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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41화 (41/210)

041화. 십만대산 (2)

* * *

쪼르르르.

강한월의 잔에 차를 따르며 옥수련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공자는 최근 몇 년간 두문불출하고 있어요. 우연의 일치겠지만, 강 소협이 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그즈음부터요. 그래서 마성에 젖었다는 소문이 돌았죠.”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던 겁니까?”

“아니, 사실이에요. 지금은 극복한 것으로 보이지만. 하지만 언제라도 다시 마성에 빠질 수 있죠. 천마신공이 단계를 높여갈수록 골수에 치민 마기가 끊임없이 인격을 잡아먹으려 할 테니까요.”

“그래서 마신환이 중요한 거군요?”

“알고 있었군요? 그래요. 마신환은 마성의 득세를 막는 효능이 있죠. 물론 다른 중요한 공능들도 있지만.”

“이공자는 어떻습니까?”

“그 아이는… 본성이 다정한 아이예요. 신교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품이랄까.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고 베푸는 것을 기뻐하죠.”

“대공자와는 다르게 마성을 극복하는 심법을 스스로 개발했다 들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군요. 사실이라면 대단한 일이죠. 역대 천마들도 성공하지 못한 것인데. 하지만 천마께서는 그 소문을 믿지 않더군요. 천마신공의 신력을 제한하지 않고 마성을 통제할 심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천마께선 어떻게 지내십니까?”

“천마는 천마죠. 점점 세상일엔 관심이 없어지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 눈엔 허무에 집어 삼켜지는 것으로 보이겠죠. 마도에 동화되어 가는 것. 그것이 천마의 길이니까요.”

“마신환이나 회귀자에 관한 것 말고도 천마를 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 안내할게요. 하지만 오늘은 좀 쉬세요. 대공자와 이공자에 대해서도 해줄 이야기가 많으니, 내일 좀 더 대화를 나눈 후에 함께 천마를 뵈러 가도록 하죠.”

“감사드립니다.”

옥수련이 신녀궁의 궁녀를 불러 그를 숙소로 안내할 것을 지시했다.

신녀궁에서 옥수련의 지위와 명령은 절대적인 것.

외간 남자를 본 궁녀는 몹시 놀란 표정이었으나,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안내했다.

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잠시 후,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옥수련의 방으로 들어왔다.

소영영과 마찬가지로 차기 신녀 후보 중 한 명인 유선이었다.

“신녀님. 방금 복도 지나간 남자는 누구예요? 그 사람 맞죠? 소영영 언니가 따라갔던 사람.”

“선아. 이 시간에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을….”

“아앙, 신녀님. 알려주세요. 그 남자 맞는 거죠?”

“휴우. 그래 맞다. 조용히 천마를 뵐 일이 있어서 온 것이니 이 이야기는 절대로 궁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그럼요. 제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요. 그나저나 아까 그 남자 잘생겼던데요? 대공자나 이공자보다 더 멋진 것 같아요. 인상이 좀 차갑긴 하지만….”

“선아. 네가 관심 가질 사람이 아니래두.”

* * *

야심한 밤.

신녀궁을 빠져나온 유선은 은밀히 이공자의 거처를 찾았다.

한두 번 와본 것이 아닌 듯 거침없는 모습이었고, 침소를 지키던 이공자의 심복들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유선. 누구보다 성결해야 할 신녀 후보가 이렇게 남자의 침실에 들이닥쳐도 되는 건가?”

말도 없이 함부로 찾아온 것이 못마땅했는지 이공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할 시간 없으니 헛소리는 집어치워요. 중요한 일로 온 거니까.”

“도대체 뭔 일인데, 신교를 쥐고 흔드는 실세께서 이렇게 호들갑을….”

“강한월이 왔어요.”

“뭐라고? 말도 안 돼!”

이공자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광군영과 동행하던 강한월이 마신환을 가지고 홀로 십만대산을 향했다는 전서가 도착한 것이 바로 오늘.

“전서구가 도착한 지 몇 시진 지나지도 않았어. 설마 강한월이 나는 새보다 더 빠르다고?”

“날개라도 달렸나 보죠. 여튼 내 눈으로 직접 본 거니까.”

“지금 어디 있는데? 천마를 만났나?”

“천마는 아직이에요. 지금은 신녀궁에 있어요.”

“하필 거기에… 흠.”

천마가 후계 경쟁을 묵인한 후로 대공자와 이공자는 거칠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신녀궁을 함부로 들락거릴 수는 없었다.

무력을 행사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마신환이 천마의 손에 들어가면 안 돼요. 천마가 마신환의 공능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고요. 후계 후보들에게 일임해 놨을 때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해요.”

“안다고. 그러니까 골치가 아픈 거지. 그나저나 강한월은 신녀와 무슨 관계길래 거기에 있는 거야?”

“그건 나도 몰라요. 십만대산을 떠난 소영영과 함께 뭔가를 한다는 것만 알 뿐.”

“그러니까 그 일이 뭐냐고?”

“모른다니까!”

밝고 청순해 보이던 유선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이공자는 뜨끔한 표정을 지을 뿐 마주 화를 내지 못했고.

차기 대권을 노리는 이공자가 고작 어린 여인 앞에서 꼬랑지를 마는 모습.

누군가 봤다면 눈을 의심할 만한 일이었다.

“진정하고 방법을 찾아보자고.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은 유선 당신의 머리에서 나온 거니까.”

“나한테만 의존하지 말고 당신도 머리를 좀 굴려봐요. 대공자가 아닌 당신을 선택한 걸 후회하게 만들지 말고.”

뻔한 격장지계였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대공자가 언급되자 이공자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유선. 그렇게 나를 자극할 필요 없어. 네가 도움을 주든 말든 결국 천마가 되는 것은 나다.”

“의지는 좋군요. 그래서 뭘 어쩔 건데요?”

“내가 직접 나설 수는 없으니 구마동 원로의 도움을 받아야겠지. 혈마(血魔)를 보내겠다.”

“혈마라… 완전히 미친 악귀라던데, 통제할 수 있겠어요?”

“네가 알려준 심법이 유독 혈마에게는 더 잘 통하더군.”

“좋아요. 성공을 빌어요.”

짧은 기원을 남기고 유선이 떠났다.

그녀가 사라진 공간을 한동안 노려보던 이공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건방진 것. 두고 보자. 내가 천마가 되기만 하면….”

* * *

이공자의 처소에서 나온 유선은 신녀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못 미더웠다.

혈마의 가공할 위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에는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방향을 정했다.

오늘 밤은 매우 바쁘게 뛰어다녀야 할 것 같았다.

* * *

신녀궁 한편의 외진 객방.

며칠을 쉬지 않고 달린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다.

하지만 강한월에게는 잠을 청할 여유가 없었다.

손목에 차고 있는 마신환으로부터 파괴적인 기운이 끊임없이 침투하고 있었다.

천마를 만나 마신환을 넘길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상황.

고통은 이미 익숙해졌지만, 쌓여가는 마기의 처치 방법이 고민이었다.

본신 공력으로 연화할 수 있다면 기연이 될 것이고, 그러지 못하다면 치명적인 독이 될 터.

몸 안에서 다른 기운과 충돌하기 전에 결론을 봐야 했고,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마불진경의 요체를 되뇌며 체내의 마기를 깊이 관조할 때, 마신환으로부터 익숙지 않은 떨림이 전해졌다.

으르렁거리는 느낌.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하고, 경고를 보내는 것 같기도 한 울림.

강한월은 즉시 명상을 멈추고 주변을 경계했다.

아주 미세한 느낌이었으나, 그것은 분명한 혈향이었다.

혈교와의 싸움에 익숙한 강한월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눈치채지 못했을 은밀한 향기.

성스러운 신녀궁에서 피 냄새가 풍겨서는 안 되는 것인데…?

안개가 퍼지듯, 먼 곳에서부터 서서히 흘러온 혈향이 침상 위로 번졌다.

일렁이는 촛불을 따라 흔들리는 그림자에 붉은 기운이 스며들 때, 강한월이 빛살처럼 검을 뽑았다.

쐐애액.

항마의 기운이 담긴 금빛 광채가 뻗어가며 붉은 기운을 갈랐다.

물방울이 구르듯 빠르게 검을 피한 기운이 한 곳에 모여들더니 서서히 사람의 형체로 변해갔다.

“의외로… 감이 좋은 놈이군.”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진득한 목소리가 붉은 장포를 걸친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온통 붉은 눈동자, 붉은 입술.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었으나, 강한월은 이 노인의 별호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혈마.

“신녀궁의 출입 허가는 받으셨습니까?”

“신녀의 이름은 장애물이 될 수 없다. 혈향은 어디서나 피어나는 것.”

노인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공중에 붕 떠 있는 뭉글거리는 피가 쇠꼬챙이처럼 날카롭게 변하며 강한월에게 쇄도했다.

샤아악.

강한월은 금광을 두른 검으로 날아오는 핏줄기를 베었다.

파지직 소리를 내며 쇠꼬챙이는 붕괴됐으나, 안개처럼 퍼졌던 핏방울들이 다시 뭉글뭉글 뭉쳐 들었다.

쳇, 칼로 물 베기인가…?

강한월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교에는 천마신공처럼 정통의 힘을 추구하는 무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류의 사이한 마공은 오히려 상대하기가 곤란한데.

형체를 갖춘 핏줄기가 이번엔 채찍처럼 유연하게 휘어지며 날아왔다.

다시 한번 번쩍이는 금광, 그리고 다시 한번 퍼졌다 뭉쳐지는 핏방울.

이런 식이라면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역시나 혈마의 본체를 공격해야 하는데, 마교의 본산에서 마인을 공격하는 것은 영 내키지 않는 일.

게다가 신성한 신녀궁에서라면 더더욱.

강한월이 고심하는 사이 혈마가 핏물을 다시 한번 게워냈다.

많아진 핏물은 여러 개의 핏줄기를 만들기에 충분했고, 수십 개의 붉은 송곳으로 변하여 일제히 날아들었다.

검을 휘둘러 절반의 피 송곳을 부수며, 왼손으로 일으킨 회선장으로 나머지 송곳을 가두려 했다.

하지만 혈마의 신통은 구마동 원로 중에서도 상위급.

회선장과는 역방향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강하게 충돌했다.

콰아앙!

기와 기가 부딪히는 강렬한 폭음이 터졌다.

터져 나온 핏방울들이 날아들었고, 금빛 호신강기를 둘러 막아내는 강한월.

혈마는 가소로운 듯 웃음을 흘렸지만, 회선장력의 목적을 달성한 강한월도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다시 날아드는 핏방울들.

허공섭물이나 이기어검과 같이 기를 운용하는 것이라면 공력의 소모가 막대할 테지만, 혈마의 방식은 달랐다.

핏방울과의 영적인 연계.

공력의 소모 없이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피를 다룸이 분명했다.

그리고 혈마가 영적으로 지배하는 피는 그 자신의 피만은 아니었다.

혈마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정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주술과 주문인 듯.

그에 맞춰 강한월의 몸속을 흐르는 피가 들끓었다.

팽창되는 피.

부풀어 오르는 혈관.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강한월은 망설이지 않고 검으로 손바닥을 그었다.

주르륵 피가 흘러내리자, 혈관의 압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혈마의 새빨간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강한월의 임기응변에 제법 감탄한 듯했다.

하지만 그뿐.

몸속의 피는 아직 많았고, 피가 모두 뽑히고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

다시 한번 혈마의 입술이 들썩거렸고, 강한월의 고심은 깊어 갔다.

고위 마인이 분명한 노인을 공격해야 하는 것인가?

이 노인의 배후엔 누가 있을까?

이번 싸움이 앞으로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지.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며 피가 끓어오르자, 강한월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가급적 빠르게 제압해야겠다 마음먹고 금빛 검기를 쭈욱 뽑아 올릴 때, 다행히도 기다리던 도움이 찾아왔다.

덜컹 급하게 문이 열리고, 신녀 옥수련이 뛰어들었다.

일부러 회선장력을 써서 터뜨린 폭음이 멀리까지 들렸던 것이다.

온통 핏자국이 가득한 방안의 모습을 보고 신녀는 고운 눈썹을 찌푸렸다.

“혈마! 당장 멈춰요!”

위엄 있고 성스러운 호통이 터졌지만, 혈마는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미쳐 날뛰는 마인을 진정시키는 것은 신녀가 가진 특권이자 공능.

“신녀궁에서 폭력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옥수련의 손에서 밝은 구체가 떠올라 혈마를 향해 날았다.

무공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

마공을 익힌 신교의 교인에게만 통하는 신력(神力)이 혈마의 몸을 휘감았다.

쿠웅.

그대로 굳어버린 혈마가 쓰러졌고, 강한월을 노리며 공중을 부유하던 핏물이 힘없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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