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백학의 주인 (1)
* * *
강한월의 짐작대로 사내는 바짝 약이 올랐다.
‘이놈!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구나….’
차라리 피 튀기는 정면 대결이었다면 속이라도 시원했을 텐데,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만 하는 강한월의 행동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내는 명문 정파에서 엄격한 수련을 받았기에 이런 류의 비겁한 대결은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봐줄 필요 없다. 전력을 다해 쓸어버려!”
이성의 끈이 끊어짐과 동시에 십육 번 사내가 거친 명령을 내렸다.
더 이상 무공을 숨길 필요가 없어진 복면인들.
그들은 더 이상 경매품을 약탈하려는 도적 따위가 아니었다.
눈빛이 변하며 엄정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고, 세상에 이름을 날린 절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진가린을 상대하던 두 복면인의 검법은 북두천추검(北斗天樞劍)처럼 보였다.
칠성의 방위를 점하며 공간을 장악하고, 합격술로 펼치기에도 더할 나위 없는 검법.
복면인들이 모용세가의 절기를 드러내자, 진가린도 더는 여유를 부릴 수 없게 되었다.
광군영을 상대하던 다섯 복면인의 칼에서도 난폭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천하제일의 도법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절정의 무예.
하지만 도법의 명성에 비해 복면인들의 성취는 부족해 보였다.
그렇기에 난폭한 이리떼처럼 날아드는 오호단문도를 상대하면서도, 광군영은 강한월의 대결을 곁눈질할 여유가 있었다.
본색을 드러낸 십육 번 사내가 강한월을 향해 꺼내 든 것은 창궁무애검(蒼穹無涯劍).
고명한 검법을 다수 보유한 남궁세가에서도 제왕검형에 이어 서열 이 위를 자랑하는 지고한 검법.
청명한 하늘을 나는 매처럼 사내의 동작은 매끄러웠고, 쾌(快), 변(變), 유(柔), 전(轉), 급(急), 탄(彈)의 검의(劍義)가 물 흐르듯 시원하게 연결됐다.
확실히 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위력이었는데….
웬일인지 복면 속 사내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세가의 진검을 펼치면 간단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상대의 옷깃 한번 건드리지 못한 것이다.
마치 파훼법이라도 알고 있는 것처럼, 강한월은 여유롭게 검을 움직여 창궁무애검의 맥을 끊었다.
사량발천근과 이화접목.
뭐 이런 괴물 같은 놈이…?
강한월은 고민 중이었다.
검을 맞대고 있는 사내는 대남궁세가의 장로급 고수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해볼 만한 승부.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는 나머지 적들을 감안하더라도,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선 수장급으로 보이는 네 명만 신속히 제압하면 되는데.
그저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인데….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어떤 느낌에 자꾸만 망설이게 되었다.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보다 더 신경을 자극하는 무언가.
어둠에 가려진 수풀 너머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지켜보고 있었다.
—대장.
광군영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강맹한 장력으로 오호단문도를 밀어내며 전음을 보냈다.
—알고 있어. 상황을 좀 보자고.
누굴까?
혈승인가? 아니면, 세가의 가주라도 왔다는 말인가?
다시 이십여 초의 공방이 반복되었을 때, 관망하던 자들이 참지 못하고 합류했다.
흉험한 기운을 줄기줄기 뿜으며 사방에서 쇄도하는 검과 도, 그리고 비수.
채앵.
옆구리를 찔러오는 모용세가의 파군검을 튕겨내고.
콰아앙.
시퍼런 도기를 흩뿌리며 머리를 베어오는 하북팽가의 오호단문도를 회선장력으로 밀어낼 때.
쐐애액.
지면을 쓸 듯이 날아오던 당문의 탈혼비가 수직으로 솟구치며 강한월의 하단전을 노렸다.
그 순간, 강한월의 신영이 두 개로 분리됐다.
탈혼비가 찢어발긴 신영은 스르르 안개처럼 흩어졌고, 또 다른 신영은 남궁세가의 고수에게 쇄도했다.
“이형환위!”
깜짝 놀란 남궁세가 고수가 다급한 외침을 터뜨렸다.
합공을 하던 자들이 급히 검기와 도기를 날렸지만, 강한월은 이미 몇 걸음 뒤에 있는 당문의 고수를 향해 몸을 날린 후였다.
위기를 느낀 그가 십여 개의 투골정을 발사했다.
탕탕탕탕탕!
검막을 펼쳐 암기를 막아낸 강한월은, 이번에는 하북팽가의 고수를 향해 지풍을 날렸다.
세가의 고수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데 모여야 합격의 묘리를 살릴 수 있는데, 느닷없이 다가와 공격을 퍼붓고 이동하는 강한월의 빠른 신법 때문에 서로 간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스무 명의 무인들을 상대하는 광군영과 진가린도 굳건히 방어하며 버티고 있자, 자신만만했던 마음이 서늘하게 떨려왔다.
강한월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누군가 때문에 함부로 강수를 펼칠 수가 없었다.
빠른 발과 기민한 대처로 시간을 끌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만은 없는 것.
하지만 다행히도… 그 순간 개입이 시작됐다.
그것은 누렇게 마른 볼품없는 나뭇가지였다.
어둠을 뚫고 날아든 나뭇가지는 벼락같은 속도도, 가공할 기세를 뿌리지도 않았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을 담고 있었을 뿐.
날카로운 검기로도 벨 수 없고, 폭발적인 장력으로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직감했다.
유유히 날아와 강한월 주변을 한 바퀴 돈 나뭇가지는, 다시 날아가 광군영과 도객들의 사이를 벌리더니, 막 진가린에게 살수를 펼치던 검객들 발 앞에 꽂혔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움직임을 멈췄다.
파르르 떨리는 복면인들의 눈빛.
십육 번 사내가 나뭇가지가 날아온 방향으로 외쳤다.
“어느 고인께서 왕림하신 겁니까?”
이들과 한패는 아니었구나.
강한월이 안도할 때, 어둠 속에서 몇몇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들은?’
이십이 번 탁자에 앉았던 자들.
도가 문파의 수뇌부라 추측됐던 그들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백발의 노인을 모시고 천천히 다가왔다.
“경매는 끝났으나 모두들 복면을 하고 계시니… 험험, 우리도 신분을 밝힐 필요는 없는 것 같소만?”
십육 번 사내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에서 서로 신분을 밝히면, 득보다 실이 많은 것은 바로 자신들.
좀 전 분을 참지 못하고 가문의 무공을 드러냈으나, 아직 얼굴과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무공 좀 선보인 거야 얼마든지 잡아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보물을 확보하는 임무에 실패하면 엄정한 문책이 떨어질 터.
최소한 누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곗거리라도 확보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나뭇가지를 던진 저 노인의 신분은 반드시 알아내야 하는데.
“좋소. 당신들이 누군지는 묻지 않겠소. 하지만… 저 노인장은 경매에선 못 뵌 것 같은데…?”
십육 번 사내의 시선이 백발의 노인에게로 향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엄청난 고수라는 것은 분명하고.
도교 문파 장로급으로 보이는 자들이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만만치 않은 배경을 가진 노인임은 확실한데…?
사내의 노골적인 시선을 의식한 것일까, 노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들을 보니 옛 친구들이 생각나는군. 한때는 협과 의를 찾아 함께 강호를 종횡했던 친구들인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모두 떠났구나.”
회한이 담긴 목소리.
이어서 노인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산속에 은거한 지 오래되어서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 있을지… 나는 소요자라고 하네.”
소요자!
복면인들은 물론 강한월마저도 놀란 눈을 부릅떴다.
은거한 지 오래된 인물인 것은 맞았다.
수십 년이 지났으니 원래는 잊혔어야 하는 이름.
하지만 어찌 모를 수 있을까?
현 무당파 장문인의 사부이자, 소림의 공문대사와 함께 천하제일을 논하던 전대의 고수.
배경과 배분은 물론, 무공으로도 천하를 굽어볼 거물 중의 거물인 것이다.
십육 번 사내는 속이 쓰린 한편 안도했다.
범접할 수 없는 거인이 나섰으니 보물 확보야 물 건너간 것이 분명했지만, 임무 실패의 핑계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도 없는 것.
어쨌건 좀 더 확실한 핑계를 위해 소요자와 몇 마디 나눌 필요가 있었다.
“강호의 대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저희는 윗분들의 명을 받고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보물을 확보하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대선배님의 너른 양해를….”
“자네가 말하는 보물이 마신환과 백학인가?”
“그… 그렇습니다.”
“마신환은 천마신교의 것. 이미 적합한 주인을 찾은 듯한데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저희는 상부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글쎄. 자네들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천마신교의 물건을 가져가면 분란만 초래될 걸 세. 욕심을 버리시게.”
“하지만 백학은….”
“백학은 전대 기인이신 이검학의 유물. 그분이 후예를 남기지 않아 애매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자네들이 소유권을 주장할 입장은 아닌 것 같군.”
“그럼… 도가 문파에 소유권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 경매를 통해 주인이 가려졌으니 소유권은 저기 저 젊은 소저에게 있는 게 맞겠지.”
“하지만 선배님. 저들은 마교와 몰려다니는 정체가 불분명한 자들입니다. 저런 자들이 정파의 보물인 백학을 차지한다면….”
“자넨 뭔가 잘못 알고 있군. 그래, 오래된 비사라 자네가 모를 수도 있겠지. 천마 백무진 선배와 검선 이검학 선배는 정과 마를 초월하여 우정을 나누던 사이. 그러니 그 유물이 정과 마의 허울에 개의치 않는 후예에게 전해진다면 그분께서 기뻐하실 일이겠지.”
“하지만 소요자 선배님. 천마신교는 천하의 적입니다!”
“이만하면 되었으니 그만 가 보게나. 내 이름을 판다면 임무에 실패했다 하여 크게 꾸지람을 듣지는 않을 걸세.”
맞는 말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복면인들은 소요자를 향해 정중히 인사하고 떠나갔다.
물론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강한월에게 싸늘한 눈빛을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강한월의 심정도 그들 못지않게 아쉬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한두 명은 붙잡아서 혈승과의 관계를 확인해야 했지만, 소요자가 지켜보고 있으니 그냥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거대 세가와 혈승이 관계가 있음을 안 것에 만족하면서.
“소요자 노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무림 말학 강한월이라 하옵고, 이쪽은 제 친우들인 광군영과 진가린입니다.”
아쉬운 마음을 털어낸 강한월이 면사를 벗으며 인사를 올렸다.
“반갑네. 내 일이 있어 오랜만에 세상에 나왔는데, 젊고 활기찬 후배들을 만나게 되어 흐뭇하군.”
소요자가 밝게 웃으며 화답하는 사이, 강한월의 뇌리에 또 다른 음성이 파고들었다.
【 듣는 귀가 많으니 자네 사부가 누구인지는 굳이 밝힐 필요 없다네 】
흠칫 놀란 강한월이 소요자를 바라봤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능청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
하기사 소요자 정도의 고수라면 자신의 검을 통해 신주의협의 제자임을 알아볼 수 있겠지.
“선배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솔직히 위기를 넘긴 건 그들이지 자네가 아니지 않나?”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속이 타는 것은 도문의 장로들이었다.
일이 이렇게 풀려가면 안 되는 것인데….
장로들 중 연장자인 공동의 광한자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 소요자 어르신. 백학은 저희 도문 전체의 보물이온데, 저 어린 처자가 지닐 물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왜? 너도 욕심이 나느냐? 내가 보기엔 주인을 제대로 찾은 것 같은데?”
광한자는 몹시 송구스럽다는 표정이었으나, 그래도 할 말은 했다.
“소요자 어르신. 어찌 저 젊은 처자가 백학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도문(道門)의 보물은 도문이 지켜야 합니다. 제가 욕심내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소요자 어르신께서 지니시는 것이….”
“다 늙은 내가 보검은 갖다 무엇 하려고. 그리고 백학은 엄밀히 말해 도문의 보물이 아닐세.”
“어째서 도문의 물건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검선의 유물 아닙니까?”
“검선이 자네 공동파의 선조신가?”
“공동파는 아니십니다만, 도문의 기인이시지 않습니까.”
“검선은 선도(仙道)의 인물이셨네. 선과 도는 통하는 바가 많으나 그렇다고 같은 것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