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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5화 (15/210)

015화. 사나이 곽철 (1)

* * *

사방이 막혀있는 짐마차에 탄 강한월 일행은 서둘러 항주를 떠났다.

이막기는 정신을 차린 이후에도 일절 말이 없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베였던 손은 시간이 지나면 아물 테지만,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마음의 상실감은 회복되기 힘들 터였다.

항주를 벗어나 하루를 쉬지 않고 달린 뒤, 인적이 드문 객잔을 찾았다.

그동안 미뤄왔던 잔혼반 검사를 시행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이막기. 지금이라도 자신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면 비술을 펼쳐 확인하는 것은 생략하도록 하겠소.”

“난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네.”

이막기는 형식적인 대답을 반복했다.

그렇다고 강하게 저항하거나 욕설을 퍼붓지도 않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죽어 있었다.

시약을 먹인 후 소영영이 비술을 발동하는 주문을 외웠다.

강한월이 손을 뻗어 이막기의 앞섶을 열었고, 모두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엽전 크기만 한 보라색 반점이 나타나 밝게 빛났다.

진가린이 지하실의 혈승에게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미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특별히 놀랍지는 않았다.

사실 놀란 것은 이막기.

이제야 이 비술이 무얼 확인하기 위한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의 표정에 절망감이 더해졌고, 강한월은 지체 없이 손가락에 공력을 실었다.

잠시 봉쇄해 두었던 챠크라의 기운과 서장 밀교의 내공을 완전히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가린아, 왜 그래? 어디 아파?”

멍하니 이막기를 지켜보는 진가린을 향해 소영영이 물었다.

“네? 아, 아뇨. 아픈 데 없는데요.”

“그럼 다행이고. 아까부터 명치 부근을 쓰다듬고 있기에 혹시 배가 아픈가 했지.”

‘아, 내가 또 여기를 만지고 있었구나.’

무의식적으로 명치에 가 있던 손을 내리며 진가린이 쑥스럽게 웃었다.

다행히 소영영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강한월이 할 일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혈을 짚어 공력을 흩어버리는 것은 꽤나 심력을 소모하는 일인 듯 안색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영영, 가린. 수고 많았다. 오늘부터는 좀 편하게 쉬도록 해.”

이로써 두 번째 혈승을 체포하고 무력화시키는 임무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남은 일은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원본을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이곳에서 멀지 않은 도시에 들러 고서점을 뒤지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원본인지 모르고 헐값에 팔 서점 주인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문무대의 실적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

몰래 금자라도 좀 놔두고 와야겠다고 강한월은 생각했다.

* * *

한편, 강한월 일행이 오성상단을 상대하고 있던 그 시각.

광군영 일행 또한 서안에서 작전에 돌입했다.

번화가 뒷골목의 적당한 객잔에서 묵으며 귀도방(鬼刀幫)과 곽철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는데,

서안의 밤을 지배하는 귀도방은 의외로 평이 좋았다.

세상에서 흑도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면 몰라도, 그럴 수 없다면 그나마 귀도방.

이것이 곽철이 지배하는 귀도방에 대한 서안 사람들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정의의 협객처럼 쳐들어가서 귀도방을 박살 내고 곽철을 납치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입장에선 세간의 이런 평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서 호박씨를 까고 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은 제법 호기로운 사나이 같아요. 귀도방을 때려 부수고 곽철을 잡아간다는 게 조금 꺼림칙한데요.”

모아 놓은 정보지를 다시 한번 훑으며 제갈윤이 말했다.

“게다가 귀도방 사내들이 제법 의리도 있는 것 같아요. 실력은 고만고만하지만,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자들이라고 하니 정면으로 붙으면 피를 많이 봐야 할 수도 있겠어요. 지들 방주 지키겠다고 목숨 걸고 덤빌 수도 있으니.”

묵묵히 듣고 있던 광군영이 의견을 말했다.

“곽철은 싸움을 즐기는 사내라고 들었다. 약속은 지키는 성격 같고. 그냥 찾아가서 일 대 일의 대결을 청하면 어떨까?”

“그게 제일 편하긴 한데… 과연 대결을 받아들일까요? 그래도 명색이 한 방파의 수장인데….”

“만약 머뭇거리면 부하들 몇 놈 패주면 되겠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싸움에서 지면 순순히 우릴 따라올까요?”

“진 자가 무슨 할 말이 있어. 졌으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단순 무식한 의견이었지만… 흑도의 사내를 잡는 데는 외려 단순한 계획이 맞을 것도 같았다.

“좋아요. 오늘 밤에 당장 가보는 것으로 합시다.”

* * *

해는 진작에 서산으로 넘어갔고 밤하늘에는 달이 떴다.

밤을 낮 삼은 흑도들에게는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

검은색 무복으로 차려 입은 광군영 일행이 서안 외곽에 위치한 흑도방에 도착했다.

대문 앞에 큰 화롯불을 피워 놓고 노닥거리고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일행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캬악, 퉤. 뭐요?”

대단히 짧고 간결한 말이었지만 그래도 의미는 확실했다.

이런 류의 인사법에 익숙지 않은 제갈윤을 대신해 광군영이 나섰고, 바닥에 침을 뱉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퉤. 여기 오면 제대로 한판 뜰 수 있다고 해서 왔다.”

광군영의 당당한 체구에 주눅이 들 법도 하건만, 사내는 눈알에 힘을 주며 물었다.

“누구랑?”

“곽철이랑.”

“보아하니 주먹은 좀 쓸 것 같군. 따라오쇼.”

사내를 따라 내부로 들어가니 여기저기 거친 사내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니 곽철의 거처가 나왔다.

마치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방주전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화롯불 여러 개가 대낮같이 불을 밝힌 대전 앞마당에는 귀도방의 수뇌부로 보이는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눈빛이 형형한 것이 제법 실력이 있어 보였다.

수뇌부 중 한 명이 ‘뭐야?’라는 짧고도 명쾌한 질문을 던졌고, 안내한 사내가 싸움꾼이 도전하러 왔다고 답했다.

그사이 광군영의 시선은 대전 앞 계단에 앉아 커다란 고깃덩이를 뜯고 있는 사내에 꽂혀있었다.

서른 즈음.

눈썹 옆으로 칼에 베인 흉터.

보통보다 조금 더 큰 키에 늘씬한 체형.

온몸에서 투지가 끓어오르는 사내.

그 사내가 고깃덩이를 든 채로 물었다.

“도전자는 누군가? 너희 셋 모두인가?”

“아니, 도전자는 나 하나다.”

대답하는 광군영을 노려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꾼의 몸이군. 좋아, 우선 통성명이나 하지. 난 곽철이라고 한다.”

“난 광객.”

“광객? 멋진 이름이군. 빛 광(光)인가? 아니면 미칠 광(狂)? 뭐든 좋은 이름이야. 한번 붙어보자고. 요즘 도전자가 없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니.”

당장 시작하자는 듯 곽철이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수하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방주. 이러시면 안 되지요. 방주에게 도전하려면 우선 우리들을 이겨야 한다는 규칙을 잊으신 겁니까?”

“맞소. 찬물도 위아래가 있고 똥물에도 파도가 있는 법. 방주 혼자 재미를 보려고 하면 안 되지요.”

몸이 근질거리기는 마찬가지였던지, 제법 강해 보이는 자들이 너도나도 나섰다.

“닥쳐! 니들은 쌈질을 그렇게 하고도 아직 보는 눈이 없는 거냐? 탁 보면 모르겠어?”

“잘 아니까 드리는 말씀 아니요? 저런 근육은 보기만 그럴싸하지 실전에선 쓸모가 없다니까요. 운동하는 근육과 싸우는 근육은 엄연히 다른….”

“에라이! 니 눈에는 저게 겉멋으로 만든 몸으로 보이냐? 귀도방 이름에 똥칠하지 말고 구경이나 해!”

곽철이 손에 쥐고 있던 고깃덩이를 집어 던지자 비로소 수하들이 잠잠해졌다.

“곽 방주. 먼저 정해야 할 것이 있지 않겠소? 우리 광객은 맨입으로 싸우는 어설픈 싸움꾼이 아니오!”

싸움이 시작되려 하자 제갈윤이 재빨리 외쳤다.

조건은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거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뭔 데? 돈? 아님 귀도방 방주 자리를 원하나?”

“만약 당신이 지면 우리의 포로가 되는 것으로 합시다. 짧으면 한 두어 달… 하지만 길어질 수도 있고.”

“포로? 좋다. 그깟 게 뭐가 문제라고. 대신 내가 이기면 너희 둘 다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거다.”

대청 앞마당의 가운데를 비무장으로 비워 두고 귀도방의 사내들이 둥글게 둘러앉았다.

빙 둘러앉은 사내들 중앙에 광군영과 곽철이 마주 보고 섰다.

광군영의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곽철은 제법 신이 난 것 같았다.

“광객. 뭘로 싸울 텐가? 무기를 쓸 텐가 아니면 맨주먹?”

“뭐든 상관없네.”

“그래? 그럼 주먹으로 하지. 그래야 착착 감기는 맛이 있거든.”

곽철의 말을 들으며 광군영은 생각했다.

맨몸으로 싸운다… 천축의 무술을 쓰겠다는 것인가? 체술로 가장 명성이 높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천축의 유가술(瑜伽術)이니까….

흐읍.

호흡을 가다듬은 곽철이 오른손을 짧게 끊어치며 쇄도했다.

광군영은 허리를 회전시켜 피했고, 그 순간 곽철의 왼손이 하복부를 찔러왔다.

무릎을 들어 올려 방어를 한 광군영은 발을 뻗어 상대의 하체를 쓸어갔다.

용수철이 튕기듯 뒤로 몸을 빼는 곽철.

간을 보기 위한 짧은 공방이었다.

곽철의 몸놀림은 야수의 그것처럼 빠르고 탄력 있었으나 아직 천축 유가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광군영 또한 당연히 천마신교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몸이 덜 풀렸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어깨를 몇 차례 돌린 곽철이 다시 쇄도했다.

짧은 보법으로 땅을 디디며 달려들더니 갑자기 오른쪽으로 휙 돌며 광군영의 배후를 노렸다.

뒤를 잡히지 않겠다는 듯 광군영이 회전하며 일권을 날리자 곽철이 오른손을 펴서 주먹을 쳐냈다.

퍼엉!

처음으로 광군영과 곽철의 몸이 맞닿았고 압축된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꽤나 강력한 충돌이었으나 부드럽게 단련된 관절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나쁘지 않군.

몸풀기는 이만하면 됐다 생각한 광군영이 슬슬 공력을 끌어올리려 할 때, 곽철의 움직임이 먼저 변하기 시작했다.

미묘한 변화였으나 광군영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잔근육들이 꿈틀거리며 관절의 유격이 늘어나고 있었다.

유가술을 쓰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내공도 곁들어질 터, 광군영도 두 주먹에 공력을 실었다.

마기(魔氣)가 드러나지 않도록 극히 일부의 공력만 사용했지만, 그럼에도 주변의 기류가 요동치고 파공성이 매섭게 울렸다.

날아드는 광군영의 주먹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을 텐데, 곽철은 주저 없이 주먹을 마주 질렀다.

주먹과 주먹이 충돌하려는 순간, 곽철의 손목 관절이 기이하게 꺾이더니 미꾸라지처럼 매끄럽게 광군영의 팔을 휘감았다.

광군영 입장에선 몹시 당황스런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갑자기 펴진 손가락이 두 눈을 파고들지 않는가?

섬찟함을 느끼며 재빨리 오른발을 굴렀다.

천마신교의 삼대 절기 중 하나인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를 마기를 배제한 채 펼쳐낸 것이다.

강렬한 진기가 발바닥을 타고 침투하자 곽철은 펄쩍 뛰어 물러났다.

“광객, 역시 만만치 않군. 보아하니 본 실력의 반도 드러내지 않은 것 같은데, 아직 간 보기가 필요한가?”

“피차 매한가지 아닌가? 방주도 겨우 그 실력으로 흑도의 떠오르는 별이라 불렸을 것 같진 않은데….”

“흑도의 떠오르는 별? 누가? 내가?”

“밖에선 그리들 부르던데.”

“우하하하. 나는 왜 몰랐지? 그 이름 마음에 드는군. 좋은 걸 알려준 보답으로 제대로 상대해주겠네.”

곽철이 꽤나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날렸다.

짧은 보폭으로 발을 놀리던 좀 전의 모습과 달리, 발바닥에 기름칠을 하고 미끄러지는 듯한 신기한 몸놀림이었다.

기이한 자세로 쑥 들어오며 내뻗는 손은 마치 관절이 없는 것처럼 예측 불가하게 꺾였고, 중원의 내공과는 전혀 다른 생소한 파장을 내뿜었다.

이것이 천축 수행자들이 몸 안에 쌓는다는 챠크라구나!

곽철이 회귀한 혈승일 확률이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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