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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38화 (38/210)

038화. 마교로 가는 길 (2)

* * *

업권마가 구 장로는 조만간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강한월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담담했고, 광군영은 조금은 무거운 표정.

그에 반해 진가린은 분기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배! ‘감사합니다’하고 손을 잡아야지, 그걸 걷어 차버리면 어떡해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단순한 문제가 아니죠! 자그마치 천마신교의 교주 자리잖아요! 얼마나 고마워요. 같이 싸워주겠다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광군영이 길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음에도 진가린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무공에만 빠져 살던 선배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은데, 자신이라도 나서서 설득해야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대장이 거들어주면 좋으련만,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무 의견도….

“광군영. 진가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출발하자.”

“아니, 가긴 어딜 가요? 말 나온 김에 결론을….”

“습격자들이 오고 있다.”

“아이 씨.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광군영에게 눈을 부라린 진가린이 백학을 들고 일어섰다.

다시 한번 질주가 시작됐다.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검은 옷의 마인들.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는 칼, 사방에서 터지는 핏물.

떠오르는 아침 해가 새벽안개를 흩을 때까지, 역한 피 냄새가 끊이질 않았다.

* * *

십만대산. 광명정.

만마의 종주 천마(天魔)의 처소.

높은 태사의에 기대앉은 천마 장철성에게서 칼날 같은 기세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단일 세력으로는 무림 최강인 천마신교의 주인에게 어울리는 격.

하지만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그 기세 안에는 진득한 허무가 녹아 있었다.

이런 날은 보고를 짧게 끝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마군사 뇌탈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천마시여. 대공자와 이공자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흑마대와 질풍대가 청해 접경을 넘었고, 팔대 마가 중 다섯이 지원에 나섰습니다.”

“흠… 어리석은 것들. 가주들은 누구 편에 붙었나?”

끝 모를 깊은 지하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목소리.

어쨌거나 천마가 관심을 표명했기에, 뇌탈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보고를 계속했다.

“초열마가, 흑암마가, 정철마가는 대공자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구천마가와 환영마가는 이공자 편에 섰고요. 나머지 세 마가는 아직까진 중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부교주와 좌우 호교사자는?”

“그들은 후계 경쟁엔 관심이 없습니다. 부교주의 신경이 날카롭긴 한데, 그 이유가 다른 것에 있음은 아시지 않습니까?”

“어쨌든 재밌게 되었어. 기왕 이렇게 된 것 기름을 좀 부어줘야겠지? 구마동의 금제를 풀게.”

말조심을 하겠다 마음먹은 뇌탈린이지만 이번만큼은 가만있을 수 없었다.

“천마시여. 지금 구마동을 열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자칫하면 신교의 내전으로 번질….”

“상관없어.”

“하지만… 구마동 원로 중엔 광군영의 사부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많은 피가 흐를 겁니다. 누가 후계자가 되든 감당키 힘든 핏값을 지게 될 겁니다.”

파지직.

천마의 기세에서 검은 뇌전이 번득였다.

뇌탈린의 솜털이 곤두서며 숨이 막혀왔다.

역시나… 조심했어야 하는 날.

온몸의 혈관이 팽창하며 터질 듯 들끓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버텼다.

잠시 후, 천마의 몸에서 짙은 허무가 번지며 대전을 채웠던 뇌전의 기운을 흩어버렸다.

고통에서 벗어나 부들부들 떨고 있는 뇌탈린의 귀에 천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괴를 멈춘 것은 마가 아니며, 피가 흐르지 않는 곳은 신교가 아니다.”

* * *

흑마대와 질풍대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번화한 마을 안에 있을 때만 잠시 멈췄을 뿐, 인적이 드문 길을 달릴 때면 어김없이 칼과 비수가 날아들었다.

사흘 만에 만나는 마을에 들어서는 길.

검게 물든 핏자국과 흙먼지를 뒤집어써, 거지꼴을 한 진가린이 매섭게 말했다.

“하여튼 이게 다 광 선배 때문이라고요! 구 장로인지 십 장로인지 그 사람 제안만 받아들였으면 보호를 받았을 거 아녜요!”

이미 수백 번은 반복된 타박이라 광군영은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굳이 해명할 생각은 없지만, 진가린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업권마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 대공자랑 이공자라는 사람들도 이해가 안 돼요. 마신환을 빼앗고 싶으면 제대로 된 고수들을 보내서 한 방에 끝내지, 뭐하러 애먼 수하들만 보내서 이런 소모전을 하는지….”

“아직은 광군영에게 기회를 주는 거지. 일종의 경고. 좋은 말로 할 때 자진해서 마신환을 바치라고.”

적당한 객잔을 찾아 들어서며, 강한월이 진가린의 질문에 답했다.

“지금까지 죽으라고 싸운 게… 고작 경고라고요?”

“그래. 아직 시작도 안 한 거야.”

객잔은 그럭저럭 머물 만했다.

간만에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제야 간신히 사람의 모습을 회복한 일행이 객잔의 식탁에 둘러앉았다.

시골 마을 객잔의 음식은 그저 그랬지만, 습격에 지친 진가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진수성찬이었다.

그리고 그때, 구 장로가 다시 찾아왔다.

“생각보단 멀끔한 모습이군.”

“아저씨는 우리가 다치기를 바란 모양이죠?”

빈정이 상한 진가린이 눈을 흘기며 물었지만, 구 장로는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설마.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나저나… 생각은 변함없고?”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은 광군영뿐이었다.

“관심 없습니다. 제 임무는 마신환을 천마님께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글쎄… 천마께서 과연 그것을 원하실까?”

“무슨 뜻입니까?”

“좀 전에 본가에서 전서를 받았네. 천마께서 구마동을 여셨다는군.”

“말도 안 되는! 갑자기 구마동을 왜…?”

“왜겠나? 판을 흔들려는 거지. 그렇게라도 해서 자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으신 거야.”

“무엇 하러 천마께서 교내의 분란을 키우신다는 말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 교인의 수를 절반쯤 줄이고 싶으신 걸지도.”

“구마동을 나온 원로들이 누구누구인지 아십니까?”

“대여섯 분 나오셨다는데 정확한 건 나도 모르고. 하지만 권마, 천변마 두 분이 뛰어오실 것은 분명하지. 자네에 대한 애정이 깊으신 분들 아닌가.”

광군영이 침음을 삼켰다.

도대체 천마는 무슨 생각일까?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고 있었다.

권마와 천변마가 개입하면, 분명 다른 원로들도 개입하게 될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마성에 젖어 구마동에 갇혀 지내던 원로들이.

“우리도 시간을 더 끌 수 없네. 알고 있겠지만 여기가 청해성의 마지막 마을이야. 신장으로 들어가면 신교의 세력권이고, 대공자와 이공자가 거침없이 활동을 시작할 거야. 설마 지금처럼 대원들 몇을 보내 경고만 계속할 거라 믿는 건 아니겠지?”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좋아. 다음번 만날 때도 멀끔한 모습으로 볼 수 있기를 바라네.”

* * *

삐이익!

여기저기서 고막을 찌르는 호각 소리가 울렸다.

울창한 나무숲을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강한월 일행의 뒤로 검은 피풍의를 걸친 검수들이 따라붙었다.

“가린! 이번엔 망설이면 안 된다. 이들은 흑마대의 상급 대원들이야!”

“아, 몰라요!”

숨이 턱 밑까지 찬 진가린은 대답하기도 힘들었다.

적들의 수준이 확연히 높아진 것은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따라붙는 속도가 이전과 달랐고, 싸움을 시작하기 전부터 짙은 살기가 신경을 자극했다.

그러게 구 장로에게 도움을 청하라니까!

생각 좀 해보겠다더니, 광군영은 여전히 고집불통.

덕분에 피 말리는 도주를 계속하게 된 것이다.

소요자 할아버지 덕분에 공력이 늘지 않았으면 난 벌써 죽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신법을 펼쳤지만, 어느새 사방을 둘러싼 흑의인들.

강한월과 광군영이 대단한 신위를 발휘해 적들을 베어 넘겼건만, 새로이 등장하는 검수들의 수가 더 많았다.

쐐애액.

채앵.

콰아앙.

웬만하면 검기를 쓰지 않는 강한월이 빛줄기를 사방에 뿌렸고, 광군영의 장력이 질풍처럼 주위를 휩쓸었지만… 그 틈을 뚫고 검 몇 자루가 진가린에게 쇄도했다.

나도 이젠 못 참는다!

푸욱.

흑의인들의 검격 사이로 보이는 흐름에 따라, 진가린은 상대의 심장에 백학을 꽂아 넣었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핏물을 뒤집어쓰며 그녀의 검이 다음 상대를 노렸다.

계속되는 싸움.

사방에 널브러진 흑의인의 숫자가 스물을 넘어갈 즈음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렸다.

삐이익~

일사불란하게 뒤로 물러서는 흑의인들.

한숨을 돌린 진가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을 포위한 적들의 수는 족히 오십은 돼 보였다.

게다가 강렬한 마기를 뿜어내는 고수들은 아직 참전하지 않은 상황.

‘아 씨. 이번엔 진짜 한 칼 제대로 먹겠는데….’

위험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흑의인 한 명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한숨을 삼켰다.

그때 그 흑의인이 천천히 전면으로 나섰다.

“흑철기린 광군영. 오랜만이다.”

“그래, 오랜만이군. 흑마대 대주 종오.”

“명색이 우리가 친구 사이인데… 계속 무의미한 싸움을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친구라. 하루가 멀다 하고 습격을 계속한 놈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었어. 명령을 받았으니까. 그냥 이쯤에서 물건을 넘기는 게 어떻겠나?”

“싫은데.”

“친구라서 하는 소리야. 자네들이 그동안 우리 대원들 가급적 살려 놓은 것이 고맙기도 하고. 흑마대의 임무는 오늘까지거든. 내일부턴 무시무시한 놈들이 올 거야.”

“마신환을 자네에게 넘겨도 무시무시한 공격은 계속 받게 될 것 같은데?”

“뭐, 그렇긴 해. 이공자 측에서 보복을 할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절반의 위협은 사라지는 거 아닌가. 우리가 보호해주겠네.”

“됐고. 할 말 다 했으면 그만 꺼져. 그리고 다음부터는 대공자에게 직접 오라고 해.”

“대공자가 오긴 올 거야. 하지만 그를 만나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아. 우리가 빠지면 흑풍철마대(黑風鐵馬隊)가 나설 거야. 그리고 이공자 측에선 환검(幻劍)들이 준비하고 있다 들었네. 자네도 알잖나? 그놈들 완전히 미친놈들이라고.”

“정보는 고맙고. 그래서 어쩔 거야? 한판 붙을 거야, 아님 이쯤에서 빠질 거야?”

“빠질 거야. 흑철기린하고 정면으로 붙을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 대공자가 움직일 시간을 버는 임무는 충분히 달성했고.”

말은 빠지겠다고 했으나, 흑마대주 종오는 계속해서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광군영은 종오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대화하는 척하며 기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강한월은 상관없지만, 분명 진가린에겐 쉴 시간이 필요했다.

—종오. 이쯤 했으면 됐어. 고맙다.

—벌써? 좀 더 쉬어도 되는데. 우리가 물러나면 질풍대 놈들이 들이닥칠 거야. 너 질풍대 대주하곤 친하지도 않잖아?

—차라리 빨리 부딪히고 제대로 쉬는 게 나아.

—조심하게. 대공자나 이공자 둘 다 제정신이 아니야. 지금까진 번갈아 공격했지만 십만대산에 가까워질수록 난장판이 될 거야. 살아서 보자고.

전음으로 속마음을 전한 종오가 오른손을 쳐들자, 흑마대 전원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진가린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으나, 잠깐뿐이었다.

흑마대가 사라진 곳과는 반대 방향에서 새로운 기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흑마대주가 준 정보가 조금 잘못된 것 같군.”

“왜? 질풍대가 곧바로 들이닥칠 거라고 알려줬는데?”

“그래. 하지만 질풍대만 온 것이 아닌 것 같아.”

광군영과 진가린이 고개를 돌려 강한월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군데군데 횃불을 밝히고 다가서는 질풍대의 후면, 검붉은 장포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 다섯 자 길이의 대도를 등에 메고 서 있었다.

“구천마가 하우서 가주께 인사 올립니다.”

“흑철기린 광군영. 정말로 일을 시끄럽게 만드는구나.”

광군영에게 짧게 답한 백발의 노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강한월을 노려보았다.

“흑시에서부터 신경이 거슬러 누군가 했더니… 네놈이 바로 삼 년 전 본교에서 소란을 피웠던 그 녀석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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