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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30화 (30/210)

030화. 작전 회의 (1)

* * *

곽철이 가세하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쓰러지는 것을 본 교관들의 사기가 급락했고, 그동안 바보처럼 놀아난 한을 갚겠다는 듯 미쳐 날뛰는 곽철의 손에 하나하나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생명원의 일은 마무리되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의원과 일꾼들, 환자들… 처리해야 할 뒷일이 꽤나 있었지만, 그건 문무대의 역할 밖.

가까운 무림맹 지부에 익명의 투서를 넣어 뒤처리를 부탁한 강한월은, 대원들과 말 혈승 노인을 데리고 낙양으로 복귀했다.

* * *

문무대로 돌아오자마자 혈승 노인의 잔혼반부터 확인했다.

기대했던 대로 가슴에 나타나는 보랏빛 반점.

지체 없이 소영영의 섭혼술이 이어졌다.

“이 노인은 말… 오(午) 혈승이에요.”

노인의 잠재의식과 기억 사이에서 헤엄치며 소영영이 입을 열었다.

“교를 위한 자금을 담당했어요. 쉬지 않고 사업을 벌여 억만금을 모았고, 대업을 위해 폭탄도 제조했는데… 사소한 실수로 물거품이 된 것이 너무도 안타깝데요.”

십이간지 중 말이라는 것 외에는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마치 이미 들킨 것만 보여주고, 정작 중요한 것은 꼭꼭 숨긴 것처럼.

“다른 혈승들에 대한 정보는 없나?”

“이게 다예요. 다른 기억들은 철저하게 핏물 속에 잠겨 있어요. 그리고… 마치 저주처럼 되뇌고 있는 말이 있는데….”

“뭐지?”

“마불진경을 가루로 만든 놈은 천벌을 받을 거라네요.”

강한월은 그저 피식 웃었고, 섭혼술은 별 소득 없이 끝났다.

제갈윤과 위청보가 노인을 지하실에 수감하고 올라오자 회의가 시작됐다.

말 혈승에게서는 건진 게 없지만, 대신 다른 내용들이 있었다.

“우선. 황실에 회귀자가 있을 확률이 구 할 이상이다.”

강한월은 장준검이 동굴에 나타났던 상황을 설명했다.

연쇄 납치 사건 때 동창이 나섰던 것이나 동굴에 장준검이 왔던 것 모두 회귀자와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것.

“제갈. 북경 쪽 정보는 계속 확인하고 있는 거지?”

“그럼요.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어요. 그런데 황궁이란 곳이 워낙 비밀이 많고 요지경이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이번 황제가 등극할 때 힘이 되었던 자들, 동창의 윗선들. 그 주변을 우선 파봐야 할 거야.”

“알겠어요. 어쨌건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네요. 누군지 밝혀내더라도 건들 수나 있을지. 여차하면 역모로 몰릴 텐데.”

제갈윤의 걱정은 지극히 타당했다.

이 중원 땅에서 누구도 황제와 척을 지고 살 수는 없다.

그 때문에 혈승들도 미래에서 도망쳐 온 것이니까.

하지만 강한월의 결심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설사 회귀한 혈승이 황제 본인이라 해도, 모른 척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황실은 계속 지켜보기로 하고. 혹시 이런 모양의 도(刀)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강한월이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기억을 더듬어, 정옥수가 사용했던 도를 그려 놓은 종이였다.

“어? 이거 누가 그린 거예요? 칼같이 단순한 물체를 이렇게 못 그릴 수가….”

“됐고. 길이는 두 자 반. 손잡이엔 붉은 보석 세 개가 박혀 있고, 강하고 날카롭기로는 천하 십대 병장기에 들만하더군.”

“그럼 뻔하죠. 백 오십 년 전 진천패도가 사용했던 삼안혈도(三眼血刀)네요. 이게 다시 세상에 나타났어요? 진천패도가 사망한 이후 사라졌던 칼인데.”

강한월의 짐작대로였다.

이 또한 아직 발견돼선 안 되는 보물.

성전 선포와 자폭을 목격한 것으로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이로써 심증은 더 굳어졌다.

“형제처럼 붙어 다니는 노고수 중 흑색과 백색 장포를 즐겨 입는 자들은?”

“그런 사람들이야 많죠. 도가 계열에서 태극이나 음양이기 수련하는 자들이 흰색과 검은색 옷 맞춰 입는 것이 유행이잖아요.”

“도인들은 아니었다. 정파도 아닌 것 같고.”

“실력은 어느 수준인데요?”

“최소 구파일방의 장로급.”

“흠. 그럼 둘 중 하나일 거예요. 자철검문의 단장이검(短長二劍) 노인들이거나, 도화곡(桃花谷)의 가신인 흑한쌍귀(黑寒雙鬼).”

그렇다면 흑한쌍귀가 분명했다.

생명원에서 부딪혔던 노인들은 검을 쓰지 않았고, 흑룡을 연상시키는 장력과 얼음장 같은 장력을 뿜어댔으니까.

그러리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가슴을 짓누르는 정보였다.

강한월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자, 진가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도화곡이면 현 흑사련 련주의 본가잖아요?”

“그래. 흑사련의 핵심이지. 아무래도 영생궁 뒤에는 흑사련이 있는 것 같다.”

“네에? 무림 삼대 세력 중 하나가 혈승에게 장악되었다는 말이에요?”

대원들이 느끼는 부담은 황실 이상이었다.

상대하기 더 버거운 것은 황실이 맞지만 왠지 남의 이야기 같았고, 흑사련이라면 당장 전쟁이 일어나 칼을 겨누게 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세력.

“앞으로는 우리도 대응을 달리해야 할 것 같다. 혈승 개개인은 우리 문무대가 어찌어찌 상대한다 치더라도, 황실이나 흑사련 같은 거대 조직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테니까.”

“생각하고 계신 방법이 있나요?”

“아직은.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강한월의 심경이 얼마나 답답할지 제갈윤은 짐작이 갔다.

황실은 차치하고라도 흑사련에 맞서려면 무림의 절반은 힘을 합해야 할 텐데, 아직 정파의 도움도 제대로 못 받고 있으니….

“천마신교에 한번 다녀오시면 어떻겠어요?”

“그 생각도 하고 있다.”

* * *

제법 무거운 회의를 마치고, 강한월은 홀로 술잔을 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은 제법 환한 빛을 뿌렸지만, 답답한 그의 심정을 달래기에는 부족했다.

최악의 가정이 점점 현실로 드러나는 상황.

천하에서 가장 강한 세력 네 곳 중 두 곳에 혈승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머지 두 곳도 아군이 될 수 있을지 불분명했고….

앞으로는 시간 싸움이 될 거였다.

황실이건 흑사련이건 아직은 내부에서조차 회귀의 비밀을 드러내진 못했을 터.

아마도 천천히 한 명 한 명 포섭하고 있을 것인데… 조직이 혈교로 변모하기 전에 승부를 봐야만 한다.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언젠가는 떨어져 있던 혈승들이 연맹을 시작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인지하게 되고, 어떤 방법으로 연락을 취하게 될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엔 혈교의 이름으로 한데 뭉치게 될 것은 분명했다.

그 전에 수를 줄여 놔야 하는데….

술잔을 손에 들고 고민이 깊어질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민 것은 진가린.

“왜 안 오나 했다.”

“헤헤, 알고 계셨어요?”

“술 가지러 온 거지?”

“말 혈승 그 노인네 입방 기념으로요. 원숭이 혈승도 술 준 지 꽤 됐고….”

“가져가.”

진가린이 술병 네 개를 챙겨 품에 안았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강한월이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가린. 두렵지 않나?”

“뭐가요? 흑사련이요?”

“그래, 흑사련. 황실도 그렇고.”

“무섭죠. 아까 도화곡 이름 듣는데 소름이 쫙 돋더라고요. 하지만….”

“하지만?”

“전 항주로 윤대호 잡으러 갈 때부터 이미 무서웠어요. 익숙해지겠죠. 뭐.”

환한 미소를 남기고 진가린이 방을 나갔다.

강한월도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익숙해지기 전에 끝나야 할 텐데….’

* * *

“원숭이 혈승. 저 왔어요.”

“오, 가린아. 오랜만이구나. 어디 멀리 다녀왔나 봐?”

“우리가 그렇게 친근하게 이름 부를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이거 좀 서운한데. 난 우리가 충분히 친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징이 원숭이라 그런가? 어쩜 이리 뻔뻔할 수가 있지?

입을 삐죽 내밀며, 품에 안고 온 술 두 병을 건넸다.

“왜 다 주지 않고 두 병만 주는 거냐? 나머지 두 병은 누구 주려고?”

“이건 새로 들어온 사람 몫이에요. 너무 욕심내지 말아요.”

“쯧쯧. 강한월 그자가 또 억울한 희생자를 만든 모양이구나.”

“그건 당신 생각이고요. 여튼 앞으로도 많이 잡아들일 생각이니 조만간 외롭지 않게 될 거예요.”

“그런가? 술은 자주 얻어먹게 되겠군. 그리고 이거….”

원숭이 혈승이 술병 하나를 휙 던졌다.

이미 한 번 겪어봤던 일이라, 진가린은 당황하지 않았다.

“새로 잡혀 온 혈승한테 가져다주라고요?”

“그래. 나야 익숙해졌지만, 이제 막 잡혀 온 사람은 얼마나 복장이 터지겠냐? 술이라도 넉넉히 있어야지.”

“하여간 오지랖은. 알았어요. 나중에 술 모자란다고 징징대지나 마세요.”

계단을 향해 멀어지는 진가린의 뒷모습을 보며 원숭이 혈승이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 흡수한 돼지의 혈령(血靈)은 이제 거의 자신의 힘으로 연화시켰다.

이번엔 누굴까?

자신과 같은 비술 계열이면 좋을 텐데….

지하실에 갇혀 있는 것이 답답하긴 했지만, 이렇게 혈령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흐흐. 강한월. 힘내라고.’

* * *

원숭이 혈승의 지하실을 나온 진가린은 말 혈승이 갇힌 층으로 향했다.

진작에 의식 금제를 풀어줬음에도 노인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진가린도 묵묵히 술병만 넣어주고 몸을 돌렸다.

말 혈승의 지하실을 나오는 그녀의 품에는, 원숭이 혈승에게 받은 술병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 * *

똑똑똑.

“대장. 아직 안 주무시죠?”

“들어와.”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미는 진가린 뒤로 소영영과 위청보의 모습도 보였다.

진가린은 손에 술 한 병을 들고 있었는데, 술 마시자고 찾아온 것 치고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원숭이 혈승이 준 술이냐?”

“어? 알고 계셨어요?”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진가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돼지 혈승이 죽은 뒤 그녀는 속으로 끙끙 앓았다.

혹시 자신의 술 심부름 때문이 아닐지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몇 번이고 대장에게 말을 꺼내려 했지만, 망설이다 지금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 말 안 하신 거예요?”

“확실치 않았고. 네가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이건 조금 감동인데.

진가린의 표정이 펴지면서, 가지고 온 술병을 내밀었다.

“원숭이 혈승이 준 이거. 뭔가 수작을 부려놓은 게 아닌가 싶어요. 주술적인 거라면… 소 선배나 위 선배가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좋은 생각이다. 소영영, 위청보. 어때? 가능하겠어?”

“장담할 순 없지만 한번 해봐야죠.”

“저도요. 주박이나 저주의 속언이 담겨 있다면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좋아. 너희에게 맡길 테니 잘 분석해봐. 혈승들의 숨겨진 능력이 밝혀질지도 모르니.”

* * *

원숭이 혈승은 침상에 기대앉아 술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진가린이 심부름을 잘했으려나?

사망의 속언이 담긴 혈정이 활성화되려면 열두 시진, 속언에 걸린 자가 죽음에 이르려면 그로부터 또 한참이 지나야 하니 아직 시간은 많았다.

한 방울의 정혈로 속언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이 권능은, 오로지 비술 계열 혈승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 정혈을 낭비할 수는 없지만, 그 대가로 돼지의 혈령을 얻었으니 분명히 남는 장사.

아직은 미약하지만 세 명, 아니 두 명의 혈령만 더 얻는다면 이 지긋지긋한 금제를 풀고 지하실을 벗어나기에 충분한 힘을 모을 수 있었다.

어리숙하고 인정에 약한 진가린이 신입으로 들어온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

그런데 걔는 뭐가 궁금해서 자주 찾아오는 걸까?

분명 뭔가 있긴 있는데… 그게 뭘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술을 삼키던 원숭이 혈승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뇌리를 자극하는 묘한 기분.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파르르 떨렸다.

【 형제여 】

이건? 혈령심언?

【 형제여. 이곳에 있는가? 】

새로 잡혀 온 혈승인가? 금제에 당했을 텐데… 어떻게 혈령심언을 쓸 수 있는 거지?

혹시… 자(子) 혈승? 아니야. 자 혈승이 잡혔을 리는 없어.

【 나는 말이다. 형제의 혈령이 느껴진다. 심언을 쓸 수 있다면 대답하라 】

【 나는 원숭이다. 너… 금제에 걸리지 않았나? 어떻게 능력이 남아있는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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