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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40화 (40/210)

040화. 십만대산 (1)

* * *

찰싹찰싹.

누군가 뺨을 두드리는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떴다.

“진가린. 정신 좀 차려봐. 괜찮은 거야?”

걱정스런 표정의 광군영이 먼저 눈에 띄었다.

아! 광 선배. 팔이 잘렸었는데…?

오른팔은 다시 제자리에 붙어있었다.

놀랍진 않았다.

죽어서 저승에 왔으니 팔도 다시 생겨났겠지.

“선배. 다행이에요. 우리는 함께 천당에 왔으니. 그런데… 대장은 안 보이는 걸로 봐서 지옥에 떨어졌나 봐요?”

“진가린. 무슨 헛소리냐?”

조금은 불쾌한 듯한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헤헤, 다행이다. 대장도 천당에 왔구나.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돌린 진가린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덩치 큰 마인 영감이 강한월 옆에 앉아있지 않은가!

“서, 설마? 제가 저 영감을 죽인 거예요? 하지만 저 악당이 어떻게 천당에…?”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분은 우릴 구해주신 권마 어른이시다!”

당황한 강한월과 광군영이 서둘러 진가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권마는 그저 껄껄 웃고 말았으니.

“괜찮네. 원래 환마(幻魔) 노파의 환영술에 걸리면 한동안 정신을 차리기 힘든 법이네.”

“환영술? 그럼… 우리 죽지 않은 거예요?”

“물론 죽지 않았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구마동이 열리자 금제에 갇혀 있던 노마(老魔)들이 뛰쳐나왔다.

마신환 쟁탈전 때문에 광군영이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권마와 천변마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른 노마들을 멀찍이 따돌리며 앞서 달리던 중 문제가 발생했다.

하필 이 중요한 시점에 천변마의 마성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변마의 광기를 가라앉히느라 이틀을 소비한 권마는 다시 전력 질주를 시작했고, 결국 어젯밤 이곳에 도착했다.

다행히 다른 노마들보다 먼저 도착했다 안도했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권마 못지않게 전력으로 달려온 노마가 있었으니, 바로 환마.

“환마 그 노파는 이공자를 지지하는 환영마가의 원로이지.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환영술 영역이 펼쳐진 후였다.”

마음 깊숙한 곳의 두려움을 소환하는 환마의 영역 공격은 소리 없이 덮쳐 왔다.

광군영은 마신환을 손에 쥔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고, 진가린은 상상 속의 적들을 상대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대장은요?”

“놀랍게도 강한월 이 친구는 환영술에 걸리지 않았더군. 정말 대단해. 누구나 마음속에 두려움을 품고 살기 마련인데, 아마 너희 대장은 두려운 것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야. 하하하.”

강한월은 말없이 웃고 말았다.

두려운 것이 없어 환영술에 걸리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랄까?

매일 밤 너무나 생생한 악몽에 시달리다 보니 내성이 생겼을 뿐.

“어쨌건 상황이 급박했기에 나는 서둘러 환마를 찾았지. 영역 공격을 펼치는 데 집중하고 있던 그녀는 내 주먹을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영역을 풀고 도망치더군. 그 일을 마치고 이 자리로 오는데, 환영이 덜 풀린 네가 다짜고짜 검기를 날리더구나.”

“아, 죄송해요. 전 정말 몰랐어요.”

“괜찮다. 환마 그 노파 때문이지 뭐. 그나저나… 자네들 이제 어쩔 셈인가? 환마는 물러갔지만 대공자와 이공자를 지원하는 노마들이 아직 예닐곱은 더 있거든.”

“사부님들이 계속 도와주시면 어떻게든….”

광군영이 기대를 담고 도움을 청했지만 권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여의치 않구나. 이번에 구마동을 나오면서 우리 노마들끼리 한가지 약속을 했다. 단 한 번씩만 나서기로 말이야. 마성 폭주의 위험이 있으니 과도한 개입을 않기로 한 거다. 난 이미 한 번 나섰으니 더 이상은 안 돼. 잠시 후면 천변마가 도착하겠지만, 그 친구가 도울 수 있는 것도 한 번뿐이다.”

“그럼 사부님 생각은…?”

“까짓 마신환 줘버리면 어떠냐? 어차피 군영이 넌 천마 자리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공자와 이공자 중 누가 천마가 되던 솔직히 우리가 상관할 바….”

“그럴 수 없습니다.”

답변은 강한월의 입에서 나왔다.

권마가 당황할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어째서인가?”

“자세한 말씀을 드릴 순 없지만 대공자와 이공자 모두 믿을 수 없습니다. 마신환은 반드시 천마께 직접 전달되어야 합니다.”

“흠…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것 같군. 그럼 한 가지만 묻겠네.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문제인가?”

“그렇습니다.”

“좋아. 더 이상 권유하지 않겠네. 노마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상의하도록 하지. 그토록 중요한 문제라면 중간에 개죽음을 당하면 안 될 테니.”

“저에게… 계획이 있습니다.”

* * *

하루 동안 푹 쉰 강한월 일행은 야밤을 틈타 은밀히 움직였다.

빠른 속도에는 변함없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방향이 달랐다.

십만대산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구마동 노마들을 피하기 위해 우회로를 택한 것 같았다.

대공자와 이공자를 지원하는 마가들과 노마들은 당황했다.

길목만 지키면 되는 것이었는데, 추적해서 포위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쫓고 쫓기는 질주가 시작됐다.

* * *

이틀째 되던 날.

선두에 선 권마의 뒤를 쫓아 강한월 일행이 달리고 있었다.

헉헉헉헉.

진가린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소요자의 도움으로 공력이 한층 진보했지만, 강한월과 광군영의 속도에 맞추자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쉬었다 가자고 할 수도 없는 일.

뒤에서는 강력한 마인들이 점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더 달렸다.

이젠 죽어도 더는 못 간다고 외치려는 순간, 갑자기 권마가 달리기를 멈췄다.

“여기까지인가 보다. 이미 포위됐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엄청난 마기가 사방에서 조여오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난 쉬어야겠다.

진가린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순간,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우회로를 택하면 길이 열릴 줄 알았나? 기껏해야 이틀 시간을 끈 것이 다인 것을. 이제 그만 포기하고 대공자께 마신환을 받쳐라!”

음성의 주인공은 귀마(鬼魔)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마(笑魔)의 웃음소리.

“호호호호, 귀마 오라버니는 무슨 그런 재밌는 말씀을? 마신환은 당연히 이공자의 것인데요. 호호호호.”

음공이 가미된 웃음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파고들었지만, 귀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호통으로 되받았다.

“닥쳐라! 능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대공자가 차기 천마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을!”

“호호호, 마성의 저주로부터 신교를 구할 수 있는 건 이공자라는 걸 아실 텐데요!”

“이것들이 진짜….”

분노한 귀마의 그림자가 들썩이며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이공자 지지자들이 소마 주변으로 모여들며 맞설 준비를 하려는 찰나.

“그만들 하십시오. 이미 날 샜습니다!”

보다 못한 광군영이 큰소리로 외치자, 막 이매(魑魅) 영역을 펼치려던 귀마가 손을 멈췄다.

“날이 새다니?”

“그렇게 다투실 필요 없습니다. 마신환은 여기 없거든요.”

“마신환이… 없어? 왜? 어째서?”

귀마의 마기가 광군영을 향해 뻗쳐오자, 권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마신환은 십만대산으로 가는 중이야. 강한월이 가지고 갔지. 벌써 삼 일 전에 출발했으니 지금 쫓아가도 이미 늦었다.”

“강한월? 그럼 여기 있는 강한월은?”

귀마가 손을 들어 강한월을 가리켰다.

그 순간, 강한월의 몸에서 뿌연 연기가 솟아나더니 얼굴과 체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거 좀 서운한데. 나 천변마를 못 알아보다니.”

* * *

사흘 전.

뒤늦게 도착한 천변마에게 자신의 모습으로 변신해줄 것을 부탁한 후, 강한월은 홀로 십만대산으로 향했다.

대공자와 이공자의 척후들은 휴식을 취하는 광군영의 모습을 보고 안심하고 있었고, 강한월은 은신술을 써 몰래 빠져나갔다.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천재들의 비정상적인 진보, 새로운 무공 창안, 보물 같은 칼… 그리고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대공자의 말.

이 모든 것에서 회귀자의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후계 경쟁이나 마신환 쟁탈전에 혈승이 개입되어 있다면, 그들의 뜻대로 놀아줄 수는 없는 법.

머뭇거리는 광군영에게서 마신환을 받아 쥐고 지체 없이 길을 나선 것이다.

마신환을 찬 팔목이 저릿저릿했다.

마인 아닌 자를 거부하는 팔찌의 공능.

살을 태우고 뼈를 녹이겠다는 듯, 폭력적인 마기가 끊임없이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마공을 익히지 않은 이상 버틸 수 없는 기운지만, 마불진경을 연마한 강한월은 견뎌내고 있었다.

통증은 지독했지만, 결국은 이 기운이 득이 될 것을 알았기에 입가엔 흐릿한 미소마저 그려졌다.

십만대산까지는 아직도 먼 길.

바람처럼 질주하던 강한월의 신영이 한층 더 빨라졌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속도였다.

* * *

십만대산.

천마의 거처인 광명정과 함께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히는 신녀궁.

일반인은 고사하고 교도들의 접근마저 제한된 비처(秘處) 중의 비처.

저녁 예식을 올리고 처소로 돌아온 신녀 옥수련이 거추장스러운 제례복을 벗고 탁자에 앉았다.

신녀의 거처답게 사방은 고요했고, 그윽한 차향만이 퍼져 나갔는데….

“혼자 마시기에는 아까운 차예요. 먼 길 피곤할 텐데 차나 함께 하시죠.”

차향을 음미하며 담담히 내뱉는 혼잣말.

하지만 실은 혼잣말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와 탁자에 앉은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녀님. 역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아뇨, 놀랐어요. 이곳 경비가 제법 삼엄한데 용케도 조용히 들어오셨군요. 역시 강 소협의 실력은 끝을 알 수가 없네요.”

“하지만 신녀님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는걸요.”

“명색이 신녀니까요. 무공은 보잘것없지만, 대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죠.”

옥수련이 따라주는 찻잔을 들며 강한월이 미소를 지었다.

마교의 제사장이란 것을 믿을 수 없게도, 눈앞의 이 여인은 따뜻하고 다정했다.

분명 적지 않은 나이일 텐데, 주름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고, 마공을 익혔음에도 풍기는 기운은 포근하고 섬세했다.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를 보는 느낌.

강한월의 눈에는 마교의 신녀가 그렇게 보였다.

“영영이는 잘 지내나요?”

“네. 즐겁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항주에도 한 번 다녀왔고요.”

“그렇군요. 강 소협께 감사드려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해주세요. 세상에는 천마신교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노력하겠습니다.”

“좋아요. 이제 강 소협의 이야기를 해보세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아무래도… 마신환 때문이겠죠?”

“역시 알고 계셨군요.”

“교의 일에 관여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소식까지 못 듣는 것은 아니니까요.”

강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뿐, 공식적으로는 천마와 동등한 위치.

천마신교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데다가 사물을 꿰뚫어 보는 혜안까지 지녔으니,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녀를 찾는 것이 정답이었다.

어차피 십만대산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고.

“대공자와 이공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대공자와 이공자라. 강 소협이 갑자기 신교의 후계 구도가 궁금해졌을 것 같지는 않고… 역시나 당신이 하는 그 일 때문인가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천마신교 내에서 회귀한 혈승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천마 혼자만은 아니었다.

몇 년 전 강한월이 이곳에 왔을 때, 천마와 함께 그를 맞아준 것이 신녀 옥수련인 것이다.

회귀자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천마를 설득해준 것도 그녀였고.

“글쎄요. 그 아이들에 대해선 확실한 의견을 드리기 어렵군요. 범상치 않은 천재들이고 일반인을 훌쩍 뛰어넘는 발전을 거듭하는 것은 분명한데… 후계자로 거론되는 천마의 제자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니까요.”

“특별히 회귀자와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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