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생명원의 관음보살 (4)
* * *
“한바탕 치고받는 것을 피하긴 힘들 것 같지만, 그래도 궁금하네요. 자선을 베푸는 우리가 무얼 잘못했기에 이렇게 핍박하는 거죠?”
“글쎄. 생명원보다는 영생궁이 문제라서.”
한없이 여유롭던 정옥수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생궁. 그건 또 어디서 들었죠? 제법 호감 가는 인상이라 호교 전사가 될 기회를 줄까 했는데, 아쉽네요.”
피잉.
그녀의 손가락에서 가락지 두 개가 쏘아졌다.
화살보다 빨랐고 거리도 매우 가까웠지만, 강한월은 살짝 고개를 움직여 가락지를 피했다.
아니, 피했다는 것은 조금 성급한 생각.
귓불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간 가락지가 엄청난 회전력으로 방향을 틀더니, 강한월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퍽, 퍽.
강한월은 뒤도 안 돌아보고 손가락을 튕겼고, 강력한 지풍이 쏘아져 가락지를 박살 냈다.
“이런, 아끼던 장신구였는데….”
“순순히 나를 따라오면 새것을 사드리겠소.”
“호호. 여인에게 가락지 사주겠다는 말을 쉽게 하네요. 아쉽지만 사양하겠어요. 아무래도 가락지보단 목숨이 중하니까.”
정옥수가 옆에 놓여있던 도를 들었다.
도가 뽑히는 순간 서늘한 광채가 뿜어져 나와 방안을 채웠다.
대단한 보도(寶刀).
샤아악.
달빛을 닮은 차가운 도기(刀氣)가 날아왔다.
강한월의 검이 뽑히며 반달형 도기를 역으로 자르려 했다.
채앵.
도기는 해소됐지만, 강한월의 검도 두 조각으로 부러졌다.
무림맹에서 지급받은 평범한 청강검으로는 보도의 날카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것으로 가락지값을 치른 셈 치지요.”
정옥수가 화사하게 웃으며 쇄도했다.
좁은 실내라는 것을 개의치 않고 마음껏 도를 뻗었다.
보도의 날카로움에 의존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줄기줄기 기운을 뿌리는 내공과 도를 다루는 솜씨도 경지에 올라있었다.
강한월은 보법을 펼쳐 어지러이 날아드는 도기 사이를 빠져나갔다.
맞받아치지 않고 회피에 주력했는데, 검날이 반쪽만 남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의 무공 내력을 파악하기 위해 지켜보는 중.
챠크라가 아닌 중원의 정통 내공, 명가의 것이 분명한 고명한 도법.
이런 젊은 여고수를 키워내고 보도를 선사한 세력은 어딜까?
정옥수의 도기가 일장 길이로 쭉 뻗으며 공간을 쓸어왔다.
반월형 기운이 탁자와 의자를 박살 내며 강한월의 허리를 노렸다.
길어진 도기의 반경 때문에 회피가 힘들었다.
강한월의 부러진 검에 금빛 기운이 맺혔다.
터어엉!
“검강(劍罡)? 쳇. 이러면 애써 검날을 자른 의미가 없네요.”
실은 검강은 아니었다.
검기에 범음의 파동을 섞어 물리력을 강화했을 뿐.
하지만 굳이 그녀의 착각을 바로잡아줄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검강을 이룬 고수라고 오해했음에도, 정옥수는 두려움 없이 도를 날렸다.
평소에도 강기를 다루는 고수를 자주 접했다는 뜻.
정파의 무공은 아니고, 마공도 아니다.
그럼 남은 곳은 한 곳인데….
확인을 위해 강한월이 공세로 전환했다.
미친 호랑이가 날뛰듯 거칠게 날아드는 도를 사량발천근의 묘리로 튕겨내며, 왼손으로 회선장력을 일으켰다.
도가 튕기는 탓에 균형이 깨진 정옥수는, 휘어들어 오는 장력을 피하지 못했다.
옷이 찢기고 맨살이 일부 드러났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합을 질렀다.
대단한 투지였다.
이런 여자가 관음보살이라 불린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강한월이 속도를 높였다.
회선장력을 반월형 도기로 베고, 검기는 보도의 내구성으로 튕겨내며 정옥수가 항전했다.
이를 악문 그녀의 눈은 투지로 빛났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고절한 도법을 연달아 펼쳤고, 단전에서 뻗어 나오는 강맹한 내공은 후기지수의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었지만… 담담한 표정으로 속도를 조금씩 높여가는 강한월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는 것은, 그가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느낌.
실제로 강한월에게는 당장 그녀를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시간을 끄는 이유는, 그녀를 봐준다기보다는….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콰아앙!
그 순간 벽 한 면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먼지를 뚫고 튀어나온 흑색 장포의 노인이, 지체 없이 강한월에게 장력을 날렸다.
아가리를 벌린 거대한 흑룡이 먹잇감을 한입에 삼키겠다는 듯 쇄도했다.
강한월은 부러진 검을 들어 흑룡의 머리를 갈랐다.
범음청량의 진동을 섞어 장력을 흩었지만, 요동치는 여파를 모두 해소하진 못해 몸이 주르륵 밀렸다.
벽 뒤에 은신했던 노인은 한 명이 아니었다.
뒤이어 나타난 백색 장포의 노인이 공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음험한 장력을 쏘았고, 강한월의 검이 다시 한번 진동하며 마주쳐갔다.
그사이, 흑색 장포 노인이 정옥수의 허리를 잡아채더니 지붕을 뚫고 뛰어올랐다.
“이숙(二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정옥수가 악을 썼지만, 노인은 들은 척 않고 별채를 벗어났다.
얼음 같은 장력을 한 번 더 날린 후, 백색 노인도 뚫린 지붕 위로 빠져나갔다.
쳇,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구나.
날아오는 냉랭한 장력을 검으로 휘감아 허리 옆으로 흘려보낸 후, 강한월이 뒤를 쫓았다.
숨 몇 번 쉴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인들이 거리를 벌리기엔 충분한 시간.
지붕을 빠져나온 기세 그대로 담장을 넘는 강한월의 눈에, 저 멀리 앞서가는 노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노인들이 울창한 숲속으로 사라지려는 순간.
나무 뒤에서 나타난 광군영이 앞을 막아섰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것을 직감한 광군영이 전력을 다해 육합흑철마장을 내질렀고, 노인들은 각각 광포한 흑룡과 얼음장 같은 장력을 뿜어 응수했다.
콰아앙!
진기가 충돌하는 거센 폭음.
산이라도 부술 듯한 압력에 발목까지 땅속에 박힌 광군영이 울컥 피를 토했고, 노인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광군영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쐐애액.
그 순간, 정옥수의 손에서 빛살처럼 무언가가 쏘아졌다.
흠칫 놀란 강한월이 부러진 검을 던졌다.
가속에 가속을 더한 검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타앙! 퍽!
두 개의 가락지 중 하나는 다행히 검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나무 뒤에 앉혀 놨던 누군가의 두개골에 박혔다.
휴우.
답답한 한숨을 내쉰 강한월이 걸음을 멈췄다.
아슬아슬하게 혈승 노인은 보호했지만, 생명원 원주의 죽음은 막지 못했다.
“잔인한 여자네. 그래도 같은 편인데 이렇게 살인멸구를 하다니.”
입가에 핏물을 묻힌 채로 광군영이 다가와 말했다.
“내상은?”
“별거 아니야. 그나저나 왜 추적을 멈춘 건데?”
“노인들과 싸워서 이긴다는 자신도 없고… 일단 필요한 정보는 알아냈거든.”
“그래? 그럼 됐고.”
* * *
숲속으로 한참을 달린 후에야, 흑의 노인은 붙들고 있던 정옥수를 놓아주었다.
“숙부님들! 어쩌자고 도망을 치신 거예요? 그자를 잡았어야죠!”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우리 임무는 네 안전을 지키는 거니까.”
“검을 든 녀석은 본 실력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마공을 쓰는 녀석까지 나타나지 않았느냐? 그 두 녀석이 함께 덤볐으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다.”
흑의 노인과 백의 노인이 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딱 부러지게 말했다.
하지만 정옥수는 아직 납득할 수 없었다.
“마공을 쓴 자는 숙부님들의 장력을 맞고 바로 피를 토했잖아요!”
“천마신교의 마공은 그리 만만히 볼 게 아니다.”
“하지만….”
“되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생명원은 포기한다.”
“포기하라고요? 훈련소에는 아직 훈련생과 혈면귀 교관들이 있는데요?”
* * *
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을 지키고 선 진가린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겁먹을 거 없어요. 작전대로만 하면 돼요. 아셨죠?”
진가린 뒷줄에 서 있던 사내 셋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반대편 벽에 붙어 몸을 웅크렸다.
작전은 간단했다.
넓은 곳으로 나가면 진가린이 이들을 보호해줄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이곳에서 승부를 보자는 것.
문을 틀어막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려는 것이다.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철컥. 끼이익.
자물쇠가 벗겨지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문을 열던 사내가 앞에 버티고 선 진가린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이년이 죽음을 앞두고 갑자기 미쳤나?
황당했지만, 다만 그뿐.
사내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피의 실습을 시작한다! 형제가 아닌 자는 모두가 제물! 훈련생들은 제물들의 피를 뽑아 첫 번째 공양을 올려라! 혈신께서 기뻐하실 혈향을 피우라! 두 손을 적시는 붉은 피가 너희를 강하게….”
퍼억!
진가린의 주먹에 턱이 돌아간 사내는 실습 명령을 끝마칠 수 없었다.
당황한 옆의 사내가 급하게 외쳤다.
“모두 죽여!”
우와아아!
교관으로 보이는 자들은 뒤로 빠졌고, 검을 든 사내 열댓 명이 괴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하지만 문이 좁으니 동시에 들이닥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두세 명.
찔러 들어오는 검을 피하며 진가린의 주먹과 발이 날았다.
퍽. 퍽. 꽈당!
어깨가 맞닿아 몸을 피하기 힘들었던 사내들에게 매서운 주먹이 파고들었다.
하나가 쓰러지니 나머지도 발이 엉켰고, 진가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소를 가격했다.
“배운 대로 하면 된다. 우왕좌왕하지 말고 둘씩 진입해!”
교관은 당황했지만, 적절한 지시를 내렸다.
나뒹구는 동료들을 본 탓일까, 이번에 접근하는 사내들은 조심스레 접근했다.
그사이 진가린은 쓰러진 사내들의 손에서 검을 빼 뒤로 던졌다.
안에서 대기하는 아저씨들이 쓸 검은 마련됐고, 이제는 자신의 차례.
날카롭게 찔러오는 검을 가볍게 피한 후, 손등으로 뒤따라오는 검의 옆면을 때렸다.
두 검이 엉킬까 봐 사내들이 주춤하는 사이, 뱀처럼 교묘하게 파고든 그녀의 손이 공수탈백인의 솜씨를 발휘해 검을 뺏었다.
샤아악.
진가린이 쥔 검이 가볍게 공기를 갈랐다.
검을 쥔 감촉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씨익 웃었다.
“이제 제대로 해볼까요?”
이후의 상황은 계획대로 흘러갔다.
훈련생은 말 그대로 훈련생.
실력과 경험이 부족한 그들은 진가린이 버티고 선 문을 뚫지 못했다.
그녀의 검에 베여 비틀 데다가 우연찮게 건물 안쪽으로 넘어진 훈련생도 있었는데, 득달같이 달려든 아저씨들이 사정없이 검으로 쑤셨다.
보다 못한 교관이 훈련생들을 물렀다.
교관 둘이 진가린을 상대하러 나선 사이, 다른 교관들이 진기가 잔뜩 주입된 검으로 건물 벽을 두들겼다.
구멍을 뚫고 훈련생들을 진입시키려는 모양.
벽에 쩍쩍 금이 가는 것을 보니 진가린의 마음이 급해졌다.
교관들의 날카로운 검을 피하며, 품속에서 젓가락을 꺼내 힘껏 뿌렸다.
우수수 날아간 젓가락들이 몇몇 훈련생들의 몸에 꽂혔지만, 교관들은 재빨리 피해냈다.
이것으로 번 시간은 잠시뿐.
다시 한번 남은 젓가락들을 뿌리려 했지만, 이미 한번 당했던 교관들이 가만두지를 않았다.
어떻게든 틈을 내려다 마음만 급해졌고, 그 때문에 왼팔에 긴 혈선이 생겼다.
쳇. 솔직히 해볼 만한 상대들인데….
문 앞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 실력 발휘가 힘들고, 교관들이 혈면귀의 느낌을 풍기는 통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위치를 벗어날 수 없는데, 누가 자폭이라도 하면 큰일.
게다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관망하는 사내.
왠지 성전 선포라도 할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진가린이 독하게 마음먹고 교관 하나의 심장에 검을 쑤셔 넣었고.
몇몇 교관이 다시 벽을 부수겠다고 검을 내리치는 순간.
위험한 분위기의 사내가 뭔가를 외칠 듯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설마? 아니겠지… 안 돼!’
그가 막 입을 벌리려는 찰나.
쐐애액~
퍽!
가공할 속도로 날아온 돌멩이 하나가 사내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곽칠 오빠!”
“여어~ 동생. 별일 없었지?”
“당연히 별일 없지요. 오빠는 어땠어요?”
“난 이제 정신 좀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