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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27화 (27/210)

027화. 생명원의 관음보살 (2)

* * *

마차가 갈림길로 들어서자 곽철의 표정에 불안감이 감돌았다.

사방이 막혀 밖을 볼 수 없었지만, 마차들이 서로 다른 길로 갈라졌다는 건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정 소저. 마차들이 서로 다른 길로 가는 것 같은데요?”

“맞아요. 환자들은 우선 의방으로 가서 기초적인 검사를 받을 거예요. 보호자들은 본원의 객방으로 가는 거구요. 환자들의 안정을 위해 일부러 거리가 좀 떨어진 곳에 장소를 마련했죠.”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제 동생이 탄 마차도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던데….”

“호호, 곽칠 씨는 귀도 밝으시네요. 본원의 객방이 비좁아서 타지에서 온 분들은 다른 숙소에 모시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며칠 안에 다시 만나게 해드릴게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자아이라 혼자 두기 불안해서요.”

“걱정 마세요. 저희 생명원이 관장하는 곳은 모두 철저히 관리되니까요.”

언제나처럼 그녀의 표정과 음성은 신뢰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정옥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곽철이 받아들인 의미와는 좀 달랐지만, 분명 모든 마차는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다.

* * *

진가린이 탄 마차는 한참을 더 달려 깊은 계곡으로 들어섰다.

계획했던 곳에 다다른 것인지 마부가 익숙한 손길로 손잡이를 당겼고, 그러자 마차 벽에서 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이 놀란 것도 잠시.

하나둘씩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뭐야 이거? 미혼약(迷魂藥)인가?’

즉시 숨을 멈춘 진가린은 아직은 멀쩡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숨을 참을 수는 없는 법.

선택을 해야 했다.

지금 당장 마차 벽을 부수고 뛰쳐나갈지, 아니면….

‘하여간 곽철 오라버니는 보는 눈이 꽝이라니까.’

진가린은 미혼약이 섞인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 * *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혈승 노인이 탄 마차에서도 뿌연 연기가 뿜어졌다.

생명원의 일꾼들이 마차 문을 열었을 때는, 모두가 기절한 듯 잠에 빠져 있었다.

“시간이 없다. 빨리빨리 옮겨. 한 시진 내에 판별과 분류를 마쳐야 한다.”

의원 복장을 한 사내의 지휘에 따라 환자들이 옮겨졌다.

짐짝을 옮기는 듯한 거친 손놀림을 보니, 적어도 환자를 살뜰히 보살피는 곳이 아님은 분명했다.

일각이 채 안 되어 환자들과 일꾼들이 모두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멀찍이 떨어진 나무 뒤에서 광군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한번 살핀 그의 신영이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어느새 건물 지붕 위에 나타났다.

건물 주변에 경비 무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실력으로는 천마신교의 고절한 은신술을 감지할 수 없었다.

환자들의 기척을 찾아 광군영이 스며든 곳은 환자 판별실.

수십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널따란 탁자 위에 환자들이 일렬로 뉘어졌다.

미동도 않는 몸뚱이들은 마치 시체 같았다.

“빨리 시약을 써서 피를 검사한다. 양성인 자가 있으면 빼내고 나머진 ‘치료’와 ‘방치’로 나눠.”

“대주님. 비율은 몇 대 몇으로 할까요?”

“일 한두 번 해보나? 청죽봉 인근 환자는 셋 중 둘은 살리고, 타지 환자는 살릴 필요 없다. 분류 끝내면 얼추 절반씩 될 거다.”

대주라는 자의 지휘에 따라 몇몇 사내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환자들의 피를 뽑아 작은 자기병에 담는데, 아마도 대주가 말했던 시약 같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자기병 하나에서 붉은 거품이 끓어올랐다.

“대주님! 여기 반응하는 피가 있습니다!”

“오! 이번 환자 중엔 그래도 하나는 건졌군. 누구의 피더냐?”

“여기 이 노인입니다. 육 번 환자.”

천장 위에 은신해 있던 광군영이 아래쪽을 살폈다.

‘이런 제길….’

환자들 머리맡에 놓여있는 번호표.

육 번 환자는 바로 말 혈승 노인이었다.

* * *

곽철과 정옥수가 탄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 안이 꽤나 답답했던 듯,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내렸다.

곽철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 중턱을 깎아 만든 넓은 공터에 들어선 여러 채의 건물들.

꽤나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옥수는 감탄한 듯한 곽철을 보고 슬며시 미소 짓더니,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오시느라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 일단 숙소로 안내할 테니 짐을 푸시고….”

“보살님. 그보다 저희 형님을 먼저 볼 수 없겠습니까? 많이 아프신데 탈 없이 도착하셨는지 걱정이 돼서요.”

사내 하나가 정옥수의 말을 끊고 질문을 던졌다.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안 돼요. 며칠 간은 저희 생명원의 의원들 외에는 아무도 환자를 만날 수 없답니다. 중환자들은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이해해 주시겠죠?”

기대했던 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안이 가중된 건 아니었다.

생명원, 그리고 정옥수는 꽤나 신뢰할 만했으니까.

“이곳의 의원들은 최고의 실력자입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원 원주님께서 직접 치료를 하실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시고, 기다리는 동안 여러분은 여러분이 할 일을 해주시면 돼요.”

“우리가 할 일도 있는 겁니까?”

환자를 치료해주는 대신, 농사일이라도 시키려나 하고 한 아낙이 물었다.

“힘든 일은 아닙니다. 일이라기보다는 여러분이 적적할까 봐 만든 소일거리라고 해야죠. 우리 생명원의 활동에 대해 소개 드리는 자리가 몇 번 있을 거고, 다 함께 환자들의 완치를 위해 치성을 드리는 행사가 있을 거예요.”

사람들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환자를 따라온 객식구마저 이처럼 알뜰하게 챙겨주다니.

“지루할 수도 있는 행사지만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해요. 혹시 모르잖아요? 여러분도 생명원의 가족이 되어 함께 일하게 될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말이었고, 역시나 반응은 뜨거웠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정옥수가 다시 한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 그런데 정 소저. 제 동생 곽련은 언제쯤….”

“아, 그렇죠. 걱정하지 마세요. 빨리 만날 수 있게 조치를 해볼게요.”

걱정 마라. 조만간….

또다시 반복되는 말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친절했지만, 이번엔 곽철도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생명원 사람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머뭇거리며 맨 뒷줄에서 따라가던 곽철이 고개를 돌려 정옥수를 바라봤다.

복사꽃 같은 아름다운 미소.

저런 미소를 가진 여인이… 설마, 아니겠지.

모두가 건물 안으로 사라진 후.

지금껏 조용히 서 있던 안내원 하나가 정옥수에게 다가왔다.

“혹시 저들 중 눈여겨보신 사람이 있는지요?”

“이번엔 다들 평범하구나. 그나마 곽칠이라는 자만 몸이 쓸만한 것 같아.”

“알겠습니다. 그럼 곽칠 그자는 특별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평소처럼 처리하면 될 거야. 나는 원주를 만나러 가보겠다.”

정옥수가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진 나무 위에서 은밀한 그림자가 그녀를 따라 이동해갔다.

* * *

진가린이 눈을 떴다.

골치가 지끈거렸지만, 그 외에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이 정도면 다행이랄까.

좌우를 살폈다.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두침침한 공간.

창고나 지하 감옥이나 뭐 그런 곳 같았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쑤셔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주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마차는 세 갈래 길에서 찢어졌다.

뒤를 쫓던 것은 대장과 광 선배 단 두 명.

누구를 쫓아갔을까?

혈승 노인은 당연한 거고… 정옥수일까 아니면 나일까?

사실 답은 뻔했다.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는 걸 깨달은 진가린이 몸을 일으켰다.

벽을 두드려보고, 단단히 잠겨 있는 문도 확인했다.

검을 안 들고 왔기에, 혹시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손에 쥘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아. 싸움은 원래 맨주먹이 최고니까.’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사람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짐이 될지,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 이곳은 어디요?”

첫 번째 사람이 눈을 뜨자마자 한 말이었다.

“왜 우리를 감금한 거요?”

진가린이 답을 줄 수 없는 질문이었고.

“머, 먹을 것을 좀….”

이건 그녀가 하고 싶던 말이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끼이익.

등 뒤로 검을 맨, 눈빛이 제법 흉흉한 자들이 나타났다.

진가린도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들어대는 통에 입을 열 틈이 없었다.

요약하자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냐’, ‘도대체 언제 풀어줄 거냐’였는데….

역시나 사내들은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먹을 것을 줬다.

커다란 광주리 몇 개를 앞에 놓더니 다시 문을 닫고 나갔는데, 광주리 안에는 꽤나 근사한 먹거리가 가득 들어있었다.

“와~ 방법은 좀 거칠지만, 그래도 손님 대접이 나쁘지 않은데요?”

“그렇구먼. 이렇게 먹여주는 걸 보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꺼림칙했지만, 대부분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야?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탈출할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다들 정신 차려요! 납치범들이 괜히 이런 음식 줬을 것 같아요?”

진가린의 일갈에 음식을 집던 사람들이 멈칫했다.

몇몇은 입안에 넣었던 음식을 급히 뱉었고, 파리해진 안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독이라도 들었다는 거요?”

“독은 무슨. 그럴 거면 마차 안에서부터 독을 풀었겠죠.”

“그럼 뭐가 문제요?”

“감옥 같은 분위기. 뜬금없는 진수성찬. 뭐 생각나는 거 없어요?”

“그… 그럼 이 음식들이?”

“맞아요. 살인자들의 쥐꼬리만 한 양심. 사형수들을 위한 마지막 식사겠죠.”

사람들이 충격에 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모두들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때….

한심하다는 듯 혀를 몇 번 차준 진가린이 음식을 집어 들었다.

뭐, 독이 들진 않았을 테니까.

* * *

혈승 노인은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실험실인가?

광군영은 본 적도 없는 기구들이 가득 들어찬 방이었다.

의원들이 노인의 팔에 굵은 바늘을 꽂았다.

연결된 대롱을 통해 피가 흘러내렸다.

“너무 많이 뽑진 말라고. 이번 실험에 필요한 정도만 뽑아. 귀한 피를 가진 노인이니 잘 살려놔야 한다.”

“알겠습니다. 보약도 지어서 먹이겠습니다.”

의원 하나가 대롱에 연결된 장치를 조작해 피의 양을 조절했다.

대롱을 타고 흐른 피가 투명한 병 안으로 흘렀다.

여러 사람의 피를 모아 놓은 것인지, 병 안에는 검붉은 액체가 출렁였다.

노인을 남겨두고 의원들이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천장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르륵 내려왔다.

광군영은 노인의 팔에 연결된 대롱을 살폈다.

또르르 흐르는 피.

이들이 혈승과 한패라는 심증이 굳어졌다.

‘이제 어쩐다….’

의원들의 말로 볼 때, 당분간 노인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고.

밖으로 나가서 생명원의 원주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도 피를 많이 뽑혀 좋을 건 없겠지.’

광군영이 대롱에 달린 장치를 만졌다.

그런데 잘못 조작했는지, 병 속에 있던 액체가 역류하여 노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흠칫 놀란 광군영은 재빨리 장치를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레 작동시켰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야, 원하는 만큼 피의 양을 맞출 수 있었다.

‘휴우. 이런 일은 내 체질에 안 맞는다니까.’

한숨을 내쉰 광군영이 다시 천장 위로 올라갔다.

쥐새끼가 움직이는 것보다 더 은밀하게, 검은 그림자는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기에 광군영은 보질 못했다.

검붉은 액체가 노인의 몸으로 역류한 지 얼마 후.

노인의 감겼던 눈이 번쩍 뜨인 것을.

몸을 움직일 힘까지는 없었는지, 눈동자를 좌우로 돌려 상황을 살피는 노인.

그러던 노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몸 안으로 흘러든 액체가 무엇인지 감이 잡힌 것이다.

‘혈정액(血精液)! 이것 참… 내 운이 다한 줄 알았더니.’

노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지만, 그렇다고 단기간에 힘을 회복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좋아, 당분간은 너희들 손에 놀아나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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