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흑시의 경매 (2)
* * *
식사에 초대받은 것은 강한월 혼자였다.
공 집사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장소에는 흑시의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엔 호위무사도 보이지 않았다.
강한월이 위험인물이 아니라고 확신했던가, 아니면 흑시의 주인 스스로가 호위가 필요 없는 고수이던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빈께서 시간을 내주셨으니 제가 감사드려야죠. 그런데…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흑시의 주인이 새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강한월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감탄사를 늘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즈넉한 정자에 다소곳이 앉은 그녀의 모습.
하늘하늘한 궁장에 비단결 같은 머리. 최고의 장인이 전력을 다해 빚어놓은 것 같은 눈 코 입.
정자를 감싼 화려한 꽃들도 빛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다.
“흑시의 주인은 누구도 참모습을 알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제 모습이 변장한 모습일 거라는 뜻인가요? 만약 이게 제 본모습이라면요?”
“아름다우십니다.”
형식적인 답변.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 그녀.
하지만 실망보다 더 큰 호기심과 기대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뭐 좋아요. 외모는 중요한 것이 아니죠. 그나저나… 구매자들이 여럿 방문했을 텐데 성과가 있었나요?”
“아니요. 적합한 구매자가 없더군요. 물건은 예정대로 경매를 통해 판매하게 될 겁니다.”
“아쉽네요. 솔직히 경매 전에 팔리기를 기대했는데. 흑시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물건인지라.”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마신환이 엉뚱한 자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천마신교는 분명 흑시를 추궁할 것이다.
흑시가 아무리 대단해도 마교와 척을 지고 사업을 계속할 수는 없을 터.
그럼에도 이 거래를 받아준 이유가 궁금했다.
“흑시의 주인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요? 실은 저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서로 세 가지씩 묻고 답해주는 것이.”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개구쟁이처럼 빛났다.
세 가지 질문.
어차피 상대가 진실을 말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럼에도 강한월은 제안에 응했다.
“좋습니다. 먼저 질문하시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경매에 나선 거죠? 마신환이 엉뚱한 자에게 넘어가면 어쩌려구요? 천마신교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녀에겐 절실한 질문이었다.
답변의 내용에 따라 흑시도 입장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천마신교의 화를 감당해야 할 대상에는 흑시도 포함될 것이기에.
“마신환은… 결국 천마신교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안심이 되는 답이었지만, 많이 부족한 답이기도 했다.
‘어떻게’가 빠져 있었으니까.
두 번째 질문권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할 때, 강한월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마신환과 백학을 경매에 받아 주신 겁니까? 흑철기린 광군영이 물건을 가져온 것은 도난품이 아니란 것만 증명할 뿐, 그것이 엉뚱한 자에게 팔려도 좋다는 보장이 되진 않을 텐데요?”
“궁금했어요. 실은 백학은 다른 사람이 경매에 출품하기로 예약했던 물건이에요. 백학은 확실히 출품하고 다른 보물 두 개가 더 있는데 그건 고민 중이라 했죠. 하지만 그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당신이 백학과 마신환을 들고 온 거예요.”
“누굽니까, 그자가?”
“그게 당신의 두 번째 질문인가요?”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번졌다.
실수를 깨달은 강한월이 질문을 바꿨다.
흑시가 출품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리 없으니까.
“다른 것을 여쭙겠습니다. 백학을 출품하기로 했던 자. 천하전장에 영약을 판매하던 자와 동일인입니까?”
“흠, 이건 좀 애매한 질문이네요. 뭐, 출품자의 신분을 공개하는 것은 아니니 답을 드리죠. 맞아요. 동일인이에요.”
역시나 말 혈승이었구나.
이로써 흑시에 회귀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은 해소됐다.
물론, 그녀가 진실을 말했다는 전제하에.
“당신이 두 개의 질문권을 썼으니 이번엔 제가 질문을 하죠. 뜬금없이 나타난 마신환과 백학을 포함해서, 최근 몇 년간 유례없이 많은 보물과 영약이 발견되고 있어요. 이거 혹시 불길한 일이 터질 징조인가요?”
“아마도요.”
“어머? 무슨 답이 그래요? 뭐 좋아요. 그만큼 사안이 심각하다는 거겠죠.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하시죠.”
“청류관이라는 별채에 머무르고 있는 손님. 혹시 특별한 관계가 있으십니까?”
강한월은 마지막 질문권을 써서 오천만 냥을 불렀던 방문자와의 관계를 물었다.
기대했던 질문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감돌았다.
“끝까지 저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는군요. 청류관의 귀빈과는 아무 관계 없어요. 그저 경매에 참석하는 손님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제 제가 마지막 질문을 하겠어요. 당신은 믿어도 되는 사람인가요? 신주의협의 고제자이신 강한월 소협.”
강한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자신의 신분이 들통난 것에 대해 그가 보일 반응을 기대하면서.
도발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항상 담담하던 강한월조차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니.
광군영의 이름이야 널리 알려졌으니 알아볼 수 있다 치더라도, 자신은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아닌데….
천마신교의 후기지수와 거리낌 없이 동행하는 정파인.
천하전장 장주가 챙겨주는 인물.
불길한 일이 터질 거냐는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사람.
고작 이 정도가 그녀가 활용할 수 있는 정보의 다일 것인데….
“다가올 재앙에 대비해 누군가 협력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저는 믿어도 좋은 사람입니다. 당대 하오문주의 영애이신 민정화 소저.”
또 한 번의 장군과 멍군.
강한월의 놀라는 모습을 기대했으나, 결국 더 놀라게 된 것은 그녀였다.
흑시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비밀이기에 딱 잡아떼는 것이 옳았지만, 그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아신 거죠?”
“방금 민 소저가 제 이름을 부를 때 알게 되었습니다. 단편적이고 조각난 정보 몇 가지로 제 이름을 유추해낼 정도의 정보력과 분석력을 가진 곳은 하오문뿐. 그리고 하오문주께는 재기발랄한 미모의 따님이 한 분 계신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실은 하오문을 떠올린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현 하오문주 민택선의 별호는 천면호리(千面狐狸).
변장과 변신에 관해선 천하제일이라 알려진 자였고, 민정화의 변신술도 경지를 뛰어넘은 것이 확실하기에 자연스레 하오문주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정보력이라면… 개방도 있잖아요?”
“글쎄요. 민 소저를 보고 어떻게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번 대답은 제법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단지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 것뿐이지만, 두꺼운 장막 속에서 생활하는 그녀에겐 매우 특별한 경우.
강한월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세 가지 질문과 답변은 모두 끝났지만, 강한월과 민정화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눈 후 만남을 마쳤다.
별채로 돌아오는 강한월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혈승에 관해서는 특별한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하오문이라는 엄청난 정보력을 갖춘 집단과 관계를 튼 것은 꽤나 큰 성과였다.
* * *
드디어 경매가 열리는 날.
흑시가 마련한 행사장에 속속 귀빈들이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두꺼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천하의 거부, 거대 세력의 수뇌부, 조정의 대신들임이 분명했다.
가면 속에 자신을 숨긴 채, 오늘만큼은 정(正), 사(邪), 마(魔)가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다.
“많이도 왔네요. 모두가 천하를 쥐고 흔드는 사람들이겠죠?”
진가린이 쉬지 않고 고개를 돌리며 사람들을 살폈다.
어차피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지만, 그녀의 눈에는 모두가 위대해 보였던 것이다.
“가린아. 쫄 것 없어. 너보다 더 큰돈을 들고 온 사람은 없을 거야.”
“헤헤, 그렇겠죠.”
품속의 일억 냥짜리 전표를 만지작거리며 웃음 지을 때, 공 집사가 무대로 나와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강한월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지만, 실은 경매는 매우 재미있었다.
원하는 물건을 차지하기 위한 사람들의 눈치싸움.
간혹 치열하게 경쟁이 붙어 가격이 치솟을 때면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고, 출품된 물건들도 보기 드문 보물인지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진가린은 특히 장신구와 보석에 관심이 갔고, 광군영은 무구(武具)와 영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하품에서 시작한 경매가 중품을 거쳐 상품으로 넘어가더니, 드디어 대미를 장식할 특상품이 소개될 차례가 되었다.
“여러 귀빈들께서 기다리시던 순서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지금부터 소개드릴 보물을 획득하기 위해 자금을 아껴 둔 분들이 많이 계시겠죠.”
박수가 터짐과 동시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리 공지드린 것처럼, 이번 경매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천고의 보물이 출품되었습니다. 여러분께 선보이겠습니다. 마신환과 백학검!”
흑시 최고의 감별사들이 강한월이 미리 전달한 마신환과 백학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
여러 전문 용어를 곁들어 이것이 왜 진품인지를 설명했는데, 명성이 높은 전문가였기에 누구도 그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출품인의 요청에 따라 이 두 가지 보물은 묶음으로 판매하겠습니다. 시작은 일천만입니다. 일천만 냥에 구매하실 분 계십니까?”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앞줄의 누군가가 옥패를 들었다.
“삼 번 탁자의 귀빈께서 일천만에 구매하려 하십니다. 혹시 일천오백만 계십니까?”
가격은 오백만 냥 단위로 올라갔고, 그때마다 누군가 옥패를 들었다.
강한월을 찾아왔던 자들은 아직 참여하고 있지 않았는데, 이 정도 금액에 낙찰될 리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
빠르게 올라간 가격은 삼천만 냥에 도달했고, 행사장의 열기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삼천만 냥입니다. 이미 오늘 경매의 최고가를 돌파했군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천만 냥 단위로 가격을 올리겠습니다. 사천만 냥 계십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고, 뒷줄의 누군가가 옥패를 들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강한월도 술잔을 놓고 사천만을 부른 자를 살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로 보니 처음으로 찾아왔던 도가 계열의 고수였다.
이천만까지 용의가 있다고 해놓고, 사천만에도 손을 든 것이다.
“이십이 번 탁자의 귀빈께서 사천만을 부르셨습니다. 오천만 계십니까?”
거대 문파나 상단이라도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지만, 여전히 옥패를 드는 자가 있었다.
“제가 경매 진행을 맡은 최근 오 년간 이런 높은 금액은 없었습니다. 보물을 알아보시는 귀빈들의 안목에 찬사를 보냅니다. 자, 육천만 계십니까?”
다시 한번 흐르는 정적.
각각의 탁자에 앉은 사람들이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상의를 시작했다.
“이거 여차하면 칼 맞겠는데요.”
진가린이 너스레를 떨 정도로 여기저기서 험한 눈빛이 쏟아졌다.
대부분 경탄과 부러움, 시기의 눈빛이었지만, 실제로 진득한 살기를 담고 있는 것도 있었다.
“아! 이십이 번 탁자에서 육천만을 부르셨습니다! 대단합니다. 혹시 칠천만 계십니까? 안 계시면 마신환과 백학은 이십이 번 귀빈께 돌아갑니다.”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들어 이십이 번 탁자를 살피던 진가린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칫, 뭐야 저 사람? 우리한텐 이천만을 제안하더니 육천만까지 쫓아왔네요.”
“연맹을 맺었을 거야.”
“연맹이요?”
“몇몇 거대 문파들이 미리 합의를 했을 거야. 일단 돈을 합쳐 물건을 확보하고 보자고. 마신환을 천마신교에 되팔면 절반 이상은 회수할 수 있을 테니까.”
강한월이 의견을 말하는 사이, 지금까지 한 번도 손을 들지 않았던 십육 번 탁자에서 옥패가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자.
마신환과 백학 외에 세 번째 보물도 있지 않냐고 물었던 자였다.
“십육 번에서 칠천만 나왔습니다! 아, 가슴이 뛰어서 잠시 진정을 시켜야겠습니다. 반 각 후에 계속하겠습니다.”
공 집사의 진행은 노련했다.
이미 칠천만을 돌파했는데도 열기는 가라앉지 않는 상황.
잠시 숨 돌릴 시간이 필요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