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작전 회의 (2)
* * *
각각 지하 이 층과 삼 층에 위치한 원숭이와 말 혈승.
불문의 혜광심어와 흡사한 신통인 혈령심언을 통해 대화 중이었다.
【 말. 너도 강한월에게 금제를 당했을 텐데? 어떻게 신통이 남아있는 거지? 】
【 운이 좋았다. 금제를 당한 이후 어떤 조직에서 피를 뽑혔는데… 누군가의 실수로 혈정액이 역류해 들어오더군. 금제를 풀진 못했지만, 심언을 쓸 정도의 영성은 회복할 수 있었다 】
【 정말로 운이 좋았군. 그런데 네 피를 뽑으려던 건 누구였나? 우리 형제 중 하나인가? 】
【 아마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 그나저나… 원숭이 넌 어떻게 심언을? 】
【 나도 운이 좋았지. 아니,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되겠군. 실은 돼지가 잡혀 왔다가 강한월의 손에 죽었다. 돼지가 죽으면서 남긴 혈령이 나에게 흡수됐다 】
【 돼지가… 죽었다고? 】
말 혈승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돼지는 그와 마찬가지로 재물 담당. 관계가 특별히 돈독했던 것이다.
【 우리도 그런 꼴을 당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지. 그러니 우린 힘을 합해야 해 】
원숭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말 혈승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강한월이 돼지를 죽였다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뻔뻔하게 형제의 혈령을 흡수하다니.
역시나 제사나 비술을 담당하는 놈들은 모조리 미친놈들이 분명했다.
【 계획이 있나? 】
【 있지. 말 자네가 힘을 잠시 빌려주면… 】
【 내 힘을? 그건 어렵겠군. 아직 그 정도로 회복된 건 아니라서 】
【 그럼 뭐 할 수 없지. 누군가 한 명 더 잡혀 오기를 기다려보자고. 강한월 그 자식이 실력은 제법 좋으니까 】
* * *
강한월은 원로원주 사마염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말 혈승을 체포한 것을 보고하러 간 것인데, 겸사겸사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회의가 필요했기에, 즉시 대원들을 소집했다.
“소영영, 위청보. 술병의 내용물은 확인해봤나?”
“네. 술에 피가 섞였는데, 역시나 외오고인(外五枯印)의 만트라 주술을 역으로 펼친 저주가 걸려있었어요.”
“금제를 당한 원숭이 혈승이 어떻게 주술을 쓸 수 있지?”
“자신의 혈정(血精)을 매개로 외부의 힘을 빌린 겁니다. 그가 믿는 혈신의 힘을. 하지만 자주 사용하진 못해요. 비록 한 방울이지만 그래도 혈정… 선천지기를 소모하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그런 손실을 감수하면서 동료 혈승을 죽이려 한 이유는?”
“그건 모르겠는데요.”
소영영도, 제갈윤도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한월은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혈정의 손실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를 얻을 수 있기 때문.
아마도… 혈령을 흡수하려는 의도겠지.
“지금부터 원숭이 혈승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 그리고 어떤 영적인 술법도 지하실을 벗어날 수 없도록 공간 전체를 통제해. 소영영과 위청보가 방법을 찾아보고, 혈승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심해라.”
“눈치싸움을 해야겠네요. 맡겨주세요.”
“좋아. 이 건은 됐고….”
강한월은 다음 임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목적지에 대해 말했을 뿐인데, 대원들의 표정이 변했다.
심지어, 바로 어제 먼저 제안했던 제갈윤마저도.
“대장. 물론 필요한 일이라 말씀드렸던 거지만, 이렇게 급하게 실행하실 필요는….”
“지금 가야 해. 아니면 늦는다. 무림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무림맹의 분위기라뇨?”
“연쇄 실종 사건 때 영생궁 전사들이 자폭한 현장. 무림맹 조사단이 보고서를 올렸는데… 천마신교의 짓이라고 잠정 결론을 냈다는구나.”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부끄러운 일이지. 무림맹의 주전파(主戰派)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당한 것이 많았기 때문인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터지면 무조건 마교의 짓으로 몰아가는 것이 정파의 습성이긴 했다.
그럼에도 이번 것은 좀 심했는데, 혈면귀들이 자폭한 현장을 검증했다면 오히려 마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밝혀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전파, 특히 남궁세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여, 조사단은 엉뚱하게도 천마신교라는 답을 내고 말았다.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는 중요치 않았다.
주전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정마대전을 일으킬 구실뿐.
“천마신교에 해명을 요구하겠군요.”
“그래. 그리고 아무 답도 듣지 못할 거야.”
“그렇겠죠. 천마신교 내에도 주전파가 있을 테니.”
무림맹은 무례한 언사로 마교를 질타하고 사과를 요구할 것이다.
천마의 자존심에 변명을 늘어놓을 리 없고, 교 내의 주전파들은 이게 웬 떡이냐며 전쟁을 부르짖겠지.
대대로 정마대전은 이렇게 시작됐었다. 말도 안 되는 구실과 그것을 악용하는 전쟁광들에 의해.
“그렇다고 대장이 직접 신교를 방문할 필요는 없잖아?”
광군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림맹에서 천마신교를 걸고넘어진다는 억울함보다는, 강한월의 방문 계획이 더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내가 가야지. 혈승들이 이 기회를 노릴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광군영도, 소영영도, 제갈윤도… 모두가 탐탁지 않은 표정.
왜들 그러는지 진가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선배들. 천마신교는 우리 문무대를 지원하는 곳이잖아요. 대장이 방문한다는 데 왜들 그렇게 말리시는 거죠?”
“휴우. 그건 가린이 네가 몰라서 그래. 천마신교에 대장을 노리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야. 부교주인 검마(劍魔), 초열마가 가주, 천마흑풍대 대주….”
소영영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이름들이 거론되자, 진가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한월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대단한 사고를 쳤길래?
“됐다. 살아 돌아올 테니 그건 걱정 말고. 혹시 같이 가고 싶은 사람 있나?”
모두 고개를 돌리며 강한월의 눈길을 피했고, 광군영 혼자 손을 들었다.
솔직히 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신환을 전달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좋아. 그럼 나와 광군영, 그리고 진가린이 가는 것으로 하겠다.”
“대장! 저는 손 안 들었는데요!”
“네가 가야 해. 소영영은 한 번 복귀하면 다시 나올 수 없으니 안 되고, 제갈과 위청보는 따로 시킬 일이 있다.”
“곽철 오라버니도 있잖아요!”
“곽철은 안 돼. 그 성격에 천마신교에 갔다가는 맞아 죽기 딱 좋다.”
“욱하는 성질은 제가 더하면 더했지….”
“됐어. 내일 출발할 테니 준비해라. 가는 길에 흑시(黑市)에도 들려야 하니까.”
강한월은 단호하게 일정까지 정해버렸다.
내일 당장 출발한다는 것도 급작스러운 통보였지만, 그보다 더 대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흑시’라는 단어였다.
“대장. 갑자기 흑시는 왜요? 뭐 구매할 거 있으세요?”
“천하전장 원 장주께서 원로원주님을 통해 답을 보내주셨다. 원진탁을 위해 구매하던 영약들. 흑시를 통해 입수한 거라고. 누군가가 앞으로 발견될 영약의 목록을 가지고, 미리 예약까지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럼 흑시에도 회귀자가?”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흑시란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기에, 불만으로 입을 삐죽거리던 진가린마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세상의 온갖 진귀한 보물들이 거래되는 곳.
하룻밤에 억만금을 쓸 수 있는 거부가 아니면 초대받지 못하는 곳.
음모와 배신. 일확천금의 꿈과 한순간의 몰락. 인생을 건 도박 같은 거래.
감수성을 자극하는 환상적인 소문들을 떠올리며 진가린이 홀로 취해 있을 때, 제갈윤이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대장. 그런데 저하고 청보에게 시키실 일은 뭔데요?”
“흑시에 들렀다가 천마신교에 다녀오려면 반년은 걸리겠지.”
“그렇겠죠.”
“그사이 너희는 함정을 준비한다.”
“무슨 함정이요?”
“우리가 회귀자의 뒤를 쫓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앞으로는 그들이 스스로 찾아오게 만들어야 해.”
* * *
강한월 일행은 사천성 성도에 도착했다.
흑시는 일 년에 두 번 장소를 바꿔가며 열렸는데, 이번 행사가 열리는 곳이 이곳 성도였다.
천하전장 장주를 통해 흑시의 초대장이라 할 수 있는 옥패를 확보한 강한월은 지정된 객잔으로 향했다.
객잔 입구에서 옥패를 보여주자 두말없이 별채로 안내되었다.
차를 마시며 한 시진쯤 기다렸을 때, 청수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찾아왔다.
“특급 옥패를 소지하신 귀빈들을 뵙습니다. 저는 이번 행사의 실무를 담당하는 공 집사입니다. 지내시는 동안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반갑소. 행사는 언제 열리는 것이오? 며칠이나 기다려야 하는 건지….”
“열흘 후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루하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이번 행사에는 특별히 귀한 물건들이 여럿 준비되어 있습니다. 결코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열흘이라. 좋소. 그건 그렇고… 물건을 구매할 생각으로 온 것이지만, 실은 팔고 싶은 물건도 있소. 거래를 주선해줄 수 있는지?”
“물론입니다. 그게 저희 일인걸요. 수수료 지불에만 동의하시면 최상의 가격을 받으실 수 있도록 알선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아무 물건이나 취급하지는 않기에….”
“흑시의 격에 맞는 물건이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특급 옥패를 소지하신 분이니 분명 귀한 물건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저희가 먼저 감정을 해서 상, 중, 하로 등급을 나누어 급에 맞는 경매에 물건을 올릴 겁니다. 혹시라도 등급 외로 판정되면 죄송하게도 도와드릴 수가 없고요.”
“그렇군. 그럼 당장 판정을 해주시오. 거래가 가능할지 알고 싶군.”
“물건을 보여주시지요.”
강한월이 눈짓을 하자 광군영과 진가린이 소지한 물건을 꺼내 놓았다.
광군영은 꽤나 꺼림칙한 표정이었지만, 이미 물건에 눈이 팔린 공 집사는 그의 표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팔찌와… 검이군요.”
“그렇소. 팔찌와 검이오.”
마신환과 백학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공 집사가 이번엔 강한월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불신과 경악, 그리고 감탄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그것들이 맞다면… 감히 제가 판정할 수가 없군요. 최고 전문가를 모셔와야 할 것 같은데 잠시만 시간을 주시지요.”
표정이 하얗게 변한 공 집사가, 절대로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달라 신신당부하고 물러갔다.
꽤나 마음이 급했는지, 별채를 벗어나는 순간 후다닥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이게 어떤 물건인지 눈치챘나 보네요.”
“그랬겠지. 보물을 보는 눈만큼은 흑시가 천하제일이니까.”
“대장. 계획대로 따르긴 하겠지만 그래도 영 찜찜해. 이건 경매에 내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잖나. 회귀자의 관심을 끌려면 이 정도 물건은 내놓아야지. 안전하게 지킬 테니 걱정 말고.”
불안해하는 광군영을 달래는 사이, 공 집사가 노인 두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은 거동은 불편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젊은이의 그것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손님. 이분들은 저희 흑시의 장로들로서, 보물 판별의 최고 권위자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흑시의 관례에 따라 통성명은 생략하고, 강한월이 정중히 인사를 했다.
하지만 노인들의 표정은 영 퉁명스러웠는데….
“공 집사 이 아이가 하도 안달을 하길래 와 보긴 했지만, 솔직히 헛걸음한 것이라 생각하오. 흥, 말도 안 되지 그런 전설의 보물이 세상에 나왔을 리가… 어디 물건이나 봅시다.”
쳇, 불친절한 영감님들이네.
진가린이 속으로 툴툴대며 검을 꺼냈고, 광군영도 찜찜한 표정으로 팔찌를 풀었다.
그와 동시에, 심장마비라도 걸린 듯한 표정을 짓는 노인들.
“이… 이럴 수가. 좀 자세히 살펴봐도 되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다만 팔찌는 함부로 만지면….”
“그건 걱정 마시오.”
노인 한 명이 검은색 장갑을 꺼내 손에 끼더니 조심스럽게 팔찌를 집었다.
팔찌에서 웅 하는 진동이 일었으나 노인은 잠시 흠칫했을 뿐, 별탈 없이 물건을 다뤘다.
“어떻습니까? 흑시의 격에 부합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