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생명원의 관음보살 (1)
* * *
흐아암~
곽철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동네 노인들과 아낙들 틈에 섞여 줄을 선지 벌써 두 시진.
슬슬 좀이 쑤셔왔다.
그래도 아침부터 기다린 보람이 있어, 이제 두세 명만 지나면 자신의 차례.
“다음 분, 들어오세요.”
드디어 차례가 왔다.
혹시 눈곱이라도 끼진 않았을까 마른세수를 하고, 머리 매무새도 다시 점검한 곽철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보살님, 안녕하십니까? 또 찾아왔습니다.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것 같아서….”
“아, 곽칠 씨. 잘 오셨어요. 그런데 왜 자꾸 보살이라고 부르세요? 제 이름은 옥수라니까요. 정옥수.”
“그게… 사람들이 모두 관음보살님이라고 부르길래.”
“그건 마을 분들이 장난치는 거예요. 자꾸 그러면 제가 부담되니까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정옥수 소저.”
곽철이 쑥스러워하며 이름을 부르자, 정옥수가 활짝 웃었다.
복사꽃이 만개하는 듯한 밝은 웃음이었다.
‘관음보살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어디가 아픈 거예요? 보기엔 건강하신 것 같은데….”
“그게, 실은 소화가… 편두통도 있습니다. 잠을 자도 피곤이 안 풀리고, 어깨도 항상 뻐근한 것이….”
“그래요? 일단 제가 진맥을 하고 침을 놔 드릴게요. 그리고 처방을 써드릴 테니 끝나고 약을 타가세요. 기가 허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거 매번 죄송해서. 그런데 약값은 얼마나…?”
“저희 돈 안 받는 거 아시잖아요. 곽칠 씨는 건강이나 빨리 회복하세요.”
* * *
일행이 광동 청죽봉에 도착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열흘 전.
인근 마을을 돌며 수소문을 했으나 ‘영생궁’이라는 이름의 단체는 찾지 못했다.
대신 ‘생명원’이라는 의원이 강한월의 눈길을 끌었다.
무료로 환자를 치료하고 때때로 먹을 것도 나눠주는 구호소인데, 인근에 몇몇 지점이 있었다.
분명 선한 일.
하지만 민초들에게 다가가는 형태가 신경을 자극했다.
그 때문에 지난 며칠간 환자인 척 가장하고, 지점 몇 곳을 염탐했던 것이다.
늦은 오후, 한 손에 약 꾸러미를 든 곽철이 객잔으로 돌아왔다.
몇 시진 동안 환자들 틈에 섞였다 온 것 치고는 표정이 밝았다.
“곽 오라버니, 오셨어요? 손에 든 거는 뭐예요?”
“아, 이거 보약이다. 내가 기가 허한 것 같다고.”
“하하, 무슨 기가 허해요. 아픈 척하느라 일부러 기맥을 막아놔서 그렇죠.”
“그렇긴 해도, 정성이 가득 담긴 약이니까 열심히 먹어야지.”
“정성이 가득? 어머, 오라버니 그새 반한 거예요? 그 여자 소 선배보다 예뻐요?”
“무, 무슨 그런 소리를! 나, 난 그저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진가린이 곽철을 놀리는 사이, 강한월과 광군영도 객잔으로 돌아왔다.
광군영의 손에도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하하, 대장만 약을 못 받았네요. 생명원이 사람 차별하는데요.”
“그러게. 나도 좀 서운했다.”
웬일로 진가린의 농담을 강한월이 받아줬다.
광군영은 피식 웃었지만, 곽철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대장. 이번엔 아무래도 잘못 짚은 것 같소. 내 며칠을 들락거리며 꼼꼼히 살펴봤는데, 생명원은 착한 사람들이 맞아요.”
“그렇던가?”
“그렇소. 내가 흑도 생활 십 년이오. 나쁜 놈들은 눈빛만 봐도 알지. 나를 치료한 정옥수라는 여의원은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었소.”
“글쎄.”
“대장은 내 눈을 못 믿는 거요?”
“못 믿는 건 아니고… 각각의 지점이 하루 이백 명의 환자를 받더군. 대부분 침과 뜸으로 치료를 했지만, 이 할 정도는 약을 타갔고. 지점이 다섯 곳이니 하루 천 명, 그리고 약은 이백 명 치. 과연 얼만큼의 자금이 있어야 이런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마음씨 좋은 거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소?”
“그럴지도. 어쨌건 추측만으로는 알 수 없으니 조사를 더 해볼 수밖에.”
* * *
저녁 식사 후. 곽철은 홀로 객잔을 나섰다.
생명원을 염탐해볼 생각이었다.
혈승과의 연관된 점을 찾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곽철은 정옥수처럼 선한 여인이 의심받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명원에 도착한 곽철은 도둑고양이처럼 지붕 위로 스며들었다.
대들보 위에 누워 귀를 기울이니 정옥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내일은 닭죽을 좀 끓여야겠어요. 날은 추워지는데 몸이 허한 환자들이 많아서요.”
“아이고, 의원님. 먹을 것 푼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러십니까? 다음에 하시죠. 아직 본원에서 보내주는 물품이 도착하지 않아 저희 먹을 것도 간당간당합니다.”
“본원에는 제가 독촉을 할게요. 그래도 닭죽은 준비해주세요. 저희는 하루 이틀 굶어도 큰 문제 없잖아요.”
아, 이 얼마나 고운 마음씨인가.
정옥수에 대한 그의 믿음이 한결 더 두터워졌다.
대장도 직접 와서 겪어보면 내 말을 믿을 텐데….
“의원님. 중환자들은 예정대로 이틀 후에 본원으로 옮기는 거죠?”
“네. 일정은 변동 없어요. 저희가 치료 못 하는 환자들은 원주님께 맡겨야죠.”
본원? 원주님이라….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
정옥수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곽철의 그림자가 스르륵 지붕에서 사라졌다.
* * *
객잔으로 돌아온 곽철은 즉시 듣고 온 내용을 풀어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도 덧붙였다.
중환자로 위장하고 본원을 찾아가면 의심스러웠던 부분이 모두 해소될 거란 이야기였다.
“그런데 우리 중에 누가 중환자 역할을 하죠? 아파 보이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 더 이상 배탈, 소화불량… 이런 거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진가린이 한 명 한 명 둘러보며 말했다.
무쇠라도 씹어 삼킬 듯 건강미 넘치는 사내들.
기혈을 틀어막고 열나는 시늉을 한다고 해서 중환자로 보일 것 같진 않았다.
“적임자가 한 명 있다.”
“누구요? 설마 저는 아니겠죠? 전 혈색이 너무 좋아서 환자 역할은 좀….”
“너 말고. 옆방 노인.”
“어? 괜찮겠어요? 그 노인이면 딱이긴 하지만….”
지금 말 혈승의 상태는 사실 중환자와 다를 바 없었다.
강한월의 독문 금제법에 의해 기혈을 봉쇄당해 젓가락이나 겨우 드는 상태.
아혈(啞穴)을 짚어 말을 못 하게 만들고, 은기환(隱氣丸)을 먹여 기의 흔적을 감싸 덮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좀 꺼림칙하기는 했다.
생명원이 혈승과 관계가 있다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특수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험이라면 모험.
하지만 나쁠 건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또한 증거가 될 테니까.
* * *
다음 날, 곽철은 다시 생명원을 찾았다.
등에는 말 혈승을 업고 있었고, 진가린도 함께였다.
“안녕하세요, 곽칠 씨. 또 오셨네요?”
“네, 보살… 아니, 정 소저. 오늘은 제가 아니라 숙부님 때문에 왔습니다.”
“아, 업고 계신 분이 숙부님인가요? 일단 방 안으로 모시세요.”
곽철이 노인을 눕히는 동안 진가린은 정옥수를 살폈다.
흠, 곽 오라버니가 쩔쩔맬만하네.
“상태가 심각한데… 언제부터 아프신 거죠?”
노인의 맥을 짚으며 정옥수가 물었다.
곽철은 직접 대답하려다가, 진가린의 어깨를 툭 쳤다.
“련아. 숙부님 상태는 네가 잘 알지 않느냐? 어서 말씀드려라.”
“안녕하세요. 전 곽칠 오빠 사촌 동생인 곽련이에요. 아버님이 아프신지 꽤 되었는데… 그런데 고명한 의원이면 묻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련아! 무슨 그런 무례한 말을!”
“괜찮아요, 곽칠 씨. 아버님 걱정이 되니 의원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죠. 다른 환자 가족들도 마찬가지인걸요.”
곽철은 진가린에게 눈을 부라렸지만, 정옥수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흥, 딱 봐도 여우네.
입을 삐죽 내민 진가린이 못 이기는 척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님 아프신지는 일 년 좀 넘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심해지신 건 한 달 남짓이고, 며칠 전부턴 의식도 없으세요. 곽칠 오빠가 이곳에 오면 치료받을 수 있다고 해서….”
정옥수는 말없이 진맥에 집중했다.
고운 눈살을 간혹 찌푸리는 것이, 꽤나 고민스러운 듯했다.
“어르신의 상태가 매우 특이하네요. 기맥 여러 곳이 막혀 있고… 가슴엔 울화가 가득한 것 같아요. 일반적인 병증은 아닌데….”
“혹시 절맥이나 뭐 그런 건가요? 설마 이대로 돌아가시는 건 아니겠죠?”
“몹시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치료를 해야죠.”
“치료할 방법이 있군요!”
“아니, 제 실력으론 불가능해요. 전 처음 접해보는 병증이라….”
진가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이거 여차하면 눈물까지 흘리겠다고 곽철이 내심 감탄할 때, 드디어 기대하던 답이 들려왔다.
“생명원의 원장님께 모시고 가야겠어요. 그분이라면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아! 원장님께 치료받을 기회를… 너무 감사합니다.”
곽철과 진가린의 얼굴에 기쁜 빛이 번졌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정옥수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제 일인걸요. 오늘은 객방에서 쉬세요. 내일 본원으로 출발합니다.”
“저희가 함께 가도 되는 거겠죠?”
“그럼요. 중환자인데 돌볼 사람이 같이 가야죠. 실은 저도 본원에 일이 있어 같이 갈 겁니다.”
* * *
아침부터 생명원 마당은 중환자와 가족들로 붐볐다.
환자들은 스무 명가량, 동행할 가족들은 마흔 명쯤 되었다.
병색이 완연했음에도 눈빛에는 활기가 도는 것이, 생명원 본원에 거는 기대가 큰 것 같았다.
잠시 후, 문 앞에 몇 대의 마차가 나타났다.
생명원 일꾼들이 나서서 사람들을 마차에 태웠다.
환자들은 일 호 마차와 이 호 마차, 보호자들은 삼 호와 사 호 마차였다.
특별히 타 지방 사람들은 사 호 마차에 태웠기에, 곽철과 진가린도 사 호 마차에 올랐다.
마차 지붕에 짐들을 올리는 소리가 들렸고, 마부들이 말과 마차를 점검했다.
얼추 출발 준비가 갖춰졌다 싶었을 때, 마차의 문이 열리며 정옥수가 곽철을 찾았다.
“곽칠 씨. 죄송하지만 저와 같은 마차로 가실 수 있으세요? 일손이 부족해서 도움을 좀 받았으면 해서요.”
“아! 당연히 제가 도와야죠.”
진가린도 따라 내리려고 했으나, 정옥수가 원하는 건 곽철 한 명뿐이었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빈자리가 하나뿐이라.”
뭐야 이거?
조금 찜찜했지만, 일단은 따를 수밖에 없는 일.
입을 삐죽 내민 진가린이 마차를 옮겨 타는 곽철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오빠! 조심해서 가세요.”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
정옥수도 마차에 오르려고 하는데, 마부 한 명이 다가오더니 귓속말을 건넸다.
“사 호 마차는 어디로 보낼까요?”
“지금 훈련생들 실습 기간이죠?”
“그렇습니다. 지난달부터 실습 중입니다.”
“그럼 사 호 마차는 훈련소로 보내세요. 신선한 피가 필요할 테니.”
목적지를 지시하는 정옥수의 입가에 복사꽃처럼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 * *
강한월과 광군영은 언덕 위에서 생명원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마차들이 줄줄이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슬슬 지루하던 참인데 잘됐군. 우리도 출발하지.”
“그래야지. 백 장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가자.”
은밀한 신법을 펼친 그들의 모습이 언덕 위에서 사라졌다.
환자를 태운 마차였기에 속도는 빠르지 않았고, 뒤따르는 입장에서도 꽤나 느긋한 추격이었다.
하지만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두 시진 정도 달렸을 때 골치 아픈 문제에 봉착했다.
산길을 한참 달리자 세 갈래 길이 나타났는데, 혈승 노인과 정옥수 그리고 진가린의 마차가 각기 다른 길로 접어든 것이다.
“대장, 어떡하지? 한쪽은 포기해야 할 것 같은데.”
“광군영. 노인이 탄 마차를 쫓아. 난 정옥수와 곽철을 따라가겠다.”
눈살을 한차례 찌푸린 강한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결정을 내렸다.
“가린이가 검도 안 가지고 갔는데, 혼자서 괜찮을까?”
“강한 아이니까… 믿어봐야지.”
진가린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이번엔 제발 나서지 말아야 할 텐데.’
소용없을 것이 뻔한 기원을 하며, 강한월이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