렇게 맥없이 실패했다고?
더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그만큼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왜요? 뭐 문제 있어요?”
“아, 아니다. 다행이구나. 그리고… 미안하다.”
“헤헤, 뭐가 미안해요? 제 실력이 모자라서 잡혔던 건데. 게다가 고 총관이 혈승일 거라고 주장한 것도 저였고.”
일부러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실은 강한월보다 더 큰 의문에 휩싸인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도대체 내 몸속에 뭐가 있는 걸까?
혈교의 비술보다 더한 괴물이 혹시 내 속에…?
다행히 그 순간 소영영이 입을 열어, 진가린의 우울한 상념을 깼다.
“대장. 나한테도 미안해해야죠. 제일 많이 다친 건 저잖아요!”
“그래, 소영영. 너한테도 미안하다.”
“호호, 용서해드리죠.”
여명 직전.
가장 어두운 시간.
내상과 자상과 중독의 부상을 안고, 그들은 은밀히 오성상단을 떠났다.
이막기를 둘러업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