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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28화 (28/210)

028화. 생명원의 관음보살 (3)

* * *

“……그래서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만병일독(萬病一毒), 즉 모든 병은 한 가지 문제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이 곧 피라는 겁니다.”

생명원 의원의 강의가 한 시진째 이어졌다.

제법 입담이 좋은 의원이었지만, 사람들은 지루함을 참을 수 없었다.

무료로 가족을 치료해주는 것만 아니면 진작에 뛰쳐나갔을 상황.

“허허, 여기저기 하품하는 분들이 많군요. 이해합니다. 말로만 들어서는 느낌이 없을 테니까요. 지금부터 체험을 시켜드리겠습니다.”

의원이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커다란 잔을 들고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그 잔에 담긴 물약을 한 모금씩 마셔보세요. 그럼 지금껏 제가 설명드린 것을 곧바로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사람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약을 마셨다.

제일 뒷줄에 앉아있던 곽철도 피할 수 없었다.

검붉은 액체.

어렴풋이 피 냄새가 나는 듯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가면서 물약은 즉시 흡수됐다.

심장으로 모인 약 기운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시야가 환하게 밝아지며, 온몸에 힘이 넘쳤다.

깊숙이 감춰뒀던 챠크라도 약 기운에 감응하여 꿈틀거렸다.

‘이럴 수가!’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펄쩍펄쩍 뛰는 사람, 굽었던 허리를 쭉 펴는 사람.

누군가는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어 옆자리의 사람을 번쩍 들어 올리기도 했다.

“하하하, 모두들 효과를 보셨군요. 이제 제 말에 관심이 생기십니까? 이것이 저희 생명원이 추구하는 건강한 삶입니다.”

“의원님. 제가 무릎이 안 좋았는데 지금은 멀쩡합니다. 제 병이 나은 겁니까?”

“아쉽게도 아직은 아닙니다. 방금 드신 약물의 효과는 일각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말 그대로 체험을 위한 거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생명원의 일원이 되시면 영구적으로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장수하게 되지요. 혹시 압니까? 영원히 살게 될지. 허허허. 물론 모든 분께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연이 닿아야 해요. 중환자가 치료받는 동안 여러분과의 인연을 확인해 볼 겁니다.”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이 변했다.

약 효과가 일으킨 열망은 그만큼 강렬했다.

곽철의 마음속에도 갈등이 일었다.

혈승과 관계됐을 거라는 의심과 함께, 이렇게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냐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숙소에서 쉬시고, 호명하는 분들만 남아주세요. 특별한 기회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봉만철 씨, 원규 씨, 그리고 곽칠 씨.”

* * *

광주리의 음식은 금방 동이 났다.

처음엔 머뭇거렸던 사람들도, 진가린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는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그래요.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라고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힘을 쓸 테니.’

음식이 사라지자 분위기는 다시 침울해졌다.

이제 슬슬 준비를 시작해야겠지?

“혹시 싸움 좀 하는 분 있어요?”

진가린의 질문에 사내 몇이 손을 들었다.

“소싯적에 무관을 좀 다녔지요.”

“난 북로군에서 병역을 했었는데….”

“좋아요. 그럼 아저씨들은 이따가 저와 함께….”

“잠깐! 넌 뭔 데 쥐방울만 한 계집애가 나서는 거냐?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인상이 험악한 사내 하나가 딴지를 걸고 나섰다.

그럴 법도 했다.

겉보기엔 가장 약해 보이는 것이 그녀니까.

진가린이 말없이 손을 뻗어 대나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피슝. 퍽!

그녀의 손을 떠난 젓가락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가 벽 깊숙이 꽂혔다.

“아저씨. 나도 나서기 좋아해서 이러는 건 아니거든요.”

사내의 험악했던 인상이 대번에 고분고분해졌다.

* * *

진가린의 젓가락이 벽돌을 파고들던 그 시각.

정옥수의 뒤를 쫓은 강한월은 화려한 전각의 지붕으로 스며들었다.

규모나 모양새로 볼 때, 생명원의 원주가 머무는 전각이 분명했다.

정옥수는 긴 복도를 따라 걸었고, 천장 위의 그림자도 그녀를 따라 흘렀다.

이윽고 원주의 방에 도착한 그녀는, 허가를 구하지도 않고 방문을 열었다.

“아, 일 천사 오셨소? 나를 부르시지 않고요.”

“됐어요. 원주님 방이 이야기하기 편하잖아요.”

“하하, 그렇긴 하지요. 여튼 잘 오셨소. 일 천사께서 마을에서 고생하시는 생각만 하면 영 마음이 불편해서….”

“고생은 뭘요. 지금은 의원 역할이지만, 앞으론 포교를 해야 할 테니 미리 민심을 얻어놔야죠.”

“역시. 거기까지 내다보시는군요.”

원주와 정옥수의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천장에 은신한 강한월로서는 의외의 상황이었다.

일 천사? 저 여인은 생명원의 조직원이 아니란 말인가?

“그나저나 원주님. 요즘 생명원 실적이 영 시원치 않더군요.”

“흠, 안 그래도 상의를 드릴 참이었소. 목표에 못 미치는 것은 잘 아는데… 의원으로 간판을 달고 있으니 한계가 있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나가거나 실종되면 티가 나는지라.”

“이해해요. 하지만 특수한 상황이 생겨서 재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무슨 특수한 상황 말이오?”

“혈면귀 오십 명이 순교했어요.”

“뭐요?”

놀란 것은 원주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입에서 혈면귀가 언급되자 강한월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철저히 기척을 감추던 그의 은신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피슝!

정옥수의 손가락에 있던 가락지가 천장을 향해 빛살처럼 뿌려졌다.

그와 동시에 대들보 위에 뛰어오른 그녀가 주변을 살폈다.

“일 천사, 무슨 일이오?”

서까래에 꽂힌 가락지를 뽑아 내려오며 정옥수가 답했다.

“쥐새끼가 있는 것 같아서요. 제가 좀 민감했나 봐요… 아무것도 없네요.”

“요즘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가 보오. 그건 그렇고… 혈면귀 오십이면 큰 손실 아니오?”

“맞아요. 그래서 원주님이 좀 더 속도를 내주실 필요가 있는 거죠.”

“흠, 알겠소. 무리를 해서라도 수를 늘려야겠군. 일단 훈련소에서 실습 중인 자들은 이달 내에 세례를 받을 수 있소. 아직은 이류 수준이지만 조만간 일류 그 이상이 될 거고….”

“혈령단은요?”

“그건 내 노력만 갖고는 안 되는 거잖소? 적합한 피를 찾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번에 새로운 환자들이 왔으니 기대를 해봅시다.”

“좋아요. 잘 부탁드려요.”

* * *

정옥수의 가락지가 쏘아지는 순간, 강한월은 극성의 이형환위를 펼쳐 멀찍이 물러났다.

다행히 들키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염탐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대단한 실력이군. 약초꾼 노인 이상인데….’

혹시 정옥수가 혈승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젊은 여성이 혈승이라는 것은 좀처럼 믿기가 어려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몇 가지는 분명해졌다.

생명원은 연쇄 납치 사건을 일으켰던 영생궁과 같은 조직이라는 것.

영생궁의 본거지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

그리고, 원주보다 정옥수가 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

이제 행동에 나설 때였다.

* * *

광군영은 해가 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은밀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생명원 일꾼들의 대화를 주워들은 덕에, 원주전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마차들은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섰지만, 실은 중환자 판별소와 원주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커다란 나무 위에 숨어 저무는 석양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대장?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어떻게는. 그냥 느낌이지. 그보다도… 시간이 되었다. 오늘 밤 내로 정리한다.”

“뭐 좀 알아낸 거야?”

“필요한 만큼은.”

“잘됐네. 난 뭘 하면 되는데?”

“일단 혈승 노인을 꺼내 오고, 나랑 같이 원주와 정옥수를 잡으러 가자.”

“그건 좋은데… 가린이는 어쩌지? 혼자 놔둬도 되겠어?”

“혼자는 아니야. 곽철이 있잖아.”

* * *

곽철은 다른 두 명의 사내와 함께 특별 교육을 받고 있었다.

달큼한 향내가 진동하는 방안에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와 마주 앉았는데, 사내가 읽어주는 경전 같은 것을 듣고 있자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소영영이 잔혼반을 확인할 때와 유사한 느낌이라, 모종의 최면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지만, 곽철은 부딪혀 보기로 했다.

생명원의 진실이 궁금하기도 했고, 챠크라가 심신을 지켜줄 거라 믿기에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뭐, 최악의 경우엔 대장이 구해주겠지.

“피는 생명이요, 모든 것은 피에서 비롯된다는 걸 믿습니까?”

“네.”

“피에는 영적인 능력이 있다는 걸 믿습니까? 피의 길을 걷고, 피로 씻음을 받을 경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믿습니까?”

“네.”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사내 한 명은 혀가 굳어 끝내 답을 하지 못했다.

자질과 적합도를 가려내는 주술의 힘이 한 명을 탈락시킨 것이다.

“좋습니다. 곽칠과 봉만철, 두 분이 남았네요. 이제 마지막 질문에 답하시면 됩니다. 피의 형제들만이 유일한 가족임을 믿습니까? 어떤 거짓도 없이 항상 진실할 것이며, 피의 가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음… 아니오. 싫은데요.”

“곽칠 씨?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싫다고! 간단한 말인데 그걸 못 알아들어?”

“이… 이런. 아무래도 교육을 좀 더 해야겠군요. 혈경(血經) 제이 편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들은….”

“됐어. 매번 거짓말만 하면서 무슨 형제 타령이야? 내 동생 보게 해달라는 데 계속 핑계 대고 미루기만 하면서 무슨 가족 타령이냐고!”

곽철의 반응이 기가 막혔는지, 생명원 술사가 표정을 험악하게 바꾸며 손을 쓰려 했다.

하지만 곽철의 주먹이 더 빨랐다.

퍽. 우당탕.

가구를 쓰러트리며 나뒹구는 소리가 울리자, 문밖을 지키던 무사 몇이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 너… 특별 교육 중에 감히!”

놀란 경비 무사가 양손에 공력을 모으며 곽철에게 쇄도했다.

허리를 회전시켜 주먹을 피한 곽철은 그 탄력을 이용해 돌려차기를 날렸다.

퍼억. 쿵.

급작스런 전개에 놀란 다른 경비 무사가 급하게 검을 빼려 했으나, 야수와 같이 파고든 곽철의 주먹이 이미 아랫배를 두들기고 있었다.

퍼퍼퍽.

우웨엑.

뱃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내고 있는 무사의 머리채를 움켜쥐며 곽철이 물었다.

“내 동생. 어딨냐?”

* * *

강한월과 광군영은 은밀한 신법을 펼쳐 원주전을 빠져나왔다.

광군영의 어깨에는 당연히 혈승 노인이 들쳐 업혀 있었고, 강한월도 누군가를 매고 있었는데 바로 생명원의 원주였다.

의방에서 혈승 노인을 구해 나온 그들은 곧바로 원주를 잡으러 갔던 것이다.

원주는 방심하고 있었고, 무공도 그들을 상대할 수준이 못 됐다.

기이한 피의 술법에는 능한 것 같았지만, 강한월은 그가 주술을 펼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속전속결.

위기를 느낀 원주가 혀를 깨물어 피를 뿌리며 주박의 속언을 뱉으려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지풍을 날려 제압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정옥수.

그녀가 머무는 귀빈실의 위치는 이미 파악해두었다.

달빛 그림자에 동화된 채 소리 없이 달려, 아담하지만 고급스러운 별채에 도착했다.

—광군영. 내가 들어가 볼 테니, 노인들을 지키면서 대기해. 혹시 그녀가 도망쳐 나오면 자네가 막아주고.

—도망쳐 나온다고? 그녀가 그 정도의 고수란 말인가?

—글쎄. 혹시 모르니까….

강한월은 별채의 담을 넘었다.

귀한 손님이 머무는 곳이라 했지만, 지키는 경비 무사는 없었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

기감을 넓게 펼쳐 건물의 내부를 살핀 후, 은신술도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문 앞에 도착했다.

문틈으로 빛이 번져 나오는 것을 보니 아직 깨어 있는 듯했다.

강한월은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역시나 왔군요. 졸음을 참느라 힘들던 참인데….”

“올 것을 알고 있었소?”

“천장에 있던 것이 쥐새끼인지 사람인지도 구분 못 하리라 생각한 건가요?”

“그렇군. 원주를 잡는 것처럼 쉽지는 않겠군.”

정옥수가 환하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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