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32화 (32/210)

032화. 흑시의 경매 (1)

* * *

흑시에서 거래할 격이 되냐는 강한월의 질문에 노인은 격동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격이라니. 천마신교의 마신환을 놓고 어찌 감히 격을 논하겠소? 특상 중에서도 특상이고, 지난 십 년간 취급한 보물 중에서도 이에 비할 것이 없었소.”

“그렇군요. 그럼 저 검은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조심스레 검을 살피던 다른 노인이 답했다.

“솔직히 믿기 힘들지만, 백학도 진품이 맞소. 이 또한 감히 격을 논할 물건이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럼 경매에 출품하는 데 문제가 없겠지요?”

노인들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특히나 마신환은 문제였다.

물건의 배경은 따지지 않는 흑시였지만, 천마신교의 마신환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물건 하나 거래했다가 흑시가 사라질 수도 있으니.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이건 저희 수준에서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흑시의 주인께서 결정하실 일. 이틀 안에는 답을 받아오겠습니다.”

노인들과 공 집사가 매우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떠났다.

미끼는 던졌으니 이제 기다리면 될 일.

그리고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 * *

내려앉은 달빛이 어스름한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할 때, 흑시의 주인이 찾아왔다.

소문만 무성할 뿐 누구도 진정한 정체를 모른다는 신비인.

천하전장의 원 장주와 더불어 중원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인물.

젊은 호위무사 둘을 거느리고 나타난 그는 일견 평범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비범한 자들은 평범함 속에 자신을 감추는 법.

강한월은 담담한 눈빛으로 흑시의 주인을 살폈다.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되어 실례가 많소이다.”

“흑시의 주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솔직히 주인께서 직접 오시리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만.”

“허허. 귀빈이 귀물을 지니고 오셨으니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지요.”

“거래에 대해선 결론을 내리신 겁니까?”

“아직. 솔직히 탐은 나는데… 함부로 결정하기엔 너무도 대단한 물건인지라. 귀빈께선 혹시 흑시에 한 가지 원칙이 있다는 걸 알고 있소?”

“제가 견문이 짧아서.”

“흑시는 물건의 출처를 따지지 않고, 판매자와 구매자의 신분도 묻지 않소. 그저 가격이 맞으면 거래를 성사시킬 뿐.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천마신교에서 도난당한 물건은 취급하지 않지. 그것이 우리 원칙이오.”

“처음 듣는 것이군요. 황실도 아니고 무림맹도 아니고, 오직 천마신교에서 도난당한 물건만 거래 금지라고요?”

“어쩔 수 없지요. 장사치에게도 목숨은 중하니까. 다른 곳은 뇌물이라도 써서 무마시킬 수 있지만, 천마신교에겐 그럴 여지도 없소.”

“그렇군요.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신환은 도난품이 아닙니다.”

“조직의 존망이 걸린 문제요. 귀하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소?”

“따로 생각하시는 방법이 있는 것 같군요.”

“글쎄. 최소 물건 주인의 정체는 알아야 할 것 같소만.”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였다.

하지만 실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질문.

판매자의 신원을 묻는 순간 흑시는 더 이상 흑시가 아닌 것이다.

“정체? 신분을 속이고 주인 행세하는 분께서 입에 담을 단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담담히 내뱉는 강한월의 말에 노인의 표정이 변했다.

“어찌 안 거요?”

“쉬운 추론이죠. 당신 말대로 우리가 도둑일지도 모르는데, 그게 확인되기 전에 흑시의 주인이 직접 나설 리 없지요. 우리와 대면한 사실만으로도 천마신교의 추궁을 당할 테고, 왜 절도범들을 잡아들이지 않았냐고 거센 항의를 받게 되겠죠.”

“맞소. 바로 그런 이유로 주인께서 직접 나서지 않은 것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노인께 모든 판단을 위임한 것은 아닐 테죠.”

“그건 또 무슨 말이요?”

“이젠 흑시의 주인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뜻입니다.”

노인에게 하는 답변이었지만, 강한월의 시선은 호위무사 중 한 명을 향했다.

단지 시선일 뿐이지만. 마치 화살이라도 쏘아진 것처럼 사람들은 흠칫했고, 실제로 호위무사 하나가 몸을 움직여 다른 호위무사의 앞을 막아섰다.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할 수밖에 없네요. 어떻게 아셨죠?”

강한월의 시선을 받은 호위무사가 입을 열었다.

그가 나서는 순간 노인은 공손히 한걸음 물러섰다. 진짜 주인이 나선 것이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노인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진 않았을 거라고. 그리고 저 무사가 호위의 기본을 충실히 지키더군요. 서 있는 위치와 각도를 보니, 실은 누굴 경호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군요.”

“아직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마신환과 백학은 거래되는 것입니까?”

“그래요. 이번 경매의 백미를 장식하게 될 겁니다.”

“원칙을 깨고 거래를 맡아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흑시는 원칙을 깨지 않습니다. 다만 마신환을 들고 온 것이 흑철기린인 이상 도난품은 아니라고 판단했을 뿐.”

장군과 멍군이 반복되는 상황.

강한월은 어떻게 광군영을 알아본 것인지 물었다.

“마신환을 감정한 장로께서 말하더군요. 이 정도 마기를 감당하려면 최소한 극마(極魔)급 마인이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뒤에 계신 저분은 천마신교 후기지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분이란 뜻인데… 신교의 후기지수 중 선검을 지닌 정파의 인물과 동행할 만큼 담백한 성격의 인물이라면 흑철기린 외엔 떠오르지 않네요.”

역시 흑시의 주인은 만만치 않았다.

“경매에 참여할 귀빈들께 이 물건들에 대해 공지가 나갈 겁니다. 아, 물론 흑철기린은 언급되지 않을 거고요.”

“알겠습니다. 좋은 값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래가 성사된다면… 그렇게 되겠죠.”

조만간 식사에 초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흑시의 주인이 별채를 떠났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지금껏 참고 있던 진가린이 입을 열었다.

“대단한 여자네요.”

“여자라니? 누가?”

광군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흑시의 주인이요. 광 선배는 모르셨어요?”

* * *

흑시의 일 처리는 신속했다.

다음 날. 경매에 참여할 귀빈들에게 새로운 보물들이 입수된 것을 즉각 공지했고, 몇 시진도 지나지 않아 누군가 강한월을 찾아왔다.

흑시의 규정에 따라 방문자는 두꺼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강한월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린 채 손님을 맞았다.

“백학을 경매에 출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하지만 그 검은 도문(道門)의 보물. 경매로 판매해선 안 되는 물건이오. 원하는 값을 치를 테니 나에게 넘기시오.”

“글쎄요. 아직 가격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경쟁을 통해 가격이 정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내가 가격을 제시하겠소. 천만 냥. 귀하도 절대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닐 거요.”

“과연 높은 금액이군요. 하지만 백학은 단독으로 판매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마신환과 묶음으로 경매에 출품한지라….”

“당신 제정신이오? 마교의 신물과 도문의 보물을 묶어서 팔겠다니? 누가 그런 위험한 거래에 응하겠소?”

“저는 강호의 깊은 속사정은 잘 모릅니다. 어쨌거나 저는 한 번의 거래로 물건들을 처분할 생각입니다.”

“허허, 답답한 일이로고. 각각 판매하면 훨씬 큰 이득을 챙길 수 있을 텐데.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생각이 바뀌면 공 집사를 통해 연락 주시오. 내 이천만 냥까지는 지불할 용의가 있으니.”

많이 아쉬웠는지 가격을 한껏 높여 부르며 방문자가 발길을 돌렸다.

사내의 모습이 사라지자, 옆방에 숨어있던 진가린이 달려와 호기심을 보였다.

“아, 심장 뛰어라. 가격이 이천만이라니. 임무만 아니었음 확 팔아버리고 새 인생 사는 건데… 그나저나 저 사람은 누구일까요?”

“기도나 말투로 볼 때 구파일방 중 도교 문파 사람 같구나. 어쨌든 백학 하나만 원하는 것으로 볼 때 우리가 찾던 사람은 아니다.”

그 후로도 몇몇 손님들이 더 찾아왔다.

대부분 백학에 관심을 보였고 용감하게 마신환을 탐내는 자도 있었는데, 두 물건을 함께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남의 처소를 방문하기에는 무례하다 느껴질 정도의 야심한 시각.

드디어 두 물건 모두를 사겠다는 자가 나타났다.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을 사과드리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보는 눈들이 꺼려질 수밖에 없어서.”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래지 시간은 아니니까요.”

“맞소.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마신환과 백학. 오천만에 넘기시오.”

오천만 냥은 분명 엄청난 금액.

하지만 강한월의 표정엔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면사의 틈으로 보이는 방문자의 눈에 표독한 빛이 감돌았다.

강한월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담담함을 유지하는 강한월이 만만치 않다고 느꼈는지, 결국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원하는 게 얼마요? 내 장담하건대, 경매가 시작되기 전 물건을 처분하는 것이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좋을 거요.”

“저는 최소 일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방문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몇 번을 망설이더니, 결국 낮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림의 역근세수경 진본이라 해도 일억의 가치는 없소. 당신이 미치지 않은 이상… 아니면 혹시? 마신환과 백학 외에 다른 물건도 있는 거요?”

“다른 물건이라니요?”

“아, 아니오. 내가 실언을 했군. 어쨌건 일억은 턱도 없는 가격이오.”

“그럴지도 모르죠. 어쨌건 적절한 가격은 경매를 통해 밝혀질 겁니다.”

“젊은 양반. 욕심은 화를 부른다오. 돈도 좋지만 목숨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할 거요. 생각이 바뀌면 집사를 통해 연락 주시오. 나도 조금은 더 쳐줄 의향이 있으니.”

협박 비슷한 말을 남기고 방문자가 떠났다.

하지만 강한월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청에 앉아 달을 구경했다.

한 식경쯤 흘렀을까? 검은 야행복을 입은 광군영이 나타났다.

“확인해 봤어?”

“거처는 확인했는데,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어. 경비가 삼엄하고 다들 고수인지라….”

“느낌은 어느 쪽인데?”

“정파.”

* * *

다음 날에는 더 이상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일행은 오래간만에 한가히 담소를 즐겼다.

하지만 몇 마디 대화 후, 주제는 자연스레 경매와 회귀자에 관한 것으로 흘러갔다.

“대장. 그런데 진짜 경매에 출품하실 거예요?”

“흑시와 약속을 했으니 우리 마음대로 무를 수는 없지.”

“그럼 누군가가 낙찰을 받을 텐데. 물건 뺏기면 어쩌려구요?”

실은 광군영이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천마의 상징인 마신환을 경매로 팔아 치운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인 것이다.

“그럴 수는 없지. 물건은 우리가 낙찰받아야 해.”

“그게 가능해요? 출품자가 낙찰을 받으면 다들 사기라고 욕할 텐데요. 돈은 또 어디서 구하고요?”

강한월은 말없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진가린에게 건넸다.

옥패 하나와 전표 한 장.

“흑시 옥패가 하나 더 있네요!”

“그래. 원로원주께서 주신 거다. 그 옥패를 사용해 진가린 네가 별도로 경매에 참가한다. 그러면 출품인과 낙찰인이 동일인은 아니게 되는 거니까.”

꼼수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가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표를 살피다가 눈을 부릅떴다.

“이 전표 일억 냥짜리인데요? 설마… 진짜는 아니겠죠?”

“진짜다. 천하전장에서 지원해준 거야.”

“아무리 천하전장이라도 일억 냥은….”

“실은 후원 받은 것은 천만 냥이고, 나머지는 빌린 거야. 왕희지의 난정서를 담보로 맡기고 사부님과 원로원주님의 이름도 팔았지.”

구천만 냥의 빚.

이번 작전에 강한월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느껴졌다.

일억 냥짜리 전표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진가린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 지금까지 즐거웠어요. 갑자기 사라지더라도 절 찾지 마세요.”

피식 웃은 강한월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난 흑시의 주인을 만나러 다녀오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