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37화 (37/210)

037화. 마교로 가는 길 (1)

* * *

신주의협.

얼마 만에 듣는 사부의 소식인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강한월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이… 언제였습니까?”

“작년 봄이었으니 일 년 반쯤 되었구나.”

“어떤 말씀을 나누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와 신주의협은 활동한 시기가 달라 평소 교분이 깊은 것은 아니었지. 하지만 최고의 협객인 그를 내심 존경하고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네.”

만남은 소탈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편하게 마주 앉아 술을 나눴는데, 무당산 봄 정취가 제법 그윽했고 주고받는 대화 속에는 현기가 가득했으니 무척이나 즐거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일백 년 넘는 세월을 살아온 소요자는 신주의협의 미소 뒤에 말 못 할 고민과 고뇌가 감춰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별한 이야기나 자세한 설명은 없었네. 그저 자신에게 강한월이란 제자가 하나 있다고 하면서, 혹시 강호에 큰 풍파가 일 경우 자네를 지지해달라고 부탁하더군.”

강한월은 가슴이 먹먹했다.

어려운 과제를 자신에게 떠넘긴 후 사라진 사부.

처음엔 원망스러웠고, 그 후에는 혹시나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는데….

“강호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신주의협의 제자라면 당연히 돕겠다고 답했지. 하지만 내 답변이 충분치 않았던지 그가 다시 물었네. 혹시라도 강한월 자네가 무림맹과 척을 지거나 무당파와 대적하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변함없이 지지해줄 수 있는지. 너무도 황당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네.”

소요자가 강한월의 두 눈을 직시했다.

폐부를 꿰뚫는 강렬한 시선은 아니었지만,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현묘한 눈빛.

답을 얻는 것인지 혹은 아무것도 읽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소요자의 표정은 한결 홀가분해 보였다.

“그럼에도 간곡히 부탁드린다는 말을 남기고 자네 사부는 떠나갔지. 조금은 쓸쓸해 보이더군. 세상의 정점에 선 거인의 무거운 뒷모습에서 한없는 고뇌가 느껴졌네. 도대체 무엇일까, 그의 말 못 할 사연은?”

“답을 찾으셨습니까?”

“아니. 찾지 못했네. 자네 사부가 함구했던 일이니 자네에게 물어도 답해줄 것 같지는 않군. 대신 내가 답을 해주겠네. 그날 자네 사부에게는 못했던 답을.”

잔에 남아있던 술을 한 번에 들이키며 소요자가 말했다.

“자네가 무당파와 대적하는 일이 생겨도 지지하겠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답할 수 없네. 다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무당파나 무림맹보다는 신주의협이 걸어온 협객의 길을 더 믿는다는 것뿐.”

뻔한 말이었지만, 감사한 말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 강한월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신뢰.

“내가 자소단을 건넨 것은 작은 응원을 표현한 것. 자네 사부는 지금도 누군가를 찾아가서 마찬가지 부탁을 하고 있을 거야. 힘겨운 길이지만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니, 자네도 해야 할 일을 하게나.”

* * *

곤륜산 인근.

소요자 일행과 헤어지기 전날 밤.

마지막 수련을 마친 진가린이 흥분된 얼굴로 달려왔다.

“대장! 광 선배! 큰일 났어요!”

“무슨 큰일?”

다짜고짜 백학을 뽑아 든 진가린이 엄숙한 표정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흐압! 기합을 넣으며 힘을 주자 검에 새하얀 빛이 감돌았다.

불과 한 뼘 길이의 짧고 어설픈 빛줄기였으나, 그것은 분명 검기(劍氣)였다.

“호오~ 진가린 대단한데. 검기를 발출하게 되었구나! 소요자 어르신께 배운 거냐?”

“네. 편하게 기를 다루는 방법이라고 심법을 하나 알려주셨는데… 이게 되지 뭐예요!”

“그렇구나. 축하한다. 그런데… 큰일 났다는 건 뭔데?”

“검기를 다루면 초절정이라면서요. 제가 절정을 건너뛰고 초절정이 된 거라고요!”

“에이, 초절정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어쨌거나 대단하긴 하네. 근데 왜 큰일이 났다는 거야?”

“아무래도 전 천재인가 봐요. 어떡하죠? 천재는 단명한다는데….”

콩!

광군영이 딱밤을 날렸고, 진가린은 이마가 빨개진 채로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얼마나 기쁠까?

강한월은 자신이 처음 검기를 뽑아냈을 때를 회상했고, 본인 일처럼 기뻐해 주셨던 사부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디에 계신 겁니까? 왜… 저와 함께 움직이지 않으시고….’

* * *

곤륜산 북단의 가파른 능선.

강한월 일행은 수풀 사이를 바람같이 달리고 있었다.

무슨 낌새를 챈 것일까, 선두에서 달리던 광군영이 흠칫 놀라며 팔을 들었다.

쐐애애액~

타앙!

어두운 나무 그늘 뒤에서 누군가 나타나 벼락같이 비수를 날린 것이다.

손목에 찬 마신환으로 비수를 쳐내며 광군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찰나,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수풀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채애앵.

옆구리로 날아드는 흑의인의 도격을 진가린이 막았다.

도가 튕겨 올라가는 사이 그녀의 연환검이 공기를 갈랐고, 상대의 허벅지를 깊게 베어냈다.

흑의인이 흘리는 낮은 신음.

하지만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흑의인이 반격을 가했다.

도신을 타고 흐르는 검은 아지랑이.

상대는 천마신교였다.

‘치잇. 도대체 어쩌라고…?’

진가린의 육감에 상대의 움직임이 읽혔다.

거칠게 공기를 가르는 선들 사이로 선명하게 보이는 길.

그 길을 따라 검을 찌르면 상대의 심장에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검을 뻗기가 망설여졌다.

이들은 광군영과 같은 소속.

문무대를 뒤에서 지원하는 천마신교인 것이다.

그녀의 망설임과 주저함은 상대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흑의인이 거침없이 도를 퍼붓는 사이, 또 한 명의 흑의인이 진가린의 후위를 점했다.

앞뒤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귀두도.

퍼어엉!

“진가린. 정신 차렷!”

때마침 광군영이 날린 장력이 뒤에서 달려들던 흑의인을 날려버렸고, 앞에서 뛰어들던 자는 강한월의 검에 꿰뚫려 무릎을 꿇었다.

한숨 돌린 진가린이 주위를 둘러보자,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사방에 쓰러져 있었다.

“가린. 이들은 천마신교의 질풍대다. 그렇게 넋 놓고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야!”

따끔한 광군영의 호통에 진가린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거잖아요! 이들이 천마신교이니까!”

“지금은 적일 뿐이다.”

“그러니까 왜 우리가 천마신교의 적이 되었냐구요!”

광군영이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대답하려 할 때, 강한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마신환 때문이겠지.”

곤륜산 어귀에서 소요자 일행과 작별한지 얼마 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피풍의로 감싼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두 시진 넘게 정신없이 달리느라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틈이 없었다.

길 가 나무둥치에 걸터앉으며 광군영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 마신환 때문이야. 지금까지 나타난 것은 흑마대와 질풍대. 흑마대는 대공자의 수하들이고 질풍대는 이공자의 수하들이지.”

“천마의 제자들이 마신환을 노리는 거군.”

“맞아. 흑시에서 만났던 구천마가 가주에게서 정보를 들었겠지.”

“아니, 광 선배가 교의 보물을 찾아서 복귀하면 다 같이 기뻐할 일 아닌가요? 어째서 마신환을 뺏으려고 하는데요? 어차피 천마께 바칠 거잖아요?”

강한월은 상황을 이해한 듯했으나, 진가린은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후계자 경쟁이 시작된 거야. 천마의 신물인 마신환을 찾아오는 것은 그야말로 큰 공이고, 차기 천마의 자리를 주장할 좋은 명분이 되거든.”

“그건 광 선배 공로잖아요. 남의 공을 가로채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어요?”

광군영은 씁쓸히 웃을 뿐이었고, 강한월이 대신 답을 들려줬다.

“힘으로 쟁취할 수 있으면 쟁취하는 것. 그게 천마신교다. 그리고 실은…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지. 아니 사실 두 가지 문제랄까.”

“그건 뭔데요?”

“대공자와 이공자는 광군영도 경쟁자가 될까 경계하는 것일 테고….”

광군영의 쓴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대공자와 이공자를 지지하는 거물들이 나를 무척 싫어하거든.”

이 말을 할 때는 강한월도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뭐예요? 대장과 광 선배 때문에 덩달아 저까지 공격받는 거잖아요! 억울해….”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십만대산에 도착하면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할 거야. 그때까지만 조심해서 가면 된다.”

걱정할 것 없다고?

십만대산까진 아직 한 달도 넘게 가야 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말에 진가린이 발끈하려 했지만, 어디선가 날아드는 화살 때문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쐐애액.

타앙.

다시 질주가 시작됐다.

* * *

번듯한 객잔을 잡아 휴식을 취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어찌어찌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적당한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잘 지펴진 모닥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토끼를 보며 진가린이 말했다.

“그래도 천마신교가 기본 예의는 있네요.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더니, 때맞춰 습격을 멈춰… 왜요? 또 누가 와요?”

강한월의 시선이 수풀 안쪽을 향해 있었다.

잠시 후 광군영도 같은 곳을 바라보았고, 진가린이 토끼 한 마리를 집어 드는 순간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구수한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을 하는구나. 흑마대와 질풍대 따위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나 보지?”

사십 대로 보이는 청수한 인상의 사내였다.

고급스러운 장포에 잘 다듬어진 수염.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마교라는 생각은 절대로 못 했을….

“안녕하십니까, 업권마가 구일산 장로님.”

광군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인사를 건넸다.

구 장로라는 자는 인사도 받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와 모닥불 앞에 앉았다.

“일단 먹던 것은 먹으라고. 냄새가 하도 진동을 해서 술도 한 병 가지고 왔으니 목도 좀 축이고.”

뻔뻔한 그 모습에 진가린은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강한월은 구 장로에게서 술병을 건네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자네가 그 유명한 강한월이로군. 독이 들었을까 겁나진 않고?”

“독이 들었습니까?”

“아니.”

“술맛은 그저 그렇네요.”

“하하하. 이해하게. 급하게 구하느라….”

강한월과 광군영도 토끼를 집어 들었고, 그제서야 진가린도 오물오물 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일단 먹지 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던데.

구 장로는 꽤 여유가 있는지, 토끼가 뱃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먹다 남은 고기가 모닥불 속으로 던져지고, 강한월이 술병을 들어 입가심을 한 후에야 비로소 찾아온 목적을 꺼냈다.

“내가 나쁜 뜻으로 온 것이 아님은 충분히 증명한 것 같고… 터놓고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네.”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이미 체감하고 있겠지만, 대공자와 이공자의 지지 세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네. 아직은 간 보기에 지나지 않지만 십만대산에 가까워질수록 본격적인 견제가 시작될 거야.”

“그래서요?”

“광군영 자네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네. 마신환을 넘기거나… 아니면 버티는 것.”

“그런 뻔한 것을 알려주려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계속 들어보게. 마신환을 넘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대공자에게 넘기면 이공자 측에서 가만 안 있을 거고, 이공자에게 넘기면 반대 상황이 되겠지. 알잖나? 둘 다 꽤 뒤끝이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업권마가 가주님의 제안을 전하기 위해서네. 우리 업권마가를 비롯한 몇몇 세력들은 이번 후계자 경쟁에서 대공자나 이공자를 지지하지 않을 생각이네.”

“무슨 말씀이신지…?”

“비록 천마님의 제자는 아니지만… 만약 광군영 자네가 뜻이 있다면 우리는 자네를 적극 지지할 용의가 있네. 물론 자네가 마신환을 가지고 무사히 십만대산에 귀환할 수 있도록 지켜 줄 것이고.”

무사히 십만대산에 도착하도록 지켜 주겠다는 말에 진가린의 귀가 번쩍 뜨였다.

게다가 광 선배가 천마가 된다면!

우와! 내 지인 중에 그런 엄청난 거물이 생기는 거야?

하지만 그녀의 기대감은 불과 몇 초를 가지 못했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광군영이 단호하게 답했기 때문이다.

“관심 없습니다.”

“하하하, 과연 흑철기린답군. 예상했던 대로야. 자네를 설득하라는 윗분들의 명이 있었지만… 좋아, 더 이상 긴말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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