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연쇄 실종 사건 (5)
* * *
강한월 일행이 문무대로 돌아왔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대원들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일행의 몰골을 보고 눈을 번쩍 떴다.
“어? 많이 다쳤어요?”
“우리 피가 아니야. 그보다… 소영영 네가 수고 좀 해줘야겠다.”
광군영이 양어깨에 들쳐 매고 온 홍숙희와 송거이를 내려놨다.
본인들의 동의가 없다는 것이 찜찜했지만, 기억을 지우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소영영이 홍숙희와 송거이에게 간단한 비술을 펼쳤고, 지난 하루 동안의 일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음 순서가 진짜였다.
강한월이 위험을 감수하고 살려 데려온 붉은 가면.
조장들보다 무공은 쳐졌지만, 성전을 선포했던 것을 보면 이자가 핵심인 것이다.
가면을 벗기니 나타난 건 서른 중반의 평범한 얼굴.
성전 비술의 여파인지 얼굴 근육은 일그러져 있었고, 눈가엔 핏자국이 선명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
“노력해볼게요. 근데 딱 봐도 이미 정신이 망가졌어요. 아마 자기 이름도 기억 못 할 것 같은데요. 남은 조각들이라도 찾아볼게요.”
소영영은 정신을 집중하여 동조를 시작했다.
그녀의 상단전으로 전해오는 것은 온통 시뻘건 피였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흐르는 핏물을 헤치며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봤지만, 역시나 모든 기억이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다.
“영생궁이라는 이름은 명확히 남아있어요.”
그 이름은 성전이 선포될 때 이미 들었다.
하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천하의 수많은 도관 중에 ‘영생’이라는 현판을 건 곳이 수백 곳은 될 테니.
“그 외에는?”
“가면을 쓴 모습이 몇 보이고… 피의 제사라는 메아리가 들려요.”
“메아리? 어디서 메아리가 울리지? 주변 모습이 보이나?”
“어렴풋한 산속 풍경… 좀 특이하게 생긴 봉우리가 보여요.”
더 이상은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소영영은 섭혼술을 끝냈다.
강한월은 붉은 가면의 사혈을 짚어 안식을 선사했다.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정이 상하고 정신이 파괴되어 어차피 회복될 수 없는 몸.
소영영은 즉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붉은 가면의 파괴된 기억 속에 남아있던 풍경이었다.
신녀 교육을 받은 소영영은 그림 솜씨도 남달랐다.
세밀한 선으로 정교하게 묘사된 봉우리는 확실히 특이하고 눈에 띄었다.
“제갈. 이 정도면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무림맹에 지형지물 자료가 많으니 즉시 조사를 하겠습니다.”
* * *
낙양 모처의 동창 안가(安家).
장형천호 장준검이 이형백호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 실종됐던 홍숙희와 송거이가 낙양 시내 객잔에서 발견됐습니다. 현재는 무림맹에서 조사를 받는 중입니다. 해서, 저희도 작전을 변경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일단은 오늘 밤도 조윤의 거처에서 잠복하면서….”
“아니, 더 이상 조윤을 지킬 필요 없다. 이 건은 종결하도록 해.”
“네? 아직 범인을 잡지 못했는데요? 병필태감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안인데….”
“병필태감께는 내가 보고 드리겠다. 실종자들이 복귀한 것도 그렇고, 오늘 아침에 인근 야산에서 대규모 살상의 흔적이 발견됐다며? 당분간 실종 사건은 없을 거야.”
“뭐, 천호님의 직감이 틀린 적이 없으니… 그럼 사건 종결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누굴까요? 실종자들을 구하고 범인들을 소탕한 것은.”
“누굴 것 같나?”
“정황상 무림맹일 수밖에 없는데, 공식적으론 부인하고 있으니 헷갈리네요.”
장준검은 미소만 지었다.
무림맹이 일부러 숨기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갑자기 강한월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마차를 타고 지나다 눈이 한 번 마주친 것이 다인데….
* * *
무림맹의 실질적인 이인자인 제갈현선 총군사가 원로원을 찾았다.
원로원 원주인 사마염에게 독대를 청하기 위해서였다.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제갈현선과 사마염 사이에 제법 긴장감이 돌았다.
“그런데 어쩐 일이오? 공사가 다망하신 우리 총군사께서 차나 마시자고 이 늙은이를 찾진 않았을 거고.”
“찾아뵌 목적이야 인사를 드리려는 게 맞지요. 다만, 뵌 김에 여쭐 것이 있긴 합니다만….”
“그렇소? 궁금한 것이 무엇이오? 내 숨김없이 다 털어놓으리다.”
숨김없이? 글쎄, 과연 그럴까?
머리 쓰는 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제갈현선이지만, 사마염을 상대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늙은 생강은 매운 법이니까.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근래에 납치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천의 홍숙희라는 자와 특임대의 송거이라는 대원이 실종됐었지요.”
“아? 그런 일이 있었소?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누가 감히 무림맹의 무사를 납치한다는 말이오?”
역시나… 시치미를 떼시겠다 이거지?
제갈현선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들고 온 패를 꺼내 놓았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특임대 대장을 불러 협조를 요청한 적이 있으시다 하던 데요? 송거이라는 이름을 꼭 짚어서 언급하셨다고… 허허, 우연이라고 보기엔 좀….”
“그런 일이 있었지. 내 사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거 쑥스럽게 됐구먼. 원로원 원주랍시고 사사로운 일에 특임대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니. 말로는 송거이가 하루 출근을 안 했다고 하더군. 납치된 것인지는 내가 알 도리가 없었소.”
“그러셨겠지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사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납치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 그건 또 무엇이오?”
“낙양 인근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현장을 분석한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사망자가 수십 명이고, 모두 산산이 분해되어 육젓이 되어있었다 하고요.”
“무어라? 누가 감히 그런 무도한 짓을!”
제갈현선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사마염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찾아온 목적은 이것이었다.
과연 그 대형 사건에 사마염과 문무대가 관여되어 있는지 알고자 했던 것.
하지만 사마염은 정말로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꾸며낸 표정이 아니었다.
“흠… 원주님께선 모르는 일이시군요.”
“당연히 모르는 일이지! 설마 문무대의 짓이라 생각하고 날 떠보러 온 거요?”
실제로 사마염은 모르고 있었다.
계획된 일이 아니었던 데다가, 아직 강한월의 보고도 받지 못했으니까.
“설마 문무대를 의심했겠습니까? 다만 원주님이 납치된 송거이를 언급하셨다기에 혹시 제가 모르는 정보가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지요. 무림맹의 모든 동향은 저에게 보고가 들어오는데, 유일하게 문무대만 보고가 없기도 하고….”
“총군사. 맹의 원로로서 충고 한마디 하겠소. 애먼 문무대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도대체 어떤 무공이기에 사람을 육젓으로 만들 수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좋을 거요.”
“조언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전문가들이 조사 중입니다. 워낙 드물고 특수한 모습이라… 무공의 연원을 파악하면 뭔가 잡히는 게 있겠지요.”
* * *
“대공녀님께 보고드립니다. 제물 확보에 나섰던 혈면조는 모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새하얀 가면을 쓴 중년인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눈앞의 여인을 몹시 두려워하는 듯했다.
“성전이 선포됐으니 당연히 순교했겠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에요. 어째서 성전 선포를 하게 되었는지, 적들은 누구인지 그걸 알아야죠.”
아름다운 궁장 차림의 여인은 용모처럼 목소리도 고왔다.
사내들의 눈길을 끌 모든 것을 갖춘 여인이었지만, 흰 가면의 중년인은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현장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무림맹의 조사단이 득실거리던 터라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흥, 변명은 듣기 싫어요. 어쨌거나 무림맹에서 조사단을 보냈다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일은 아니라는 거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도대체 누굴까요? 피의 세례를 받아 공력이 높아진 혈면조 오십 명이면 웬만한 문파 하나는 끝장낼 수 있는 전력인데….”
“대주.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건가요? 내가 원하는 것은 답이지 질문이 아닙니다.”
“아, 죄송합니다.”
“주의하는 게 좋을 거예요. 궁주님의 계획이 흐트러졌으니 분명 크게 문책이 있을 겁니다. 게다가 무림맹 영역에서 성전의 흔적을 남겼으니 그들도 조사를 시작하겠죠. 내가 대주를 감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제물 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다른 혈면조를 투입해서 계속해야 할지….”
“소용없어요. 제물의 준비과정에서부터 제사는 시작되는 법. 이미 한번 부정을 탔으니 이번 제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 이미 준비된 일곱 명의 제물은?”
“일일이 다 알려줘야 하나요? 쓸모도 없어진 것들을 놔둬서 뭐 하려고요?”
“네. 즉시 폐기토록 하겠습니다.”
“대주. 난 오늘 궁으로 돌아갈 거예요. 일을 망친 적들을 찾아내는 건 궁에서 따로 사람을 보낼 테니, 대주는 혈면 전사를 확충하는 데만 전력을 다하도록 하세요. 명심하세요. 영생궁이 천하 구원을 선포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 * *
열흘이 지났다.
무림맹의 조사단은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문무대에겐 평안한 시간이었다.
강한월은 매일 시간을 내어 원진탁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그날 밤의 소란을 목격한 탓인지, 무공을 배우는 자세가 제법 진지했다.
가급적 무림인이 되겠다는 생각도 접으면 좋겠지만, 그건 강한월의 기대일 뿐 원진탁의 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검술 지도를 끝내고 강한월이 문무대로 돌아오자, 제갈윤이 종이 몇 장을 들고 다가왔다.
종이에 그려진 풍경을 보니 무슨 용무인지 알 것 같았다.
“찾은 거냐?”
“아직 확실하진 않고요, 후보지를 몇 군데로 압축했습니다.”
제갈윤이 종이들을 펼쳐 놓는 사이 대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작품 품평회라도 하듯, 대원들은 소영영이 그렸던 그림과 제갈윤이 가져온 그림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우와, 이거 애매하네요. 이렇게 보면 이게 맞는 것 같고 또 저렇게 보면 저게 맞는 것 같으니.”
“원래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법이거든. 어쨌든 이 중의 하나는 맞을 거야. 이렇게 특이하게 생긴 봉우리가 많진 않을 테니.”
대원들이 고개만 갸웃거리자 제갈윤이 설명을 덧붙였다.
“맨 오른쪽 것은 청해의 만불산, 그 옆에는 산서의 봉우산, 그리고 광동의 청죽봉, 마지막으로 요녕의 하계산입니다. 자료를 뒤져 알아내는 것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이 중 어느 곳일지는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합니다.”
“어머? 그럼 난 광동이나 요녕으로 갈 거야. 거기 가면 바다 볼 수 있지?”
소영영이 펄쩍 뛰며 좋아했다.
하지만 강한월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고민할 필요 없다. 광동의 청죽봉일 거야.”
“네? 아니, 대장이 어떻게 아시는 건데요?”
“제갈. 연쇄 실종 사건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잊은 거냐?”
“아! 광동의 연철륭부터 시작이었죠. 그다음으로 호남, 강서, 호북으로 북진했어요. 맞네요! 사건의 경로로 볼 때 영생궁의 근거지가 광동 인근일 확률이 제일 높네요!”
광동이라.
낙양에서 그곳에 가려면 호남성을 거쳐야 했다.
강한월은 잘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조만간 호남에 갈 일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계산해보니 얼추 시점도 맞을 것 같았다.
“며칠 있으면 원진탁의 검술 지도가 끝난다. 그 일만 마치면 바로 출발할 테니 준비하도록.”
“전부 다 가는 건 아니죠? 누가 갈지 정해주셔야죠.”
입 모양으로 바다를 계속 외치며 소영영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바다를 볼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상대는 피의 세례를 받고 성전을 구사하는 자들이다. 몹시 위험할 거야. 이번에는 무공에 특화된 대원들만 가도록 하겠다.”
강한월, 광군영에 이어 곽철이 거명된 것까지는 자연스러웠는데….
진가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공이 강한 사람들 틈에 어째서 자신이 뽑혀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