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36화 (36/210)

036화. 백학의 주인 (2)

* * *

소요자의 말이 맞았다.

엄밀히 말해 검선 이검학은 도교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 젊은 여인이 이검학의 후손인 것도 아니지 않는가!

광한자가 뜻을 굽히지 않자, 소요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진가린을 불렀다.

“진 소저. 이쪽으로 좀 와보시게.”

진가린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품에 백학을 단단히 품고 있었는데, 뺏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나 있었다.

“그 검을 잠시 빌릴 수 있을까?”

“백학을요? 왜요? 이건 제가….”

—가린. 걱정 말고 검을 내드려.

강한월의 전음을 받은 후에야,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검을 내밀었다.

동네 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검을 받아 든 소요자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챠르릉.

영롱한 소리와 함께 드러난 검날.

잠시 맑은 검신을 바라보던 소요자가 말했다.

“검선이 쓰시던 검이니 이것은 선검(仙劍)이겠지.”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영롱한 별빛 같은, 점멸하는 반딧불 같은 빛 가루들이 뿌려졌다.

검에서 뿌려진 빛이지만, 사납게 벨 것 같은 날카로운 예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무언가 포근한, 따스하게 다가오는 빛.

모두가 눈을 떼지 못하고 그 빛 가루를 바라보는데, 소요자가 갑자기 검을 광한자에게 건넸다.

“자네가 한 번 해보겠나?”

“제가 말입니까?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는데요….”

“그냥 해보게.”

광한자가 다시 한번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받았다.

빛 가루를 만들어낼 수 있으면 이 검이 도문의 것임을 인정해 주시겠지.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검에 내공을 주입했다.

광한자가 쌓은 공력은 공동파의 혼원일기공.

천하에 이름난 도력(道力).

기운이 주입되자 맑은 빛이 뻗어 나왔다.

역시나 보검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것일까?

평소 광한자가 만들어내던 것보다 더 선명하고 강렬한 검기였다.

백학에 맺힌 혼원일기의 기운을 취한 듯 바라보던 광한자가, 잠시 후 내공을 회수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선명한 검기를 뿜었지만, 소요자가 만든 신비한 빛 가루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번엔 진 소저가 한 번 해보게.”

“저… 저는 검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데요?”

소요자는 그저 웃을 뿐이었고, 검은 진가린의 손에 쥐어졌다.

어떻게 하는 걸까?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고, 손이 가늘게 떨렸다.

망신을 당할까 두려웠고, 자격이 없다고 검을 빼앗길까 겁이 났다.

대장이 방법을 알려주면 좋으련만, 강한월의 전음은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거지?

그녀는 검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검은 대답하지 못했다.

긴장한 탓에 손바닥은 촉촉이 젖어오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두근. 두근.

그녀의 손끝에서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은 가슴에 있는데… 어째서 손안에서 두근거림이 느껴질까?

조용히 백학에게 귀를 기울였다.

차가운 금속 날붙이가 심장과 함께 떨고 있는 것이, 함께 호흡하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검을 통해서.

분명 착각이겠지만, 순간 백학과 하나가 되었다.

천지를 가득 채운 부드러운 기운들이 검으로 모여들어 그녀에게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녀 몸속의 기운이 검을 통해 자연으로 되돌려졌다.

소요자가 만든 것처럼 선명하진 않았지만, 꽃가루처럼 가는 빛들이 검에서 흩날렸다.

“이… 이건…!”

광한자도, 나머지 도문의 장로들도 말을 잇지 못했다.

이해할 순 없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백학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직도 멍하니 검과 호흡하고 있는 진가린을 내버려 두고, 소요자가 강한월에게 물었다.

“자네들은 어디로 갈 건가?”

“저희는 신장으로 갑니다.”

“신장이라. 나는 곤륜에 들를 생각인데 방향이 같군. 한동안 동행해도 괜찮을까?”

강한월은 진가린에게 기연이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실제로 그녀가 획득한 보물은, 백학이 아니라 이 기회일 수도 있었다.

“소요자 선배님과 동행할 수 있다면 큰 영광입니다.”

“좋아. 같이 길을 가세. 원래 도(道)는 함께 걷는 것이니. 진가린 저 아이는 백학의 주인이지만, 검과 친구가 되려면 조금 더 힘을 키워야 하네. 내 비록 선가(仙家)의 선배는 아니지만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도움이 될 거야.”

* * *

강한월과 소요자 일행의 동행이 시작됐다.

처음엔 어려워하던 진가린도 하루 이틀이 지나자 곰살맞게 소요자를 대했다.

인자하고 소탈한 모습에서 그리운 사부의 모습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요자는 사부같이 행동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를 따로 불러 무언가를 가르쳤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득달같이 소요자에게 달려가는 진가린의 모습을 보며, 광군영이 툴툴거렸다.

“이거 좀 서운한데. 우린 완전히 찬밥 신세구나.”

“그녀에겐 다시없을 기회이니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맞겠지.”

은근히 부러워하는 광군영과는 달리 강한월은 그저 담담한 표정이었다.

“뭐, 당연히… 그나저나 소요자 그 어른은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쓰는 걸까? 하루가 다르게 가린이의 공력이 늘고 있으니. 무당파의 자소단이라도 몰래 먹이는 건지….”

진가린은 배움에 대해 함구했기에 광군영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수련과 가르침을 비밀로 하는 것은 무림의 불문율인 것이다.

“아마도 격체진기류의 방법으로 진력을 나눠주시는 것 같아.”

“뭐라고? 그건 자신의 공력을 깎아 먹는 방법 아닌가? 애제자한테도 함부로 못 해주는 건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이 있으시겠지. 차원이 다른 고인이시니.”

“도대체 소요자 어른은 얼마나 강하신 건데?”

“사람들이 내 사부님을 천하제일이라 추켜세울 때면, 늘 이렇게 대답하셨지. 선배 고인들이 살아계신데 누가 감히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겠냐고.”

* * *

“……그래서 그 나무꾼은 결국 버드나무집 둘째 딸과 결혼을 하게 된 거야. 식을 치른 날 밤에 정화수를 떠놓고 여우 신령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행복하게 살았지.”

“하하하, 그 나무꾼은 여우 신령이 할아버지인 것을 끝내 몰랐던 거네요.”

“그렇단다. 나같이 추레한 늙은이보단 여우 신령이 자신을 지켜 준다고 믿는 것이 더 든든했겠지. 허허허.”

진가린은 오늘도 소요자 곁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소요자가 그녀를 지도하는 방식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한차례 춤을 추는 것 같은 지도 대련을 하고, 이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다였다.

그렇기에 광군영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배움에 대해 뾰족이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

어떤 날은 오늘처럼 마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고, 어떤 날은 나무와 꽃에 대해, 혹은 물과 불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이가 든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소요자는 꽤나 능숙한 이야기꾼이었고, 가벼운 이야기 속에는 깊은 현기와 세상의 법칙이 녹아들어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옛날이야기에 빠져들고 나면, 어김없이 진가린의 선기가 충만해졌다.

“자, 오늘은 이쯤 하자꾸나. 내일 또 강행군을 해야 하니.”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푹 쉬세요.”

진가린이 정중히 인사하고 떠나가자, 먼발치서 지켜보고 있던 도문의 장로들이 소요자 앞으로 모였다.

안색이 영 불편한 것이,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어르신. 저희가 감히 관여할 일은 아닙니다만… 조금 걱정이 됩니다.”

“왜? 뭐가 걱정인데?”

“저희도 보는 눈은 있습니다. 근 한 달 동안 진가린 소저에게 공력을 나눠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이러시면 어르신의 건강이….”

“내 공력이 줄어든 것 같은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그걸 알아볼 실력도 안 되고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게.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을 나누는 것뿐이니. 내가 쌓은 공력은 무당의 태극양의심공이고 가린이에게 넘겨주는 것은 내 몸에 쌓인 선기일 뿐이야. 자연과 호흡하다 보니 우연찮게 선기가 좀 쌓였는데, 자네들도 짐작하겠지만 아무리 좋은 기운이라도 내 본연 내공과 성질이 달라 오히려 나에겐 짐이 되는 기운이지. 버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가린이를 만난 거야. 나에게도 좋은 일이네.”

“아, 그런 것이었습니까? 저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진가린 소저에겐 큰 행운이군요.”

“행운이라기보다는 연이지. 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불가(佛家)뿐만이 아니다. 우리 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 자네들이 불편하게 느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번 만남 또한 귀한 연인 걸세.”

소요자의 가르침에 황송해하며, 광한자를 비롯한 도문의 후배들은 물러갔다.

적당히 둘러댄 것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그들을 보며 소요자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당의 내공이 아닌 선기만을 전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소요자에게 불필요한 기운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선기를 공기 중에 흩었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진가린에게 흡수시키는 것은, 격체전공의 방법 중에서도 꽤 공력 소모가 심한 방식.

절대경을 넘어 초월경에 든 소요자로서도 피로를 느낄 정도의 고된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소요자가 진가린을 챙기는 것은.

‘그저 정이 갔기 때문인가? 아니면 네 속에 잠든 무언가가 궁금했던 것일까?’

* * *

사천에서 곤륜까지는 짧은 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지속될 수도 없었다.

이제 이삼일만 더 가면 각자의 길로 갈라서야 하는 상황.

오늘도 어김없이 지도를 받고 돌아온 진가린이 강한월에게 말했다.

“대장. 소요자 할아버지가 이야기 좀 하제요.”

한번은 부를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강한월은 지체 없이 소요자를 찾았다.

늦은 밤, 달빛이 그윽한 평상에 앉아 그를 기다리던 소요자는 술까지 한 병 준비해 놓고 있었다.

“어서 오게. 한참을 동행하면서도 이제서야 둘이 이야기할 시간을 잡았네. 서운하지는 않았나?”

“가린이를 살펴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공력의 손실이 크셨을 텐데….”

“나 정도 나이를 먹으면 공력의 양은 그다지 의미가 없네. 선기는 나보다는 가린이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고.”

“어르신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가린이? 좋은 사부 밑에서 가르침을 잘 받았더군. 육감도 타고났고. 워낙 독특한 무공을 익히고 있어 내가 가르칠 게 별로 없었어. 언젠가는 꽃을 피우겠지.”

강한월이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요자는 뻔한 답을 줄 뿐이었고, 강한월도 더는 묻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이다.

타인이 언급하기엔 적절치 않은.

“자, 이거 받으시게.”

소요자가 뜬금없이 둥그런 무언가를 건넸다.

밀랍으로 단단히 봉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은은히 풍겨 나오는 범상치 않은 향기.

하얀 껍데기 안으로 살짝 비치는 석양을 닮은 보랏빛.

소림의 대환단과 쌍벽을 이루는 무당파의 무가지보 자소단이 분명했다.

“가린이에게 주시는 겁니까?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너무 귀한 거라….”

“두 개가 있었으면 가린이도 줬겠지만, 아쉽게도 하나밖에 없어서. 이건 자네 것이네.”

“저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자네 몸속에 여러 개의 기운이 함께 모여 있더군. 신기했지. 자네 사부의 공력은 그런 것이 아닌데… 어쨌거나 쉽지 않은 길을 가는 것 같으니 선배로서 뭔가를 해주고 싶었네.”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좀 특이한 무공을 연마 중입니다. 하지만 자소단은 받을 수 없습니다. 무당에도 몇 개 남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당의 아이들에겐 줄 생각 없네. 버릇만 나빠지지 뭐. 받게. 상충하는 기운들을 함께 연마하려면 무엇보다 균형이 중요하네. 지금은 불가 공력의 금색이 너무 짙어. 아마도 대환단은 이미 먹은 것 같은데, 이 자소단이 균형을 맞추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십만대산에 가면 거기서 마지막 균형을 맞출 무언가를 찾게.”

소요자의 말은 모두가 사실이었다.

팔성에 머물러 있는 신공이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선, 제각각인 공력의 균형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함부로 호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어째서 저를 도와주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신주의협. 자네 사부가 찾아왔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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