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화. 연쇄 실종 사건 (1)
* * *
다음 날, 무림맹 원로원을 찾은 강한월은 사마염으로부터 얇은 책자 하나를 받았다.
천하전장 장주가 손자에 관해 작성한 것인데, 누구로부터 어떤 무공을 배우고 어떻게 익혀왔는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지도 계획을 짜는데 꽤나 도움이 될 듯했다.
사마염의 배웅을 받으며 원로원을 나올 때, 저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림맹 내부에선 금지된 마차를 누가 감히?
의아한 마음에 유심히 지켜보던 강한월이 사마염에게 물었다.
“사백, 저 마차 누구의 것인지 아십니까?”
“흥. 무림맹을 무시하고 저렇게 건방을 떨 수 있는 것이 누구겠느냐?”
마차 주인에 대한 감정이 꽤나 안 좋은 듯, 사마염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혹시 북경에서 온 자입니까?”
“그래, 그곳에서 온 자들이다. 본래는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근래에는 출입이 잦구나. 몇 달에 한 번씩 찾아와서 맹이 수집한 자료와 정보들을 제 것인 양 집어 간단다.”
“금의위(錦衣衛)입니까? 아니면….”
“동창(東廠)이다.”
그 순간 마차가 강한월 앞을 지나쳐갔다.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안에 앉은 자와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송곳으로 동공을 찌르는 듯한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마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강한월이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사백. 저 마차에 타고 있는 자… 누군지 알아봐 주실 수 있으십니까?”
“왜? 무슨 문제가 있느냐? 동창의 일은 가급적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냥 누군지만 알면 됩니다.”
“총관부에서 일을 보고 가는 길일 테니, 거기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문무대에 돌아가 있으면 내 알아보고 나중에….”
“아니요. 지금 즉시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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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로 돌아오는 길.
강한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사마염이 알아봐 준 바에 따르면, 마차 속의 인물은 동창의 장형천호(掌刑千戶) 장준검.
위로는 병필태감과 부례감 밖에 없으니 환관이 아닌 자로는 가장 고위직인 정삼품의 관리였다.
눈 한번 마주친 것만으로 강한월을 긴장하게 만든 고수.
이십 대의 나이에 동창의 천호 자리에 오른 것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이름이었다.
장준검.
악명높은 동창의 사냥개가 되어 있으면 절대로 안 되는 이름.
앞으로 십여 년 후에 무림맹주 자리에 올라 천하제일의 협객으로 추앙받을 인물이 바로 장준검이니까.
동명이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강한월의 직감으론 이자가 맞았다.
역사가 바뀌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정파의 기둥을 누군가가 미리 낚아챘다.
최악의 가정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쳐들어 강한월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문무대로 복귀한 강한월은 애써 복잡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아직은 불확실한 일… 벌써부터 대원들을 긴장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질문이 나올 텐데 대답하기가 곤란하기도 했고.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만.
“모두 모여봐. 전달할 내용이 있다.”
곽철과 함께 챠크라에 적응하는 훈련을 하고 있던 대원들이 모여들었다.
“천하전장 장주에게 원진탁이라는 손자가 있어. 그 친구를 잠시 지도하기로 했다.”
“천하전장 손자요? 회귀자에 관련된 작전입니까?”
“아니. 천하전장에서 우리 문무대를 후원하기로 해서… 그에 대한 보답이다.”
“우와, 그 친구 끗발 좋은데요. 신주의협의 고제자이자 금검문의 후계자인 대장의 지도를 받다니… 역시 금수저라 다르긴 하네요.”
“제갈 너도 금수저이긴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부러워할 것도 없어. 너는 내가 더욱 세심하게 지도를 해주도록 하지.”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요.”
제갈윤은 얼른 입을 다물었고, 강한월의 지시가 계속되었다.
“보름 정도니까 긴 시간은 아니야. 진가린. 너는 내가 원진탁을 지도하는 것을 도와라. 시범 조교 겸 연습 대련 상대가 필요하니까.”
“어머? 신입이라고 너무 막 굴리시는 거 아니에요?”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진가린은 웃고 있었다.
요 며칠 수련이 꽤나 힘들던 차였다. 수련만 빠질 수 있다면 뭔들 못하랴.
“나머지는 다음 임무가 있을 때까지 수련에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제갈, 앞으로는 북경의 동향도 눈여겨보도록.”
“북경이요? 황실, 동창, 금의위 말씀이죠? 갑자기 왜요?”
“그냥 그쪽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아서.”
“뭐, 그렇긴 하네요. 만약 그쪽에서 일이 터지면 정말 큰일이죠. 깊숙한 정보를 얻기는 힘든 곳이지만 최대한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대장… 저도 보고드릴 게 있어요.”
“무슨 보고?”
“전에도 몇 번 보고 드린 건데요… 실종 사건이 또 일어났어요.”
“젊은 무인들이 실종되는 사건 말이냐?”
“네. 몇 달 잠잠하다가 며칠 전 다시… 무림맹에서 파악한 것만 벌써 여덟 명입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이곳 낙양이에요.”
“이번에 실종된 것은 누군데?”
“홍숙희라고 사천 용검문의 소문주입니다. 나이는 스물다섯. 무공은 일류 수준이고, 무림맹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실종됐습니다.”
“이전에 실종됐던 자들과 공통점은?”
“다들 일류 수준의 젊은 무인이란 것 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습니다. 전에 실종된 사람들은 광동의 연철륭, 호남의 조자호, 강서의 서주철, 호북의 문여덕….”
“사건이 남쪽에서부터 북상하고 있구나. 연쇄 실종은 회귀자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으니 계속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해. 무언가 찾아지면 즉시 보고하고.”
* * *
며칠 후, 사마염이 소식을 보내왔다.
천하전장의 소공자가 낙양에 도착하여 가르침을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강한월은 진가린을 데리고 원진탁이 묵고 있는 장원을 찾았다.
원진탁의 첫인상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혀 실용적일 것 같지 않은 값비싼 수련복을 걸친 허여멀건 피부의 젊은이.
세상 편한 웃음과 여유로운 표정은 여태껏 고생이라곤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부잣집 자제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건방짐과 남을 무시하는 눈빛은 없다는 정도.
“강 대협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천하전장의 원진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성은 밝았다.
천하제일 고수의 제자이니 무례해선 안 된다고 조부에게 주의를 들었던 것일까?
“반갑네. 대협이란 호칭은 당치 않으니 그냥 강 형이라고 부르게.”
“아! 정말로 제가 형님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무슨 도원결의라도 맺게 된 것처럼 기뻐하는 원진탁을 보고 진가린은 헛웃음을 삼켰다.
허, 참 철없는 아이일세.
특별한 관계가 아니니 그냥 손윗사람 호칭으로 부르라는 말인데….
“저… 그런데 함께 오신 소저께서는…?”
“그래, 인사 나눠라. 이쪽은 무공 지도를 돕기 위해 온 진가린. 실습 조교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반갑습니다, 진 여협. 제가 무림의 미녀 고수를 뵙는 것은 처음입니다. 영광입니다.”
“호호, 저는 고수도 아니고 여협도 아닙니다. 미녀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누님이라고 부르진 마세요. 제가 알기론 우리 동갑이거든요.”
“네? 아… 네….”
진가린의 농담에 분위기가 뻘쭘해졌다.
한 번 피식 웃은 강한월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보름밖에 없으니 빨리 수업을 시작하자. 우선 비무를 통해 네 실력부터 확인해야겠다.”
“제가 어찌 감히 형님과 비무를…?”
“나 말고. 진가린과 붙어봐.”
* * *
장원에 딸린 널찍한 연무장.
진가린과 원진탁이 검을 들고 마주 섰다.
진지한 자세로 검을 든 진가린과는 달리 원진탁은 조금 머뭇거리는 표정이었다.
“원진탁. 여자라서 꺼려지는 것이냐? 진가린은 무림맹 입맹 시험 전 과목 수석이었다. 맹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문 일. 그러니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춰!”
“아! 제가 그릇된 선입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원진탁은 즉시 잘못을 인정했다.
그래도 기본은 나쁘지 않은 젊은이라 생각하며 강한월이 고개를 끄덕일 때, 원진탁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첨을 땅으로 향하는 자세로 예의를 갖춘 후, 검결지를 짚고 공격 시작을 알리는 기수식이 이어졌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본격적인 초식을 전개하려다가… 원진탁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진가린이 쭉 뻗은 검이 어느새 자신의 목젖에 닿아 있던 것이다.
“왜요? 놀랐어요? 내가 기수식 없이 시작해서? 아님 삼 초식 정도는 양보할 줄 알았나요?”
“아… 아닙니다. 제가 졌습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원진탁의 얼굴이 당혹과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겠다는 듯 다시 한번 기수식을 펼치는 그는 상대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진가린의 기습이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원진탁이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검이 빠르게 그녀의 가슴을 향해 뻗어갔다.
절반의 힘만 얹어진 검.
나머지 절반은 비축하고 있었는데, 상대가 이번 공격을 피하면 뒤이어 연계 공격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진가린은 검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 미친!
검이 막 그녀의 봉긋한 가슴에 박히기 직전, 기겁한 원진탁이 죽을힘을 다해 검을 멈춰 세웠다.
휴우~
가까스로 검을 멈추고 안도하는 원진탁의 목에는… 또다시 진가린의 검이 살포시 닿았다.
“어머! 이번에도 내가 이겼네요.”
원진탁의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검게 물들었다.
농락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가르침을 얻은 것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것이 비무가 아니라 실제 대결이었다면 자신은 벌써 두 번 죽은 목숨이라는 것.
그렇다면… 이건 가르침이구나.
원진탁이 깨달음을 가슴에 새기고 있을 때, 강한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가린. 정신교육은 그만하면 됐으니 이제 제대로….”
“하하. 알았어요. 원 공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랬던 거라구요.”
진가린이 예쁘게 웃으며 답했다.
반쯤은 장난기가 발동했던 것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호의가 맞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원진탁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제 정말 제대로 해볼까?
* * *
몇 차례 비무를 마치고 대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가린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듯 멀쩡한 모습이지만, 원진탁의 값비싼 무복은 여기저기 베어져 걸레가 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아니, 나쁘지 않았다. 제법 검을 잘 다루더군.”
“네? 하지만 저는 진 소저의 옷깃 한 번 건드리지 못했는데요?”
“네가 못한 것은 아니다. 가린이가 괴물인 거지.”
어머, 숙녀에게 괴물이라뇨!
진가린이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표했다.
비록 강한월은 본 척도 안 했지만.
“좋은 스승들께 가르침을 받았더군. 실전 감각이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내공은 꽤나 정순하더군. 일류 수준 이상이었다.”
“내공은 조부님 덕분입니다. 귀한 영약을 계속 구해주셨거든요. 조부님 말씀이 내년에도 공청석유가 구해질 거라고….”
“그렇구나. 공청석유라면 십 년 공력은 더 얻을 수 있겠지. 어쨌거나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 내일부터 검술 하나를 전할 테니 열심히 배워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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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로 돌아오는 길.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강한월이 진가린에게 물었다.
“진가린. 아까 원진탁과 대화하던 중 뭐 느낀 것 없었나?”
“있었죠. 역시 금수저가 좋구나. 공청석유 같은 전설적인 영약을 예약해 놓고 있으니….”
“그래, 전설적인 영약이지. 한 세대에 한 번 발견될까 말까 하는. 그런데… 원진탁의 조부는 내년에 공청석유가 구해질 것을 어떻게 미리 아는 걸까?”
“네에? 아니, 그럼…?”
“그냥 그렇다고. 급할 건 없어. 나중에 한 번 알아보자.”
느긋한 걸음으로 돌아와 문무대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제갈윤이 달려 나왔다.
얼굴이 벌건 것이 몹시 흥분된 표정이었다.
“대장! 기다리고 있었어요. 드디어 찾았어요!”
“찾다니? 뭘?”
“실종자들의 공통점이요! 아니… 공통점이라기보다는 연관성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