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십만대산 (3)
* * *
“감사합니다.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오히려 제가 사과를 드려야죠. 신녀궁 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게 왜 신녀님 탓이겠습니까? 분란을 몰고 온 제 잘못이지요. 그나저나 혈마라고 부르시던데… 이 노인은 누굽니까?”
“구마동 금제 안에서 생활하던 원로 중 한 명이에요. 마성에 젖어 완전히 이지를 상실했던 분인데….”
“완전히 이지를 상실했다고요? 이상하군요. 실성한 사람 같지는 않던데요?”
“바로 그게 문제예요. 누군가 혈마의 정신이 돌아오게 만든 거죠. 그리고 그자가 강 소협을 공격하라 지시한 사람일 거구요.”
“그렇다면 역시….”
“이공자겠죠.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이공자가 어떻게 강 소협이 여기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냐는 거예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강한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녀궁의 궁인들을 의심해야 하는 일.
신녀 스스로가 밝혀내야 할 문제.
“혈마 노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신통력으로 잠재울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어요. 깨어나기 전에 다시 구마동에 보내 금제를 걸어야 해요. 일단 추궁은 해보겠지만, 혈마의 정신 상태나 성격상 배후를 불 것 같진 않네요.”
“알겠습니다. 저도 굳이 따지고 싶지 않으니 조용히 넘어갔으면 합니다.”
“감사드려요. 방을 옮겨드릴 테니 강 소협은 우선 좀 쉬세요.”
“저보다는 신녀님이….”
“아니, 강 소협이 휴식을 취해야 해요. 내일은 오늘보다 더 힘들 테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공자가 강 소협이 온 것을 알았으니 다른 사람들도 곧 알게 되겠죠. 마신환을 노리는 자들이 있는 것처럼, 강 소협 자체를 노리는 사람들도 많답니다.”
* * *
신녀 옥수련의 예측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아침 해가 뜨기 전부터 신녀궁의 입구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천마의 근위대라 할 수 있는 천마흑풍대의 대주가 먼저 도착하더니, 잠시 후 부교주인 검마가 왔다.
함부로 신녀궁 안으로 발을 들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소리까지 못 지르는 것은 아니었다.
“강한월! 쥐새끼처럼 숨어있지 말고 나와라! 나 천마흑풍대 대주 관길상이 지난 빚을 갚으러 왔다!”
“강한월. 신녀님 그늘로 숨은 것이냐? 그래도 넌 사나이라 생각했는데 실망이군!”
내공이 가득 실린 호통이 방 안까지 들려왔다.
강한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꼬였던 인연들이 여지없이 찾아온 것이다.
삼 년 전 그가 십만대산을 찾았을 때, 무공광인 천마 장철성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비무를 지시했다.
물론 천마와의 직접 비무는 말이 되지 않았고, 천마신교의 후기지수와의 대결이었다.
대공자와 이공자는 폐관 수련 중이었기에, 당시 그의 상대로 지목된 것은 천마흑풍대 대주 관길상이었다.
광군영과 함께 천마신교를 대표하는 젊은 고수.
검으로는 마교 최고라는 부교주 검마(劍魔)의 제자였기에, 검을 주무기로 쓰는 강한월에겐 적절한 상대였다.
부탁하러 찾아온 입장이었지만, 강한월은 적당히 싸울 수 없었다.
마교는 강자존.
실력을 인정받아야 대화도 통할 테니까.
그렇기에 강한월은 천마흑풍대 관길상을 무참히 꺾어버렸다.
천마의 눈빛에 호의가 깃든 것은 기대했던 결과였지만, 대신 부교주 검마의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
쓰러진 제자를 대신해 본인이 검을 들고 나섰다.
체통을 지키라 천마가 호통쳤음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자뻘 젊은이와 같은 조건으로 겨룰 수는 없으니, 자신은 내공을 쓰지 않고 초식으로만 겨루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천마신교의 전통 검술과 금검문 검법의 대결.
내공을 쓰지 않는, 초식의 정교함과 검에 대한 이해도를 겨루는 싸움.
논검(論劍)인 듯 정중하면서도 생사결 못지않게 치열한 반 시진의 공방이 펼쳐졌고….
결과는 검마의 패배.
온몸이 크고 작은 검상으로 뒤덮였지만, 결국 상대의 목젖에 검 끝을 갖다 낸 것은 강한월이었다.
보기 드문 명대결을 펼친 부교주와 강한월에게 찬사가 쏟아졌지만, 패자의 귀에는 놀림과 비웃음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수년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치욕.
그랬기에 강한월이 신녀궁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온 것이다.
“강한월! 십만대산에 찾아올 용기는 있으면서 나와 검을 섞을 용기는 없는 거냐? 네가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는 모르지만, 나와 대결을 펼치기 전엔 어떤 일도 못 할 줄 알아라!”
내공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신녀궁의 궁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잠시 후 신녀 옥수련이 나타났고, 강한월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부교주님, 천마흑풍대주. 정숙을 유지해야 하는 신녀궁에서 이런 소란은 달갑지 않군요.”
옥수련의 점잖은 꾸지람에 관길상은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부교주 검마는 물러서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녀님.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겠소. 허나 내 부교주의 자리에서 물러서는 한이 있더라도 강한월 저자와는 못다 한 승부를 내야겠소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계신 분이 고작 후기지수 하나 때문에 이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허허, 그건 신녀님이 모르시는 말씀. 초식 대결이었단 말입니다! 현 정파 맹주인 위무진도 이길 자신이 있는데, 강한월 저 녀석에게 졌단 말이오. 그날의 치욕을 씻기 위해 하나의 특별한 검술을 창안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그 검술을 시험해봐야만 하겠소!”
“하지만….”
옥수련이 뭐라 반박하려는 사이 강한월이 앞으로 나섰다.
언젠가 한 번은 풀고 가야 할 문제.
게다가 무공에 집착하는 검마의 모습에 호감이 가기도 했다.
음모와 모략의 냄새를 풍기는 대공자나 이공자와는 다른 모습.
“부교주님을 뵙습니다.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흥, 그래도 끝까지 숨지는 않는군. 긴말할 것 없다. 당장 재대결을….”
“부교주님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저에게도 좋은 일이죠. 하지만 천마흑풍대주와 부교주님 모두와 비무를 할 수는 없습니다.”
“좋다. 비무는 나하고만 하는 것으로 하지.”
“사부님!”
관길상이 억울한 표정으로 부교주를 바라봤지만, 이미 뱉어진 말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초식 대결이 아닌 정식 대결을 펼치고 싶습니다. 참관인 없이 단둘이서 싸우는 것으로 하시죠.”
기왕 이렇게 된 것, 강한월은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언감생심 마교의 이인자에게 호승심을 느낀 것은 아니었고.
그간의 진전을 평가받고 싶은 욕심이었다.
절대경의 부교주라면 자신이 어떤 공격을 펼쳐도 다 받아줄 테니까.
“정식 대결? 네가 정녕 미쳤구나. 감히 나와 제대로 붙어보겠다고? 하하하, 좋다! 자고로 목숨을 거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 따라와라.”
앞장서는 부교주를 따라 강한월이 발걸음을 옮겼다.
기회를 놓친 관길상이 분통을 터뜨렸고, 좋은 구경을 놓친 신녀궁 궁인들은 입맛을 다셨다.
옥수련 뒤에 다소곳이 서 있던 유선의 눈에도 아쉬운 빛이 감돌았다.
* * *
그날 오전 내내 부교주의 개인 연무장에선 폭음이 터져 나왔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관길상이 연무장 바깥벽에 붙어 귀를 기울였는데,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더니 결국 참담한 자괴감이 드러났다.
담장 위로 언 듯 언 듯 비치는 검은 마광과 찬연한 금광.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성과 기의 폭발.
말소리나 기합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부교주와 강한월의 대결이 얼마나 치열한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콰아앙!
거친 폭음이 터진 후 담벼락이 들썩거렸다.
누군가의 몸이 날아와 거칠게 담장에 충돌하는 소리.
그것이 한 시진 넘는 대결에서 터져 나온 마지막 굉음이었다.
잠시 후, 연무장의 대문이 열리고 부교주가 걸어 나왔다.
치열한 대결을 증명하듯 여기저기 찢어진 무복.
다소 피곤해보였지만, 그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반면 그의 어깨에 메어 있는 강한월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움직임이 없었다.
관길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부교주 검마가 이긴 것이다.
“저, 사부님. 어땠습니까… 대결은…?”
제자를 돌아보고 피식 웃은 부교주가 아무 말 없이 신녀궁을 향해 걸었다.
* * *
강한월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석양으로 넘어가는 시간.
눈을 떠보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신녀 옥수련의 얼굴이었다.
“제가 또 폐를 끼쳤군요. 밤이 되려는 것을 보니 한나절 넘게 이러고 있었나 본데….”
“한나절이요? 호호. 벌써 이틀이 지났습니다.”
“이틀이요?”
“그래요. 실은 더 일찍 깨어날 수 있었지만 제가 손을 좀 썼어요. 강 소협은 휴식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어쩐지 몸에 기력이 넘치는 느낌이더라.
강한월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나한테 감사할 필요 없어요. 밤새 곁에서 간호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어느 분이 그런 수고를…?”
“유선이라고, 신녀 후보 중 한 명이죠. 그보다 몸이 다 나으면 부교주께도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거예요.”
“물론 그럴 생각입니다. 저를 이곳으로 보내주신 게 부교주님이시죠?”
“기절한 강 소협을 직접 메고 오셨죠. 그리고… 어제 다시 찾아오셔서 이걸 주고 가셨어요.”
옥수련이 품 안에서 옥갑을 꺼냈다.
코끝을 찌르는 강렬한 향기.
향기 속에 녹아 있는 정순한 마기에 반응해 손목에 찬 마신환이 부르르 떨었다.
“이건…?”
“마단(魔丹)입니다.”
소림에 대환단이 있고 무당에 자소단이 있듯, 천마신교에는 마단이 있다.
마기를 증대시키고 마공의 격을 높여주는 최고의 영약.
통칭하여 마단이라 불리지만 실은 등급이 있었고, 옥갑에서 풍기는 범상치 않은 향기로 볼 때 이건 상등급의 마단이 분명했다.
“일곱 등급의 마단 중 두 번째로 귀한 겁니다. 천마께만 허용되는 천마단 바로 아래 등급이 이것이고, 부교주의 지위에서도 평생 단 한 개밖에 얻지 못하는 거죠.”
“이 귀한 것을 어째서 저에게?”
“저도 궁금하네요? 마단은 정파인에겐 독약이나 마찬가지인데. 부교주께서 그걸 모르실 리는 없고. 강 소협과 대결하는 와중에 무언가를 느끼셨는지, 이게 도움이 될 거라며 주시더군요.”
뜻밖의 소득이었다.
아니, 소득이란 표현으로는 부족한… 기연에 가까운 행운.
소요자에게 받은 자소단에 더불어 최상급의 마단까지 얻었으니, 팔성에 멈춰 있는 신공이 구성의 벽을 돌파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못지않은 소득은 부교주의 호의를 얻은 것.
전력을 다해 진심으로 대결을 펼친 것이 무공광인 부교주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았다.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부교주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신녀님. 신세를 진 김에 하루 정도 더 장소를 빌려도 되겠습니까?”
“마단을 복용하려고요?”
“네. 미룰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안 그래도 마신환을 천마께 드리기 전에 마단을 복용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분명 마신환의 공능이 상승 작용을 일으킬 거예요. 마기가 강 소협의 본신 내력과 충돌하는 문제만 없다면 말이죠.”
강한월이 서두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마단이 풍기는 향기만으로도 마신환이 이렇게 요동치는데, 직접 마단을 복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다.
마신환을 천마에게 넘기고 나면 두 번 다시 가질 수 없는 기회.
“오늘 밤 마단을 복용하고 연공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무도 이 방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죠. 그리고 마기를 안정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특별한 향초와 보조제가 있으니 잠시 후 보내 드릴게요.”
“어떻게 이 은혜에 보답 드려야 할지….”
“신녀에겐 특별한 감이 있답니다. 강 소협을 돕는 것이 교의 미래를 위한 길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돕는 것이니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