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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39화 (39/210)

039화. 마교로 가는 길 (3)

* * *

구천마가 가주의 가시 돋친 말에 강한월은 멋쩍은 듯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벌써 삼 년 전 일인데… 아직 분이 안 풀렸나?

싸늘하게 강한월을 응시하던 백발노인은 억지로 표정을 풀고 광군영을 향해 말했다.

“광군영. 비록 천마의 제자도 아니고 팔대 마가의 직계도 아니지만, 자네는 우리 신교의 동량이자 미래이지. 이번에 마신환을 찾아온 것도 매우 큰 공이고.”

“요점만 말씀하시지요.”

“하하, 좋다. 그런 직선적 성격 또한 마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지. 어쨌거나 이공자를 지지하는 우리는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하네. 자네의 실력과 공에 어울리는 제안을.”

“마신환에 관한 것이면 시간 낭비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건 천마님께 드릴 거니까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닐세. 마신환이 천마께 전달되면 이번 후계 경쟁이 결론 없이 끝나게 될 거야. 그럼 어찌 되는지 아는가? 이런 내분과 내전이 앞으로도 반복해서 일어날 거란 말일세. 불행한 일이지. 차라리 이번에 정리되는 것이 좋아.”

“후계자는 천마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천마께서 후계자를 결정하실 거라면 나를 포함한 마가 가주들이 감히 나설 수 있었겠는가?”

구천마가 가주의 말이 맞았다.

천마는 뒷짐 지고 구경하고 있었고, 은근히 대공자와 이공자의 싸움을 부추겼다.

마신환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벌어졌을 싸움.

“그 제안이라는 것은 뭡니까?”

“힘으로 빼앗을 수도 있지만, 자네에게 기회를 주고 싶네. 자네 손으로 마신환을 이공자께 바치게. 그럼 명분도 살고 중립을 지키고 있는 세력들에게도 좋은 신호가 될 테니까. 이공자는 자네의 안전을 책임짐은 물론 향후 부교주 자리를 약속한다 하셨네.”

“그런 자리, 제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아실 텐데요.”

“그래, 그래야 자네답지. 그렇다면 교를 위해 결정하게. 누가 교를 더 잘 이끌 수 있을지.”

“이공자가 대공자보다 더 낫다는 말씀입니까?”

“대공자는 타고난 무공의 천재이다. 하지만 너무 빠른 진전은 위험을 내포하는 법. 그는 이미 마기가 골수에 스며들기 시작했네.”

“천마신공을 삼 단계 이상 연마하면 누구나 거치는 과정 아닙니까? 이공자도 삼 단계에 이르면 마찬가지 상태에 이를 텐데요?”

“아니, 이공자는 달라. 새로운 심법을 창안하여 중단전의 마기가 골수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잘 제어하고 있다네.”

“새로운 심법을? 그게 사실입니까?”

광군영은 물론 곁에 서 있던 강한월의 표정도 변했다.

성정이 마기에 잠식되는 것은 마공의 근원적인 문제.

역대 천마의 삼 분의 일도 피해 가지 못했고, 탈마의 경지에 오른 원로들도 이 문제 때문에 구마동에 갇혀 지내는 것인데… 아직 젊은 이공자가 해결책을 찾았다고?

“사실이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공도 창안했지. 진짜 천재는 대공자가 아니라 이공자일세. 자,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마성에 휩싸여 미치광이가 될 대공자인가, 아니면 새로운 신교의 미래를 열 이공자인가?”

하우서는 광군영이 이공자를 선택할 것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판이었다.

광군영으로부터 어떤 답도 듣지 못한 그는 화를 내며 발걸음을 돌렸다.

하우서의 뒷모습이 언덕 너머로 사라진 후, 강한월이 광군영에게 물었다.

“구천마가 가주가 메고 있던 칼. 대단한 보도(寶刀)같던데… 원래 도법을 쓰시나?”

“아닌데? 구천마가는 원래 검으로 유명한 곳이잖아.”

누굴까?

검을 쓰는 가주가 애지중지 지니고 다닐 정도로 귀한 보도를 선물한 사람은?

천마신교 천년 역사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마성 침식을 이공자가 해결했다고?

강한월의 눈빛이 깊어졌다.

무언가 냄새가 났다.

* * *

피로 얼룩진 질주는 계속됐다.

길이 있는 곳에서는 온몸을 시커먼 갑옷으로 감싼 흑풍철마대의 공격이 있었고, 길이 없는 곳에서는 살수 부대인 환검들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잠을 잘 시간, 밥 먹을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던 흑마대나 질풍대와는 달리, 이들은 처절하고 치열하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흑풍철마대의 시간.

콰아앙!

광군영의 육합흑철마장이 작렬했다.

말 위에서 떨어진 철마대원이 바닥을 굴렀다.

쓰러졌던 철마대원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순간, 뱀처럼 휘어져 날아든 강한월의 검기가 갑옷의 빈틈을 파고들어 경동맥을 갈랐다.

쐐애액.

털썩.

강한월과 광군영이 손발을 맞춰 또 한 명의 철마대원을 쓰러트렸다.

무거운 갑옷 때문에 움직임이 둔한 그들은, 강한월의 귀신 같은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반면 진가린은 고전하고 있었다.

철마대원이 휘두르는 단창의 흐름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으나, 문제는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

육감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 검을 찔러 넣어도, 두꺼운 철갑에 번번이 막히는 것이었다.

백학에 검기를 일으키면 철갑을 헤집을 수 있겠으나, 이제 막 검기에 눈을 뜬 초보였기에 육감과 검기를 동시에 운용하기도 버거웠다.

송곳처럼 찔러오는 단창을 피하자, 또 다른 단창이 하체를 쓸어왔다.

샤악.

허벅지에서 화끈한 작열감을 느끼며 순간 무릎이 휘청거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날아드는 단창.

쐐애액.

타앙.

어디선가 날아든 돌 조각 하나가 그녀의 목덜미로 쇄도하던 단창을 튕겨냈다.

한숨을 돌린 진가린이 검을 휘둘러 갑옷의 철판을 연결하는 끈을 끊고, 벌어지는 틈으로 일격을 꽂아 넣었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를 피해 고개를 돌릴 때, 다시 한번 돌 조각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타앙.

또 한 번 단창을 막아준 돌 조각.

물에 젖은 솜처럼 온몸이 무거웠지만 진가린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비록 무심한 것 같지만, 대장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 주는 것이다.

등 뒤는 강한월에게 맡기고 그녀는 앞만 보고 검을 들었다.

마음이 가벼워진 만큼 진가린의 백학은 더 날카로워졌다.

‘휴우, 아주 신났구나.’

나무 그림자 속에 녹아 있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몇 차례 도와줬더니, 저 여인은 아예 대놓고 도와 달라는 모양새였다.

손에 쥔 돌조각을 만지작거리며 사내는 고민을 했다.

‘계속 보호를 해줘야 하나? 도움이 안 되는 일행 같은데 차라리 이참에….’

그 순간 진가린이 또다시 위험에 빠졌고, 사내는 혀를 차며 돌조각을 날렸다.

어떤 수를 쓴 것인지, 빛살 같은 속도로 사내의 손을 떠난 돌조각은 어떤 소리나 기척도 없이 나무 사이를 날아갔다.

몇 그루 나무를 돌아 방향을 바꾼 후, 진가린의 허리를 찌르고 들어오던 단창을 가격했다.

타앙!

그것을 마지막으로, 흑풍철마대가 물러서기 시작했다.

광군영과 강한월이 보여준 실력은 과연 대단했다.

그럼에도 사내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내일쯤이면 구마동 원로들이 도착할 텐데, 이들이 버텨낼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렵겠지.

아쉽지만 저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았다.

나무 그림자에서 분리되어 나온 사내가 몸을 돌렸다.

빠르고 은밀하게 숲을 빠져나가 인적이 없는 산길에 들어섰다.

그제야 안개처럼 모호했던 사내의 모습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갓 서른쯤 되었을까?

평범한 무복을 걸친 모습이었지만 자연스레 위엄이 솟아났다.

지혜가 담긴 맑은 눈빛. 굳게 다문 입술에선 단단한 의지가 느껴졌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기도를 가다듬자, 위엄 어린 모습에 평범함이 덧씌워졌다.

막 발걸음을 떼려던 순간.

사내의 눈에 당혹의 빛이 감돌았다.

서너 장 떨어진 길 위에 강한월이 서 있는 것이다.

“날 따라온 거요?”

“도움을 받았으니 인사는 드리는 게 도리인 듯해서요.”

“딱히 인사를 받으려고 도운 건 아니오. 게다가… 보아하니 불필요한 도움이었던 것 같군.”

역시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사내는 강한월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불필요한 도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능하면 몇 가지 묻고 싶은 것도 있고.”

“질문이라… 해보시오.”

“저희를 은밀히 돕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격과 도움을 동시에 받으니 종잡을 수가 없군요.”

“마치 내가 누군지 알고 질문하는 것 같소?”

“천마신교의 대공자 아닙니까?”

“신교의 대공자는 마성에 젖은 미치광이라던데? 내가 미친 것으로 보이오?”

“밝히기 싫으면 그냥 넘어가도 됩니다.”

“뭐, 좋소. 인정하지. 내가 신교의 대공자 백일청이오. 은밀히 돕는 이유는 광군영이 마신환을 뺏기지 않기를 바래서이고.”

“이공자에게 말입니까? 조금 전 저희를 공격했던 흑풍철마대는 대공자 휘하로 알고 있는데요?”

“상황이 복잡하오. 강한월 당신을 믿고 다 이야기해줄 수는 없소. 중요한 것은 마신환은 광군영의 손으로 천마께 전달되어야 한다는 거요.”

“구마동 원로 마인들이 개입하면 저희가 버티기 힘들 겁니다.”

“강한월. 신교의 수뇌부 사이에 당신에 대한 소문이 돌았소. 천마님의 대제자인 나도 몇 마디 들을 수 있었지. 내가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당신은 해낼 수 있을 거요.”

“부담스러운 칭찬이군요.”

“명심하시오. 이 모든 일은 단순히 마신환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오. 한마디 충고를 드리자면, 이공자를 믿지 마시오. 아니, 그 누구도 믿지 마시오!”

* * *

쐐애액. 챙. 챙.

채 여명이 밝아오기도 전.

진가린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 뺨을 적셨고, 질끈 깨문 입술에선 피가 배어 나왔다.

‘이럴 순 없어. 어떻게 이럴 수가….’

마인이 휘두른 칼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고통 따위 느낄 틈도 없었다.

한 시진째 이어지는 지옥 같은 혈투.

벌써 몇 명을 쓰러트린 건지… 베고 또 베어도 끝없이 밀려오는 적들.

으아아악!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쥐어짜 내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저항은 거셌지만, 결국 복면을 쓴 마인의 옆구리에 검을 찔러 넣을 수 있었다.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을 뒹굴고 있는 광군영.

통째로 잘려 나간 오른쪽 어깨에선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태산처럼 든든했던 선배였는데.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되는 사람인데….

울컥하는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대장은?

두려운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고, 무릎의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

‘나 때문이야. 나를 지키다가….’

수십 명의 복면인 시체 사이, 절대로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함께 쓰러져 있었다.

가슴에 검 두 자루가 박힌 채 미동도 없는 사내.

강한월이었다.

오한이 밀려왔다.

아래턱이 떨리며 탁탁 소리가 났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 어째서 이래야만 하는데? 그깟 마신환이 뭐라고!”

악이 받쳤다.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때, 뿌연 새벽안개 너머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허허, 그깟 마신환? 네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광군영보다 더 거대한 몸집의 노인이었다.

봉두난발 풀어헤친 머리, 여기저기 낡고 헤진 장포.

행색은 초라했으나 두 눈은 횃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마인보다, 광군영보다도 그리고 구천마가 가주보다도 더 강렬한 마기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정신을 못 차렸냐고? 영감,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야?”

“재밌는 아이구나. 아무리 정신이 나갔기로서니, 감히 나를 영감이라 부르….”

“그래! 나 미쳤다! 대장이 죽고 광 선배도 저 모양인데 내가 안 미칠 수 있어? 나도 죽여! 나도 죽이라고!”

더 이상 남은 힘이 없는 줄 알았건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새로운 힘을 보탰다.

지이잉~

그녀의 백학에서 여태껏 본 적 없는 선명한 검기가 치솟았다.

“난 죽을 테지만… 영감도 각오해야 할 거야!”

별빛을 뿌리는 새하얀 검기가 노인을 향해 날아왔다.

만만히 볼 수 없었는지 노인의 눈빛이 깊어졌고, 무쇠처럼 단단한 주먹에서 검은 구체가 뿜어져 나왔다.

콰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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