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기연 도둑 (2)
* * *
무슨 이유인지는 알지 못했다.
막연하지만 강한 끌림.
광군영은 자신도 모르게 백골 가까이 다가갔다.
진가린은 다른 백골 쪽으로 움직였다.
광군영과는 다르게, 자석이 끌어당기는 듯한 이끌림은 아니었다.
그저 다소곳이 앉은 백골이 친근하게 느껴졌을 뿐.
광군영은 멍하니 백골을 바라봤다.
백골의 주인이 살았던 파란만장한 삶이 전해지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오랜 세월 풍화되었지만, 아직도 뼛속 깊숙이 사무친 마기가 남아있었다.
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분은 천마신교의 선배라는 것을.
진가린이 백골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곁에 앉으면 백골의 주인이 무언가를 말해줄 것 같았다.
그녀가 앉은 바위 표면이 울퉁불퉁했다.
“선배… 여기 글이 쓰여 있어요.”
* * *
강한월이 향한 오른쪽 길.
약초꾼 노인과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며 계속 전진했다.
이 길이 아닌가? 다시 돌아가 왼쪽 길로 가봐야 하나?
노인의 망설임이 시작될 때, 강한월이 걸음을 멈췄다.
그가 한쪽으로 화섭자를 비춤과 동시에 곽철의 놀란 외침이 터졌다.
“아이, 스벌. 깜짝이야!”
불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그것.
한쪽 벽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은 백골이었다.
어둠 속에서 노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재빨리 눈알을 움직이는 것이,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잠시 눈앞의 광경을 주시하던 강한월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백골 앞에 놓여있는 수십 개의 천 조각을 집어 들려 할 때,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그 손 멈추지 못할까!”
* * *
“이분들은 천마 백무진이라는 분과 검선 이검학이라는 분이네요.”
광군영은 백골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진가린이 읽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백무진.
천마신교의 제십이대 교주.
역대 천마는 모두가 최강의 고수였지만, 백무진은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천마신공을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시킨 장본인이자, 초대 천마를 제외하고는 신교 역사상 가장 강했다고 알려진 인물인 것이다.
마도(魔道)의 끝에 다다라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이 신교의 전승이었는데….
“천마와 검선은 천하를 제패하는 것 따위에는 더 이상 흥미가 없었데요. 오로지 무도(武道)의 끝을 보는 것에만 관심이 갔을 뿐. 격을 맞출 상대는 서로밖에 없었고, 자신들의 대결을 지켜봐 줄 수준에 오른 것은 소림의 원법대사가 유일했답니다.”
“그럼, 두 분이 논검(論劍)을 하며 세월을 보내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신 건가?”
“네. 계속되는 비무에 내상은 쌓여갔지만, 끝없이 샘솟는 새로운 발상을 시험해보기 위해 치료도 마다하고 다시 대결을 펼쳤데요. 아마도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들의 경지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
“그리고… 연이 닿는 자에게 신물(信物)을 남기신다네요.”
신물?
순간 광군영의 머릿속에 강한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발견될 보물은 검과 팔찌, 그리고 책.
백무진… 팔찌… 설마?
광군영이 지체 없이 기감을 퍼뜨렸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맞다면, 틀림없이 마공의 파장에 반응할 거라 기대하면서.
그리고 몇 장 정도 떨어진 동굴의 구석에서 반응이 왔다.
화섭자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 아직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그곳에 있었다.
떨리는 걸음으로 다가간 광군영이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찬란한 금빛을 뿌리는 팔찌였다.
알 수 없는 고대어와 함께, 마신이 잡귀를 물리치는 모습이 양각된.
틀림없었다.
대대로 천마의 신물이었다가, 백무진과 함께 사라졌던 신교의 보물.
마신환(魔神環).
그 순간 진가린도 검선의 유물을 찾았다.
한 자루 검이었다.
검집에서 뽑히는 순간 따스한 예기를 조용히 드러내는 검.
긴 세월 동굴 속에 방치되었음에도, 검날은 거울처럼 빛났다.
진가린은 검이 마음에 들었다.
보통의 검보다 검신이 얇고 무게가 가벼웠다.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드는 것이, 왠지 잃어버렸던 자신의 검을 찾은 듯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이런 보물을 내가 어찌 감히….’
검이 놓였던 자리에는 짧은 글이 쓰여 있었다.
[ 백학(白鶴)이 너를 자유로 이끄리라.]
아마도 검의 이름이 ‘백학’인 것 같았다.
* * *
“내놓아라. 그건 너희가 함부로 탐낼 물건이 아니다.”
노인은 준엄한 표정으로 꾸짖듯 말했다.
목소리가 하도 차가웠기에, 흑도의 거친 사나이 곽철은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뭐요? 이 영감이 갑자기 정신이 나갔나? 길거리에 떨어진 물건은 먼저 줍는 놈이 임자라는 걸 모르는 거요?”
“길거리에 떨어진 물건?”
노인의 얼굴이 벌게졌다.
무림에 피바람을 몰고 올 수도 있는 마불진경(魔佛眞經)을 그따위로 표현하다니!
소림 신승 원법대사가 천마 백무진과 검선 이검학의 논검에서 배운 심득에 장대한 소림 무공의 정수를 덧붙여 정리한 것이 바로 이 마불진경이었다.
이것이 소림에 전해진다면, 역근세수경과 함께 소림의 보물 일 순위에 오를 것이 분명한.
모든 무림인이 주저 없이 목숨을 걸 보물을 두고… 주운 놈이 임자라고?
“이건 저희에게 양보하시죠. 노인장이 원하는 것은 귀한 약초 아닙니까? 약초나 영약이 발견되면 그건 모두 노인장께 드리겠습니다.”
강한월이 제법 상식적인 제안을 던졌다.
하지만 이미 딴생각 중인 노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동료 혈승의 제자일 수도 있지만, 두 녀석을 뭉개버리고 진경을 빼앗을까?
쉽게 결심을 못 하는 건 진경의 상태가 마음에 걸려서였다.
원법대사가 승복 조각에 적어 놓은 진경은 오랜 시간 부식되어 불안정한 상태.
혹시라도 싸우는 와중에 장력의 여파라도 미치면 가루로 변할 것이 염려되었다.
“약초꾼이 평생 풀뿌리만 챙기라는 법은 없지. 일단 절반을 내놓아라. 나머지는 이곳을 나가서 결론을 보도록 하자.”
“뭐, 정 원하신다면.”
* * *
광권영과 진가린은 동굴의 바닥을 파 두 개의 봉분을 만들었다.
나름 정성을 기울였지만, 그래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무덤의 겉모습에 신경 쓸 분들은 아닐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이제 대장 찾으러 가요.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했어요.”
광군영은 바닥에 놓여있던 마신환을 집어 들었다.
순간 손바닥으로 짜릿한 느낌이 전해져, 하마터면 팔찌를 놓칠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팔찌를 손목에 찼다.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는 것처럼, 팔찌가 우우웅 진동했다.
“가자.”
구불구불한 길을 거슬러 걸었다.
한참을 올라와 갈림길에 도착하자, 오른쪽 길에서도 인기척이 들려왔다.
“여어, 다시 만났네. 별일 없었고?”
마치 헤어진 지 며칠은 된 것처럼 곽철이 반갑게 인사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쪽은요?”
“우린 일이 좀 있었지. 글쎄 노인네가 쓸데없이 욕심을 부리지 뭐야.”
시비라도 거는 것처럼 곽철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노인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광군영의 팔찌와 진가린의 검에 온통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자네들. 그새 못 보던 팔찌와 검이 생겼군.”
“이거요? 이거 원래 저희 건데요. 아까부터 지니고 있던 건데….”
“흥, 되지도 않는 소리.”
노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투는 진작에 하대로 바뀌어 있었고, 약초꾼의 순박한 표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주인을 잘못 만난 보물은 빛을 잃지만, 주제를 모르고 보물을 탐내는 자는 목숨을 잃는 법.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나에게 넘겨라.”
“아니 진짜! 가만히 있으니까 우리가 가마니로 보이나? 자신 있음 빼앗아 보시던가. 쫄리면 뒤지시고!”
곽철이 다시 한번 발끈했다.
여전히 담담한 것은 강한월뿐.
“예사 약초꾼은 아니신 듯한데…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너희가 감당 못 할 물건이라는 말은 사실이다. 진심 어린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뭐 좋다. 우선 나머지 천 조각들을 나에게 넘겨라.”
노인은 우선 마선불진경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조심스레 다뤄야 할 천 조각들만 손에 쥘 수 있다면, 더 이상 활동의 제약은 없을 터.
마신환이나 백학은 천지가 진동하더라도 끄떡없을 테니까.
“이것만 드리면 되는 겁니까?”
강한월이 노인의 제안에 응할 듯 말하자 놀란 것은 광군영과 진가린이었다.
대장은 저게 얼마나 귀한 건지 모르는 걸까?
—대장. 그건 아마도 원법대사가 남긴 무경(武經)일 거야. 절대로 넘기면 안 돼!
광군영의 다급한 전음이 귓속으로 파고들었지만, 강한월은 못 들은 척 천 조각들을 넘겼다.
노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가지고 있던 천 조각들과 합하여 조심스레 품속에 넣은 후, 노인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광군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강한월은 아무 말 없이 노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동굴 입구까지 절반쯤 남았을까?
묵묵히 걷던 노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처음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네. 자네들이 내 동료의 제자들이 아닐까 생각했지.”
갑자기 속마음을 전하는 노인의 목소리.
차분한 말투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아까 갈림길에서 다시 만나는 순간, 그럴 리 없다는 걸 깨달았네. 그 팔찌. 천마신공을 제대로 익힌 마인이 아니면 감히 몸에 지닐 수 없는 물건이거든.”
“확실히… 그런 물건이죠.”
“역시 알고 있었군. 그렇다면 더 이상 부담이 없지. 작별할 시간일세.”
‘작별’이라는 단어가 내뱉어지는 순간, 무언가를 뒤로 던지며 노인이 빛살처럼 앞으로 뻗어 나갔다.
저건?
까맣게 빛나는 호두알만 한 물체.
안색이 변한 강한월이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펼치며 다급히 외쳤다.
“조심해!”
콰아앙!
강한월의 호신강기에 부딪히고 바닥을 데구루루 구르던 물체가 폭발했다.
어느새 강한월 곁으로 다가온 광군영이 함께 호신강기를 펼쳤다.
그들이 두 겹으로 펼친 호신강기는 곽철과 진가린까지 감싸 보호했지만, 동굴 일부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돌무더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울리고 뿌연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먼지는 한참이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동굴 길을 막아버린 바위 조각들을 바라보며 강한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노인이 벽력탄(霹靂彈)을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건 혈교가 사용하던 무기는 아닌데…?
“대장, 이제 어떡하죠?”
머리에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진가린이 물었다.
노인을 놓친 거라 생각했는지 대원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기다려보자. 그자가 다시 올 거야. 보물이 우리 손에 있으니.”
과연, 잠시 후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감도로 볼 때 바위가 길을 막은 것은 일 장이 채 안 되는 듯했다.
“놀랐지? 이건 산서 벽력당의 벽력탄이라는 거다. 너희는 모르겠지. 앞으로 최소 백 년은 지나야 개발되는 거니까. 흐흐흐, 나는 머리를 쓸 줄 알거든. 다른 자들은 과거의 역사나 무공 따위만 기억 속에 처넣고 왔지만 나는 다르다. 벽력탄의 제조법, 그보다 더 뛰어난 천뢰(天雷)의 제조법까지 기억에 담아두었지.”
“당신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고…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요?”
“흐흐흐, 뭘 당연한 걸 묻나? 돌 조각 몇 개만 드러내면 약간의 틈이 생길 터. 팔찌와 검을 내놓아라. 그럼 목숨은 살려주겠다.”
“싫다면?”
“시간의 차이일 뿐 결과는 똑같다. 너희가 그 속에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이 정도 바위를 우리가 뚫지 못할 것 같소?”
“말했지 않나, 나에겐 천뢰가 있다고. 최소로 잡아도 벽력탄 열 배의 폭발력이다. 너희는 가루가 될 거고, 난 그 후에 보물만 챙기면 돼. 마신환과 백학은 폭발 속에서도 멀쩡할 테니.”
안타깝게도 노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천뢰는 그 정도로 위험한 물건.
그 때문에 벽력당이 멸문당했을 정도로.
강한월이 아무런 답을 못하자, 노인은 완벽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동굴의 입구 쪽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준엄한 호통이 터져 나왔다.
“누가 감히! 황실의 허가 없이 화약을 사용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