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비 내리는 밤
* * *
한 번도 자세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던 곽철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뭘 확인하는 건데? 혹시 내가 전설의 구양지체나 무극지체 뭐 그런 체질인지 확인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소영영과 곽철이 지하실 중앙에 마주 앉았다.
위청보가 미리 시약을 가져다 먹였던 터라 비술은 곧바로 시작될 수 있었다.
곽철은 미동도 없이 정자세로 앉았지만,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소영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두 자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 그녀의 부드러운 숨결이 와닿는 것 같았기에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흑신성 곽철 씨. 제 눈을 똑바로 보세요.”
한쪽 눈을 찡긋해준 소영영이 평소보다 느리고 나긋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곽철은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빠져들었고, 제발 이 시간이 오래 지속되길 바랬다.
“이제 웃옷을 벗고 가슴을 보여주세요.”
“소… 소저… 남녀가 유별한데 여기서 어떻게 옷을….”
“호호호, 괜찮아요. 아까 볼 거 다 봤는데요 뭐.”
소영영이 잽싸게 손을 뻗어 곽철의 옷자락을 열었다.
촤악~
모두의 예상대로 잔혼반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하는 사람은 없었고, 곽철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그저 재밌을 뿐이었다.
“좋아. 확인되었으니 흑신성은 가셔도 좋소. 위청보 네가 밖에까지 모셔다드려라.”
말을 마친 강한월이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려고 할 때, 곽철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좀 끼워주면 안 되겠소? 나도 한사람 몫은 충분히 하는 사내요!”
뭐야 이 사람?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곽철을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작정 합류하겠다니…?
하지만 이어지는 강한월의 답변은 더 의외였다.
“한몫은 한다라… 챠크라는 어디까지 수련했소?”
“십이변 연화형의 아나하타 챠크라를 연마 중이오.”
“쿤달리니의 자각은?”
“아직 수슴나 관을 타통하지는 못했는데….”
잘하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는데?
대원들에게 챠크라에 대항하는 수련을 시키려는 시점에 곽철이 나타난 것이 공교로웠다.
곽철의 눈빛도 마음에 들었고.
“정식 대원은 될 수 없는데 상관없겠소?”
“그런 건 마음대로 하시오.”
“좋아. 흑신성 곽철. 문무대의 비공식 대원으로 합류한 것을 환영한다.”
* * *
밝은 달이 뜨고 이름 모를 새 소리가 들리니 나름 정취가 그윽한 초저녁.
곽철은 빗자루를 들고 앞마당을 쓸었다.
비록 청소 담당이 되었지만, 휘파람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정파와 마교에 흑도인 자신까지 뒤죽박죽 섞여서 어울리는 분위기가 좋았고, 보면 볼수록 소영영이 마음에 들었다.
성숙한 미모와 천진난만한 영혼의 조화가 내뿜는 저항할 수 없는 마성의 매력.
한창 흥겹게 마당을 쓸던 곽철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삿갓을 눌러쓴 풍채 좋은 노인이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었다.
“잠깐 정지! 여기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좋은 말 할 때 그냥 가쇼.”
긴 빗자루를 창처럼 손에 쥔 곽철이 매섭게 입을 열었다.
“자네는 누군가? 새로 들어온 일꾼인가?”
“일꾼? 진짜 이 흑신성을 뭘로 보고. 그러는 노인장은 뉘셔?”
“일단 들어가세. 안에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아니, 이 영감이 가는 귀가 먹었나? 여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니까!”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은 노인이 바람처럼 움직이며 곽철의 옆을 스쳐 지나갔고, 놀란 곽철은 오른손을 쭉 뻗어서 노인의 장포를 낚아채려 했다.
휘이익~
우당탕쿵탕.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유가술을 써서 옷자락을 붙잡은 것 같았는데, 갑자기 몸이 붕 뜨더니 마당 끝까지 날아가 땅에 처박힌 것이다.
달이 밝은 밤이었으니 별들이 보여선 안 되는 것인데, 곽철의 머릿속에서 별이 빙빙 돌았다.
우당탕 소리가 안에까지 들렸는지, 건물 문이 열리며 강한월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 사백님 오셨습니까?”
* * *
사마염은 강한월의 방에서 술잔을 들었다.
“지금까지는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두 번째 회귀자를 내 눈으로 직접 봤으니 앞으론 네 말을 믿기로 했다.”
강한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사마염의 신뢰를 얻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었으니 앞으로 거쳐야 할 일들이 태산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남은 열 명은 훨씬 더 강하고 위험한 자들일 것 같아 걱정이 되는구나. 어떠냐? 아직도 무림 맹주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없는 것이냐?”
“맹주님이 자진하여 잔혼반 비술을 받으신다면 몰라도… 그전에는 비밀로 하는 것이 맞겠지요. 맹주 본인도 의심스러운 대상이니까요.”
“어렵구나. 당당한 정파의 맹주에게 천마신교의 아이가 펼치는 비술을 요청할 수는 없는 일… 한동안은 우리 힘으로 문무대를 꾸려갈 수밖에 없겠구나.”
사마염도 그리고 강한월도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안주에는 거의 손도 안 대고 주거니 받거니 술만 마시기를 한참.
첫 번째 술병이 비워졌을 때 사마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네 사부 소식은 없는 것이냐? 고검 사제만 전면에 나서주면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할 텐데….”
“아직 연락이 없으십니다. 하지만 강한 분이니 조만간 병을 이겨내고 도와주러 오시리라 믿습니다.”
강한월의 사부 신주의협 고검은 현재 행방이 묘연했다.
미래의 무림맹이 과거로 전송한 의식이 상단전으로 파고들 때 심각한 주화입마에 빠진 그는 치료법을 찾기 위해 홀로 세상을 헤매고 있는 중.
“그래, 고 사제가 주화입마 따위를 이겨내지 못할 리가 없지. 어쨌거나 당장은 너와 나 둘이서 문무대를 이끌어갈 수밖에 없구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역시나 무언가 할 말이 있으셨던 거구나.
강한월은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사마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림맹 예산이 삭감될 조짐이 보이니 미리미리 후원자를 알아봐야만 하는데, 마침 적당한 곳이 나타났다.”
“재정 후원자요? 어딥니까?”
“천하전장. 현금 동원력으론 천하제일인 데다, 네 사부와는 전부터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지.”
확실히 천하전장이라면 후원자로 모자람이 없었다.
“천하전장 원 장주가 며칠 전 나를 찾아왔다. 원진탁이라는 손자가 하나 있는데 그 녀석이 전장 물려받을 생각은 없고 오로지 무림에 뜻을 두고 있다는구나. 몇 번을 말리고 설득해봤지만, 말을 듣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명사들을 초빙하여 무공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사마염은 말을 빙빙 돌리며 어렵게 꺼내고 있었지만 강한월은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짐작대로라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닌 것이다.
“손자의 무공을 봐 달라는 것인가요?”
“하하하, 역시 한월이 너와는 이야기가 편하다니까. 천하제일 고수라는 네 사부와 연이 닿아 있으니 손주를 위해 그 인맥을 쓰고 싶은 거지. 네 사부는 폐관수련 중이라 둘러댔더니, 대신 너한테 몇 수 지도를 받게 하고 싶다는구나.”
“알겠습니다. 후원을 해주신다면, 그 정도는 당연히 도움을 드려야죠.”
“네가 시간을 길게 낼 수는 없을 테고… 보름 정도면 어떠냐?”
“보름이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상황을 봐서 좀 더 늘려도 좋고요. 언제 시작하면 됩니까?”
“며칠 안에 원진탁이 낙양에 도착할 거야. 내일 맹에 들러 원진탁에 대한 정보를 받아가거라. 어떤 녀석인지 미리 알아 두면 도움이 될 테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사마염은 문무대를 떠났다.
사마염을 보낸 후 강한월은 홀로 술잔을 들었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빗방울이 금세 굵어졌다.
그는 비를 좋아했다.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며 마시는 술은 끝없이 그를 괴롭히는 상념들을 잊게 해주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헤헤, 대장 역시 아직 안 주무셨네요.”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들이민 것은 진가린이었다.
“왜? 너도 술 한잔하려고?”
“비가 와서 술 생각이 난 것은 맞는데요… 제가 마실 게 아니고 간만에 지하실 혈승들에게 술 한 병씩 주면 어떨까 해서요.”
강한월은 말없이 술 두 병을 내주었다.
술도 얻고 겸사겸사 허락까지 얻은 그녀는 홀로 지하실로 향했다.
* * *
침상에 누워있던 원숭이 혈승은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오자 번쩍 눈을 떴다.
‘흐흐흐, 드디어 오는 거냐?’
음산한 미소를 지은 혈승이 재빨리 침상 밑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왼손 검지 끝을 긋자 새빨간 피가 배어 나왔다.
얼른 술병을 열어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다시 뚜껑을 덮는 순간, 진가린이 지하실에 들어왔다.
“신입. 오랜만이구나. 맑은 피 냄새가 나길래 네가 오는 줄 알았지.”
“그래요? 별일이네요. 요즘 수련하느라 박박 굴러서 내 피에선 땀 냄새가 날 텐데….”
“하하하, 그럴 리가. 땀 따위가 네 맑고 순수함을 오염시킬 수는 없지.”
“됐고요…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주면 술 한 병 줄게요.”
“드디어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생긴 것이냐? 당연히 답변을 해주고 말고. 난 항상 진실만을 말해왔으니까.”
“음… 그러니까 회귀자가 각성을 하기 전에 말이죠… 자신도 모르는 힘이 몸 안에 잠재되어 있을 수 있는 건가요?”
실실거리며 웃음을 짓던 원숭이 혈승이 표정을 굳혔다.
싸늘한 표정으로 진가린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천천히 되물었다.
“네가 왜 그것이 궁금한 것이냐?”
“되묻지 말고 그냥 답변이나 해보세요. 숨어있던 힘이 위기의 순간에 저절로 발휘될 수 있는 거예요?”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난 회귀자가 아닌데. 정 궁금하다면 너희 대장한테 묻도록 해라. 그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 테니.”
“이 아저씨가 정말! 생각해서 술까지 챙겨왔건만 끝까지 이럴 거예요? 아, 몰라요! 이거나 마시고 평생 그 안에서 썩어요!”
원숭이 혈승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자, 열 받은 진가린이 술병 하나를 휙 던져주고 몸을 돌렸다.
씩씩거리며 몇 걸음 걸어 나가는데 혈승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가린. 멈춰라.”
“왜요? 또 무슨 실없는 소리를 하려고요?”
“네가 왜 그것이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넌 아직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 걱정하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 조만간 때가 올 테니 그때까진 고민하지 말고 그냥 네 삶을 살아라.”
여전히 모호하고 내용 없는 말이었다.
그래도 혈승의 목소리는 진지했기에 진가린의 기분도 조금은 풀렸다.
“네네. 전 잘 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어쨌거나 그 술 아껴서 마셔요. 자주 줄 수 없으니까. 비가 오길래 특별히 주는 거라고요.”
“지금 비가 오나? 알려줘서 고맙군. 신세를 지는 김에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무슨 부탁이요?”
“네가 손에 쥐고 있는 술병… 그건 아래층에 잡혀 있는 자에게 주려는 것이지?”
“귀도 밝네요. 아래층에 새로 잡혀 온 자가 있는 것도 알고. 그래요, 그자에게 주려는 거예요. 줄 거면 공평하게 줘야지 설마 아저씨한테만 주는 줄 알았어요?”
“역시 그렇군. 그럼 그자에게 가는 김에 이것도 좀 같이 주거라.”
혈승이 곁에 두었던 술병을 진가린에게 휙 던졌다.
엉겁결에 날아오는 술병을 받아 쥔 진가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요, 이건?”
“네가 가져온 것은 소홍주 아니냐? 술이 너무 약해. 그건 내가 아껴 두었던 백주다. 훨씬 독한 술이지. 새로 잡혀 온 자가 좌절감을 이겨내려면 독한 술이 필요할 거야. 그 백주도 그자에게 주도록 해라. 지하실 선배가 새로 온 후배에게 주는 수감 선물이라고나 할까? 하하하.”
“흥, 갑자기 웬 오지랖? 여하튼 알겠어요. 대신 술 모자란다고 나중에 징징대기 없기예요.”
진가린이 양손에 술병 하나씩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혈승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매우 음산하고 기괴한 미소였다.
‘흐흐흐, 이제 시작인 건가? 한 방울의 정혈, 하나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