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연쇄 실종 사건 (3)
* * *
강한월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복면인들의 검법은 분명 천룡무진이십팔검.
황실 수호를 위해 만들어진 무공인 것이다.
—광군영. 그들을 다치게 하면 안 돼.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며?
짜증 섞인 답변을 하며 광군영은 장력에서 힘을 뺐다.
마공도 쓸 수 없고 공력도 낮춰야 했으니 손을 묶고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능숙한 초식 전개와 빠른 신법으로 복면인을 몰아붙였다.
역시 천마신교의 제일 기재.
강한월은 안심하며 자신의 싸움에 집중했다.
조금씩 검의 속도를 높이며 두 명의 복면인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한 명은 절정에 근접한 고수였고, 다른 한 명은 원숙한 일류 솜씨. 하지만 거침없이 몰아치는 강한월의 검 앞에서 점점 수세에 몰렸다.
이들이 먼저 입을 열게 만들려는 의도였고, 과연 복면인 한 명이 뒤로 물러서며 호통을 쳤다.
“나는 동창의 이형백호(理刑百戶)다. 납치범은 당장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지 못할까!”
‘우리 보고 납치범이라고?’
의아한 마음에 강한월과 광군영이 서로를 돌아봤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건가?
“동창? 황실의 관리가 어인 일로 무림맹 무사의 집에 잠복 중인 겁니까?”
“흥, 시치미를 떼겠다는 것이냐? 너희가 저지르는 연쇄 납치 사건을 막기 위해 온 것임이 당연하지 않느냐!”
“무림의 사건을 어째서 동창이…?”
“이놈! 무림인은 황제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냐? 어서 검을 버리고 포박을 받지 못할까!”
“백호장님. 서로 오해가 있던 것 같군요. 저희는 납치범이 아닙니다. 연쇄 실종 사건을 추적하고 있던 무림맹 소속 무인입니다.”
“무림맹에서 나왔다고?”
“그렇습니다. 저는 원로원 소속 무인 강한월입니다. 다음 희생자가 조윤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곳에서 은신 중이었습니다.”
해명이 쉽지 않겠다고 걱정했지만, 의외로 동창의 고수들은 ‘강한월’이라는 이름에 반응했다.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는데, 대화 중에 ‘장형천호’, ‘장준검’ 등의 단어가 섞여 있었다.
“이제 보니 강한월 소협이셨군. 장 천호께서도 높게 평가하는 분이니 좀 전의 불미스러운 일은 문제 삼지 않겠소.”
장준검이 자신에 대해 언급했다고?
아마도 마차에서 눈이 마주친 후 자신과 마찬가지로 조사를 해본 모양이었다.
어디까지 알아본 것일까?
왠지, 조만간 그와 엮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천호 대인께서 저에 대해 평하셨다니 의외군요. 여하튼 넓게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동창에선 어떻게 조윤이 다음 희생자일 것을 예측하신 겁니까?”
“정보 수집과 분석은 우리 동창이 천하제일임을 아실 것 아니오. 장 천호께서 몇 가지 정보를 보시고 곧바로 예측을 해주셨소.”
역시 장준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우린 장 천호의 명을 받고 온 것이라 이곳을 지켜야 하오. 강 소협은 어쩌시겠소?”
“저희는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동창에서 나섰으니 괜히 저희가 끼어서 일을 번거롭게 만들 필요는 없지요.”
“좋소.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시오. 혹 염려가 되면 차라리 다른 후보자를 지키러 가보시던가.”
“다른 후보자요?”
“스물세 살 일류고수. 무림맹도 그렇게 예측한 것 아니었소?”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이곳 낙양엔 조윤 외에는….”
“하하하, 무림맹이 우리 동창보다 못함이 증명됐군. 당신들이 틀렸소. 정식 무인이라면 조윤밖에 없지만, 애매한 후보가 한 명 더 있소. 뭐, 무인이라 할 수는 없으니 확률이 높진 않지만. 그래서 우리도 천하전장의 원진탁이 아닌 조윤을 지키는 것이고.”
“원진탁? 천하전장 소공자가 낙양에 와있는 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낙양의 상단과 전장들 사이에선 벌써 소문이 다 돌았는데. 무림인을 꿈꾸는 천하전장의 후계자가 한 수 배우러 낙양에 왔다고. 실력은 일류라고 하더군. 웬만한 객잔의 점소이들도 모두 아는 이야기일 거요.”
강한월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엄밀한 의미로 원진탁은 무림인도 아니고 일류고수도 아니다.
하지만 범인이 정한 조건이 내공에 국한된 거라면… 분명 그도 해당된다.
강한월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동창의 고수들과 헤어진 강한월과 광군영은 경공을 펼쳐 달렸다.
모든 가능성에 대비했어야 하는데, 잠시 안일했던 것이 후회가 됐다.
걱정과 자책은 신법의 속도를 더해줬고, 한 식경이 채 안 되어 원진탁의 장원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릴 여유도 없었기에, 달려온 속도 그대로 담을 넘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질주하니 대낮같이 불을 밝혀 놓은 대청이 보였다.
다행히도, 그곳엔 원진탁이 있었다.
“아! 형님 오셨습니까?”
원진탁이 벌떡 일어서며 강한월을 반겼다.
강한월은 안도했으나, 잠시뿐이었다.
원진탁의 곁에는 의외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몹시 불안한 표정을 하고서.
“위청보.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원 공자를 지키고 있었어요. 그보다도… 큰일 났어요. 진가린이 납치됐어요.”
강한월은 침음을 삼켰다.
조윤도 아니고, 원진탁도 아니고… 진가린이라니?
“진가린이 왜? 알아듣게 설명을 해봐.”
“대장 지시대로 원 공자에게 양해를 구하러 왔었거든요. 용무를 잘 마치고 돌아가는데….”
뭔가를 생각하는 듯 멍한 표정으로 걷던 진가린이 위청보를 불러 세웠다.
불현듯 든 생각인데, 범인의 목표가 스물세 살 일류고수라면 원진탁도 해당이 된다며 다시 가서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문무대로 가서 선배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사이 범인들이 들이닥치면 어떡하냐 옥신각신 끝에 결국 원진탁의 장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반 시진 정도가 흐른 후, 진가린의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다.
장원 입구에서 은신해서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붉은 가면을 쓴 십여 명의 괴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집단인 듯, 괴인들의 움직임은 은밀하면서도 체계가 있었다.
정확한 수준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진가린과 위청보의 실력으론 상대할 수 없는 자들임이 분명했다.
“어째서 범인들이 나타나길 기다린 거야?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즉시 원진탁을 데리고 피신을 했어야지!”
“저는 그러려고 했는데, 범인을 잡아야지 도망치면 어떡하냐고 가린이가 고집을….”
“휴우. 정말 진가린 얘는…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며 위청보가 설명을 계속했다.
붉은 가면 괴인들이 막 장원의 담을 넘으려던 그때, 어둠 속에 숨어있던 진가린이 검을 뽑아 들고 뛰쳐나갔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괴인들은 당황했다.
자신의 실력이 일류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고, 두세 명의 붉은 가면들을 몰아붙였다.
“가린이는 왜 그런 짓을 한 건데? 이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차라리 청보 네가 부적술을 썼더라면….”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 가린이는 계획이 있었어요. 누군가 납치돼야 한다면, 차라리 자신이 잡히는 게 좋겠다는 거였죠. 자기도 일류 수준이고 원 공자와 동갑이라고….”
괴인들은 당황했으나 그건 잠시였고, 수장으로 보이는 붉은 가면이 나서자 상황이 정리됐다.
우두머리의 손에서 시뻘건 구름 같은 기운이 뻗어 나와 진가린을 가격했고, 그녀는 검을 놓치며 땅에 쓰러졌다.
장력을 펼쳤던 자가 다가와 잠시 그녀를 살폈다.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던 그가 단도를 꺼내 진가린의 손가락을 찔렀다.
그리고는 품에서 작은 옥병을 꺼내어 손끝에서 흐르는 피를 담았다. 원하는 십이간지에 해당하는지 확인하는 비술 도구였다.
곧이어 옥병 속에서 붉은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결과가 마음에 들었던지, 괴인들은 진가린을 둘러업고 사라졌다.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위청보는, 괴인들이 떠난 후 장원으로 뛰어들었다.
얼른 도움을 청하는 글을 써서 문무대로 보냈고, 본인은 장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설명을 듣는 동안 강한월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진가린도 스물세 살 일류라는 것은 진작 염두에 뒀었다.
하지만 문무대 자체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탓에, 그녀가 표적이 되리라곤 예상 못 했던 것이다.
“설마 그냥 보낸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가린이가 뛰쳐나가기 전에 추신부(追身符)를 몸에 심었어요. 열두 시진 동안은 이 나침반이 위치를 알려줄 거예요.”
강한월은 위청보가 건네는 나침반을 받아 들었다.
항주에서 속을 썩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그녀를 구하러 달려가야 한다니.
휴우, 한숨을 내쉰 그가 광군영에게 말했다.
“이번엔 좀 더 빨리 달려야겠다.”
* * *
쾅쾅쾅.
정신을 차린 진가린이 거칠게 마차 벽을 두드렸다.
“아저씨! 밥 줘요.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좋다고, 납치는 납치고 먹을 건 줘야 할 것 아네요!”
당연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마차는 계속 달리기만 했다.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걸까?
진가린은 우선 몸 상태를 점검했다.
공력을 쓰지 못하도록 혈도가 눌려 있었지만, 붉은 가면에게 맞은 내상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이깟 부상이야 뭐, 하루 잘 쉬면….
팔베개를 하고 느긋하게 마차 바닥에 누웠다.
다분히 즉흥적이었지만, 이 정도면 잘 해낸 거였다.
청보 선배가 추 뭐라는 부적을 심어줬으니 분명 대장이 구하러 오겠지.
혹시 부적이 불량품이라면?
설마… 명색이 모산파의 정통 계승자인데.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리는 것과 배가 고프다는 것을 빼고는 나름 편안했다.
진가린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어두운 밤, 지켜보는 눈도 없었기에 강한월과 광군영은 마음껏 경공을 펼쳤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쾌속 질주하길 한참. 드디어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보였다.
십여 마리의 말들과 마차가 일으키는 먼지였다.
“지금 잡을까?”
“아니, 좀 더 따라가 봐야지. 진가린을 구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니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시 한참을 달렸다.
어스름이 해가 떠오를 무렵, 마차는 낙양을 벗어나 이름 모를 산속으로 들어섰다.
좁은 산길을 삐거덕대며 올라간 마차가 어떤 건물 앞에 멈췄다.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건물 안에서 붉은 가면을 쓴 사내들이 몰려나왔다.
“이 조장. 늦지 않게 왔군. 임무는?”
“성공했소. 뭐, 사람이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스물세 살 일류인 것은 틀림없소.”
“그런가? 잘했네. 꼭 원진탁일 필요는 없으니. 제물은 창고에 넣어 놓고 좀 쉬게. 이제 두 명만 더 잡으면 우리 일은 끝이니까.”
붉은 가면 몇이 진가린을 마차에서 끄집어내 창고로 끌고 갔다.
양팔을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도 그녀는 먹을 것을 달라 악을 썼다.
가면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사내들은 뭐 이런 년이 다 있냐는 표정이었다.
사내들이 재빨리 창고 문을 연 뒤, 진가린의 엉덩이를 걷어차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아이 씨. 다 큰 숙녀 엉덩이를 차고 난리야!”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진가린은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여기 있었구나.
창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사내 둘과 눈이 마주쳤다.
지치고 겁먹은 듯한 표정의 사내들은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홍숙희 소협과 송거이 소협 맞으시죠?”
“다, 당신 누구요? 어떻게 우리 이름을 아는 거지?”
“저는 진가린이라고 해요. 마찬가지로 납치됐고요. 얼마나 오래일지는 모르지만 함께 있는 동안 잘 지내도록….”
“어떻게 우리 이름을 아는 거냐니까? 혹시… 무림맹에서 구출 작전을 시작한 거요?”
구석의 사내가 거칠게 따져 물었다.
다급한 목소리에는 상당한 기대감도 묻어 있었다.
“정식 구출 작전은 아닌데요… 어쨌든 구출은 될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구출대로 어느 부대가 오는 거요? 청룡대? 아님 백호대?”
“부대가 오는 건 아니고… 아마 두세 명이 올 것 같아요. 확실치는 않지만.”
“겨우 두세 명? 지금 장난하는 거요?”
사내가 갑자기 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