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연쇄 실종 사건 (2)
* * *
실종자들의 인적사항이 적힌 종이를 탁자 위에 펼쳐 놓고, 제갈윤이 설명을 시작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일류 수준의 무인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럼 도대체 뭘까, 한참을 고민하는데 불현듯 이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제갈윤이 종이를 모두 집어 들더니 순서대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연철륭 서른둘, 조자호 서른하나, 서주철 서른, 문여덕 스물아홉, 호만곽 스물여덟, 봉추일 스물일곱, 교영화 스물여섯,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숙희 스물다섯.”
“나이가 모두 다르구나.”
“그렇습니다. 모두 나이가 같은 것 못지않게 전부 다른 것도 이상해요. 제 느낌으론 범인은 십이간지 띠에 맞추어 일류 고수를 한 명씩 납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십이간지라… 출생연도별로 한 명씩이라는 가정은 그럴듯하다만, 열두 명으로 한정하는 이유는 뭐지?”
“실종 사건이 일어난 순서를 보면 서른두 살부터 역순으로 가고 있어요. 일부러 순서를 정한 듯 한 살씩 낮아지면서요. 마치 정성껏 제물을 준비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청보에게 물어보니, 제례법 중엔 제물 준비 과정부터 하나하나 순서를 지키는 경우도 있다더군요. 제물이라면 주술과 관계가 있을 거고… 그래서 십이간지, 열두 명을 떠올렸어요. 물론 전적으로 제 추론이고, 근거가 매우 약하다는 건 인정합니다.”
십이간지에 맞춘 제물이라?
너무 심한 비약인 것 같지만, 제갈윤의 추리를 믿어보기로 했다.
때론 황당한 비약을 통해 핵심에 접근하는 것. 그런 일을 해내는 것이 바로 천재니까.
“그런 가정이라면 범인들이 대범하게 무림맹 앞에까지 와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 이해가 되는군. 제갈, 네 생각은 조건에 맞는 대상을 찾기에 가장 수월한 곳이 무림맹이라서 사건이 이곳까지 번졌다는 거겠지?”
“네. 마흔 살 일류 고수를 찾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도 어렵지 않죠. 하지만 스물하나, 스물둘 짜리 일류 고수를 찾으려면? 젊은 고수들이 떼로 모여 있는 무림맹이 딱이죠. 그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무림맹 코앞까지 들어온 것으로 볼 때, 범인의 목표는 이십 대 초반 젊은 고수가 분명합니다.”
“좋아. 네 추리가 맞다고 치고. 회귀자와 관계되었을 가능성은?”
“주술적인 냄새가 난다는 것 외에는 모르겠어요.”
제갈윤은 답을 하지 못했지만, 강한월은 직감적으로 혈승의 그림자를 느꼈다.
특수한 조건을 가진 실종자들.
짙은 혈향(血香)이 풍기는 것 같았다.
피의 제사, 혈제의 냄새가.
“지금부터 이 사건은 우리가 맡는다. 제갈, 범인을 잡을 계획을 세우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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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월은 홀로 지하실로 향했다.
답을 들을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혈승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열두 명의 젊은 고수들을 제물 삼아 드리는 혈제가 있는지.
돼지 혈승을 먼저 찾은 강한월은 쇠창살 앞에서 멈칫했다.
미동도 없이 침상에 누워있는 돼지 혈승.
불길한 느낌에 쇠창살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 * *
“여어~ 이게 누군가. 가면을 쓴 사나이 강한월 아닌가. 너무 오랜만에 얼굴 보이는 거 아냐? 명색이 한 지붕 아래 사는 사이인데.”
홀로 나타난 강한월을 보고 원숭이 혈승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강한월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이 몹시 마음에 드는 듯했다.
“당신 동료 돼지 혈승이 죽었소. 체온을 보니 죽은 지 얼마 안 됐더군. 살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소.”
“혈승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돼지가 죽었으면 고기로 쓰면 되지 그게 나와 뭔 상관이라고?”
“희망을 잃고 좌절하고 공력도 흩어졌지만…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생각되진 않소. 어떤 수를 쓴 건지는 모르지만, 당신 짓이겠지.”
“하하, 여기 이렇게 갇혀 있는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어떻게? 내가 벽을 통과할 수라도 있단 말인가? 그랬으면 벌써 이곳을 떠났지.”
“말했지 않소,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른다고. 원숭이 혈승. 경고하겠소. 허튼수작은 부리지 마시오. 당신, 그리고 나머지 열 명의 혈승들… 설사 지옥에 숨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끝까지 잡아낼 테니.”
강한월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강철 같은 의지가 느껴졌기에 이번만큼은 원숭이 혈승도 농담으로 되받지 못했다.
한동안 매서운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그러던 중 강한월이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십이간지에 해당하는 열두 명의 피로 드리는 혈제의 효능은 무엇이오?”
“혈제? 그건 또 뭔 소린가?”
원숭이 혈승은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그 순간 눈빛이 파르르 떨린 것을 강한월은 놓치지 않았다.
용무가 끝난 강한월이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렸다.
지하실 문 뒤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원숭이 혈승은 말없이 지켜봤다.
‘십이지령 혈제가 시작된 거군. 누굴까… 뱀인가? 아니면 토끼?’
* * *
강한월이 죽은 돼지 혈승을 발견하던 그 시각.
부드러운 비단 금침에 누워 이른 잠을 청하던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다.
아름다운 미녀를 끼고 술을 마시던 자도, 웅장한 태사의에 앉아 수하들을 호령하던 자도… 모두 잠시 손을 멈추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피부의 솜털이 곤두섰다.
몸 한군데가 떨어져 나간 듯한 상실감.
혈령으로 연결된 자들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각.
하나가 죽었다.
그러니 어떤 하나는 강해졌을 것이다.
모습과 위치는 제각각이었지만 이 순간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계획하고 있던 것을 서둘러야겠다고.
* * *
문무대가 모두 모였다.
돼지 혈승의 죽음 때문에 분위기가 무거웠다.
하지만 강한월은 그 죽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는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이.
당장 중요한 것은 실종 사건이라며 제갈윤에게 작전 설명을 재촉했다.
“범인에 대해선 아무런 단서가 없어요. 그러니 우린 희생자를 통해 범인에 접근합니다. 다음번 희생자를 예측하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이죠. 표현이 좀 뭐하지만… 실종 후보자.”
제갈윤이 설명을 계속하며 종이를 펼쳤다.
“마지막 실종자인 홍숙희는 스물다섯 살. 그러니 다음 후보자는 스물네 살로 규정해봅니다. 무림맹 인사 정보를 다 뒤지고 낙양에 소재한 문파들 정보까지 확인한 결과, 조건에 맞는 후보는 이 세 사람입니다.”
청룡대 곽상학, 특임대 송거이, 그리고 맹주 호위대 윤비호.
물론 무림맹 소속의 스물네 살 일류 고수는 몇 명 더 있었으나, 이 셋을 제외하고는 임무 때문에 타 지역에 나가 있었다.
제갈윤이 세운 작전은 단순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실종 후보자 주변에 잠복하고 있다가 범인이 나타나면 잡는 것.
“우리 인원이 일곱 명밖에 안 되는데 그게 되겠어요? 어디로 움직일지 모르는 세 명을 하루 종일 보호하며 감시하려면 우리 갖고는 부족할 것 같은데요.”
위청보의 질문이었는데, 제갈윤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
“부족하지. 게다가 우리는 실은 단 두 명이나 마찬가지. 이 작전에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대장과 광 선배밖에 없다.”
“왜요?”
“범인은 지금까지 일류 고수들을 납치하면서 한 번도 흔적을 남긴 적이 없어. 그게 무슨 뜻일까? 일류 고수 정도는 간단히 제압해서 끌고 갈 실력자라는 거야. 범인은 절정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초절정이라고 산정하는 게 맞아. 그러니 대장하고 광 선배만 범인을 잡을 수 있지.”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긴. 후보자를 줄여야지. 우리 숫자에 맞게.”
말은 위청보에게 하는 것이지만 제갈윤의 시선은 강한월에게 향해 있었다.
대장이라면 이미 이해했으리라 기대하면서.
“사마염 사백님의 도움이 필요하겠구나.”
“맞습니다. 원로원주의 끗발을 써서 후보 셋 중 최소 하나, 아니면 둘을 타 지역으로 보내 버리는 겁니다. 아니면 적당한 누명을 씌워서 잠시 집법당 뇌옥에 가둬도 좋구요.”
“뇌옥은 무슨. 일단 맹주 호위대의 윤비호는 어렵지 않다. 맹주전 안에서 머물도록 하고 외출을 금지시켜 버리면 되니까. 특임대 송거이를 임무 핑계로 낙양 밖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하자.”
“그러면 되겠네요. 남은 청룡대 곽상학을 대장과 광 선배가 밀착 감시하는 것으로 하죠.”
“지금 당장 사백께 다녀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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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염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던 강한월은 한 시진이 채 못되어 돌아왔다.
“어? 벌써 다녀오셨어요? 원로원주님은 만나보셨고요?”
제갈윤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강한월은 모든 대원을 불러모았다.
“사백을 만나 도움을 청했고 흔쾌히 도와준다고 하셨는데… 특임대 대장을 불러 협조 요청을 하는 순간 상황이 바뀌었다.”
특임대 대장의 말에 따르면 송거이는 어제부터 연락 두절이라고 했다. 불과 하루밖에 안 돼서 실종 신고를 하지는 않았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 즉시 강한월은 문무대로 돌아온 것이다.
“그럼 혹시?”
“그래. 이미 납치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범인이 우리 예상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다. 스물네 살은 우리가 한발 늦었고… 제갈, 스물세 살 대상자도 조사해놨겠지?”
“네. 당연히 했죠. 스물세 살은 간단해요. 조건에 맞는 자가 한 명밖에 없거든요. 조윤이라고, 백호대 이 년 차 무사입니다.”
“사는 곳은?”
“북대로 시장 옆에 작은 집을 구해서 살고 있더군요. 여기 약도 있습니다.”
“나와 광군영이 그곳으로 가겠다. 며칠 걸릴 수도 있을 거야.”
“대장, 그럼 원진탁 공자 무술 지도는 어떻게 하죠?”
그래, 그 일도 있었지.
아무리 임무가 중하다 한들, 멀리서 온 원진탁을 무작정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일….
“진가린. 네가 지금 가서 양해를 구해. 혼자 가기 뭐하면 위청보랑 같이 가고.”
* * *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찾아왔다.
조윤의 집에 도착한 강한월과 광군영은 은밀히 지붕 위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백호대 훈련을 마친 조윤이 귀가했다.
싸 들고 온 음식으로 저녁을 때운 그는 훈련이 피곤했던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조윤의 코 고는 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박자라도 맞춘 듯 섞여서 들려왔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밤이었지만, 지붕 위의 강한월과 광군영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두 시진 정도 흘렀을까… 광군영이 감았던 눈을 뜨며 전음을 보냈다.
—드디어 오는군.
강한월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기척을 죽이고 접근하고 있는 것은 네 명.
검은 야행복을 입고 복면을 쓴 자들이 날랜 신법으로 담을 넘어왔다.
—지금 잡을까?
—아니, 잠시만 기다려보자.
복면을 쓴 자들은 곧바로 조윤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당 한편에 은신했다.
목표물이 코앞에 있는데, 뭐 하는 것일까?
누군가 더 올 사람이 있는 걸까?
한참을 지켜봤으나 복면인들은 그 상태로 은신을 계속할 뿐이었다.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강한월이 조심스럽게 지붕 기와 하나를 열더니, 틈으로 보이는 조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부드럽게 날아간 지풍이 조윤의 혼혈을 짚었다.
소란스럽더라도 잠이 깨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죽이면 안 돼. 생포해야 한다.
—뭐, 가능하면 그렇게 하지.
강한월과 광군영이 지붕을 박차고 올라 담장 옆에 은신한 복면인들을 향해 쇄도했다.
부스럭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귀신 같은 신법이었지만, 복면인들도 만만치 않았다.
즉시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며, 날아오는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한 강한월이 복면인을 향해 검을 찔렀다.
채앵.
곁에 있던 다른 복면인이 재빨리 움직여 강한월의 검을 대신 막았다.
빠른 신법이었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으로 볼 때 절정은 넘어선 듯했다.
그 순간, 광군영의 장력이 나머지 두 명의 복면인을 향해 뻗어갔다.
무림맹 지역임을 감안하여 마공을 일으키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충분히 강력한 장력이었다.
퍼엉.
십자로 검을 그어 장력을 막은 복면인들이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자신이 맡은 복면인들을 상대하면서도 광군영 측 상황을 놓치지 않던 강한월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장력을 해소하던 복면인들의 검술.
어디의 무공인지 알 것 같았다.
‘설마… 그들이 실종 사건의 범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