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십만대산 (4)
* * *
가부좌를 틀고 앉은 강한월이 명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선이라고 합니다. 신녀님이 강 소협의 연공을 도우라고 해서 왔어요.”
“아, 유선 소저시군요. 저를 간호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감사드립니다.”
“호호, 별거 아니에요. 영영 언니랑 함께 일하신다 들었는데 제가 당연히 도와야죠.”
“그럼 한 번 더 신세를 지겠습니다. 제가 환단을 복용하고 연공을 시작할 텐데, 주변이 소란하지 않게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걱정 마세요. 신녀님이 주신 물건들이 있으니 제가 알아서 보조하겠습니다.
유선이 가져온 물건들을 꺼냈다.
마단의 기운이 과도하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방지하는 향초.
마기가 상단전을 침투할 때 정신을 보호해줄 작은 종.
혹시 주화입마의 증세가 보일 시 긴급히 사용하는 열여덟 개의 금침.
모두가 신녀궁이 보유한 천마신교의 보물들이었다.
강한월은 품속에서 자소단을 꺼냈다.
마기를 보강하기 이전에 선기를 충만케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방안 가득 퍼지는 환한 기운.
범상치 않은 영약임을 직감한 유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손목에 차고 있던 마신환을 풀어 무릎 앞에 내려놓았다.
마교의 보물을 착용하고 도가의 영약을 연화시킬 수는 없는 법.
석양빛 굵은 환단을 입에 넣으며 강한월이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자세로 앉은 강한월의 머리에 신묘한 서기가 어렸다.
무지개를 닮은 기운은 황홀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유선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길은 오직 한 곳을 향했다.
마신환.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
무방비 상태의 강한월.
참을 수 없는 유혹에 그녀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지금이 기회인가…?’
유선의 이런 갈등은 모르는 채, 강한월은 운기를 계속했다.
자소단의 기운이 몸 곳곳으로 퍼지며 도가의 기운이 충만히 차올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느낀 그는 지체 없이 마단을 복용했고, 유선은 가지고 온 향초에 불을 붙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였다.
좀처럼 어울리기 힘든 도기(道氣)와 마기(魔氣)를 한데 합하면서도, 이미 지니고 있는 대환단의 기운과도 조화를 이뤄내야 했다.
자살 행위와도 같은 무모한 도전.
하지만 강한월은 담담하게 임했다.
마불진경에서 조화의 길을 배운 데다가, 사부 신주의협이 전해준 금검(金劍)의 기운이 자신을 지켜 줄 테니까.
마단의 약효는 지독했다.
최상급의 마단이라는 뜻은, 경지에 오른 마인이어야 약효를 이겨낼 수 있다는 것.
마불진경을 통해 기초를 다졌을 뿐 제대로 된 마인이라 할 수 없는 그가 감당하기엔 벅찬 기운이었다.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파 왔고, 심성을 뒤흔드는 광포한 기운이 장기와 뇌수로 침투해 들었다.
‘과연 마(魔)답구나.’
대환단의 기운으로 중단전을 보호하고, 자소단의 기운으로 상단전을 감싼 채, 마기를 연화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조금씩 기운을 녹여내고, 천천히 융합을 시도했다.
매우 느리게… 강한월의 몸속에서 세 가지 기운이 삼태극의 모습으로 구현되어 갔다.
강한월의 표정 변화를 눈여겨보던 유선.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싶더니, 품속에서 붉은 가루를 꺼냈다.
‘네가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 마성에 휩싸여 미치광이가 되면 좋고… 아니면 주화입마라도….’
붉은 가루가 촛불 위에 뿌려지자, 향기의 성격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마기의 난폭함을 순화시켜야 할 향이 반대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난동을 피우는 마기.
강한월은 정신이 아찔했다.
마기가 원래 난폭하다지만, 이렇게까지 통제가 힘들 줄이야.
입술 사이로 나직한 침음이 흘러나오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들려오는 유선의 목소리.
“강 소협. 마단의 기운이 너무 독한 것 같네요.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작은 금색 종을 든 유선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타앙.
마기를 순화시키는 파장이 은은하게 퍼졌다.
미친 듯이 폭주하던 마단의 기운이 종소리와 함께 잠잠해졌고, 강한월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종소리는 실은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소리에 반응한 마신환에서 슬금슬금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강한월의 콧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강한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선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걸렸다.
‘마단의 기운에 마신환의 본연 마기가 더해졌다. 네 몸이 버틸 수 있을까?’
강한월은 생사의 기로에 섰다.
마불진경이 추구하는 것은 조화와 상생.
그것은 각 기운의 크기가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출 때만 가능한 것인데, 마기의 폭증으로 인해 조화가 깨진 것이다.
삼태극을 형성했던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여기서 포기하던가, 아니면….
강한월은 손을 뻗어 마신환을 집어 들었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모험을 걸었다.
마기를 끊임없이 뿜어내는 마신환.
역으로 생각하면 이 작은 팔찌는 엄청난 양의 마기를 저장할 수 있는 도구라는 뜻.
균형을 깨고 있는 용량 초과의 마기를 마신환 속에 밀어 넣을 수만 있다면, 다시 세 기운의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마신환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코를 통해 몸으로 흘러들었고, 반대로 강한월은 날뛰는 기운을 손목의 내관혈을 통해 마신환에 주입했다.
마신환을 매개체로 이뤄지는 폭기의 대주천.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온몸의 기맥과 세맥들로 기가 폭주했다.
기맥이 억지로 넓혀지며, 막혀 있던 세맥들이 억지로 열렸다.
그러더니 급기야.
난폭한 기의 폭류에 휩쓸린 임맥과 독맥이 타통되었다.
고통 속에서도 환하게 밝아지는 머릿속.
평상시라면 날아갈 듯 기뻐해야 할 일이겠으나, 지금은 그 반대였다.
기운의 폭주는 이미 강한월의 통제를 벗어난 상태.
이것을 멈추지 못한다면, 그리고 조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단전과 기맥이 산산이 부서질 상황.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선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의도한 대로 주화입마의 기미가 보였지만, 무언가 느낌이 싸했다.
폭주하는 기운이 대주천을 이룰 때마다 강한월의 머리 위로 번갈아 나타나는 기운들.
대자대비한 금광.
천지원기를 품은 오색기운.
혼돈의 마기.
그리고 그 속에서 떠오르는 거대한 검의 형상.
마치 검이 자신을 향하는 듯하여 유선은 소름이 돋았다.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 할 때…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선아. 외부에서 개입하면 오히려 위험해. 강 소협이 스스로 이겨내도록 지켜보자꾸나.”
신녀님?
칫, 나한테 일임한다더니 어째서 갑자기?
유선은 아쉬운 한숨을 삼켰다.
광포한 기운의 소용돌이는 열여덟 번째 대주천이 이뤄지는 순간 변하기 시작했다.
마신환이 폭주하는 마기를 끌어안으며, 균형을 맞출 수준의 기운만 강한월의 몸 안으로 돌려보냈다.
서서히 고통이 사라지며 정신이 돌아왔다.
너덜너덜 상처 난 기맥들은 도도하게 흐르는 금빛 광채가 보듬어갔다.
다시 몇 바퀴의 대주천이 이뤄지자 마신환은 더 이상 기운을 뿜어내지 않았다.
마, 선, 불의 조화가 이루어진 것일까?
머리 위에 나타나던 형상들도 검의 형상으로 합쳐지더니 스르륵 사라졌다.
휴우우.
긴 한숨을 내쉬며 강한월이 눈을 떴다.
흑요석처럼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 속에서 얼핏 보랏빛과 금빛 광채가 번득였다.
드디어 마불진경이 구성의 경지를 돌파했다.
* * *
다음 날 아침.
단정한 모습의 강한월이 신녀를 찾았다.
“강 소협. 편안한 모습을 보니 성과가 있었군요.”
“네. 오랫동안 막혀 있던 벽 하나를 넘었습니다.”
“축하드려요. 위험한 고비도 있었던 것 같던데…?”
“마신환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마성에 젖는 것을 방지하는 효능이 떠올라 모험을 걸었는데, 운 좋게 성공했습니다.”
“운이라고 할 순 없죠. 제가 무공은 보잘것없지만, 보는 눈은 있답니다. 강 소협이니까 가능했던 거예요.”
강한월은 담담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굳이 설명하진 않았지만, 어젯밤 달성한 경지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최상위 혈승들과 겨루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
“이제 천마를 만나볼 준비가 된 건가요?”
“그렇습니다. 마신환을 천마께 전해야죠. 하지만 그 전에 부교주를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부교주에게 인사를 하고 오세요. 그 후에 저와 함께 천마를 찾아봬요.”
“아, 그리고 유선 소저에게도 감사를 전해주십시오. 저를 돕느라고 긴 시간 수고가 많으셨는데….”
“제가 전하죠.”
* * *
강한월이 부교주를 만나러 떠난 후, 옥수련은 유선의 방으로 향했다.
“신녀님! 웬일이세요? 제 방에 다 오시고.”
“강 소협이 감사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더구나. 네 방에 와본 지 오래기도 하고… 겸사겸사 들렸다.”
“호호, 감사는 무슨. 향초와 종을 내어 주신 건 신녀님인데요 뭐. 저야 자리 지킨 것밖에….”
“아니야. 네가 자진해서 수고한 것인데.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기력 소모가 컸을 테고.”
“그렇긴 했어요.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말을 하며 유선의 방을 꼼꼼히 둘러보던 옥수련이 탁자에 앉았다.
감사 인사만 전하러 온 것이라면 굳이 앉을 필요는 없을 텐데…?
유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따로 할 말이 있으신가요?”
“선아. 네가 나와 함께 생활한 지 얼마나 되었지?”
“여덟 살 때 신녀 후보가 되었으니 벌써 십오 년째네요.”
“그렇구나. 짧지 않은 세월인데… 그동안 내가 잘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얼마나 잘 해주셨는데요. 마치… 어머니처럼.”
어머니라는 말에 옥수련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매우 아름답고 포근한 미소였지만, 어딘지 처연하게 느껴졌다.
“네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구나. 그래, 넌 내 딸 같은 아이지.”
다른 용건은 없다는 듯, 옥수련이 탁자에서 일어섰다.
방문을 향해 걷던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잠시 머뭇거리더니,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작게 중얼거렸다.
“신녀가 되면 몇 가지 능력이 생기는데, 쓸데없이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도 그중 하나야. 향초에 녹아 있는 마탈분의 냄새라던가, 종소리에 섞여 있는 이질적인 파장 같은 걸 구분할 수 있게 된단다.”
* * *
부교주 검마는 뭐가 그리 흐뭇한지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나한테 쥐어 터지고 기절했던 놈이 불과 며칠 만에 경지를 돌파하고 나타나다니.”
“부교주님 덕분입니다. 귀한 마단을 주신 덕분이죠.”
“어차피 나한테는 필요 없는 거였다. 지금 내 수준에서 마기가 늘어나면 마성에 빠질 공산이 크지. 이지를 상실할 위험을 알면서 공력을 늘릴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위험한 약을 저에게 주신 겁니까?”
“하하하, 그렇다. 주는 건 내 마음이고, 먹고 안 먹고는 네놈 마음이니까. 그건 그렇고, 할 말이 있다고?”
“실은 부탁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비무를 해달라는 건 아닐 테고… 무슨 부탁?”
“조만간 무림맹에서 공식 항의를 해올 겁니다. 낙양에서 대형 혈사가 벌어졌는데, 그걸 천마신교가 저지른 일이라고 의심하는 자들이 있어서요.”
“무엇이라? 이런 무도한 놈들이!”
부교주의 몸에서 광포한 마기가 폭발했다.
분을 참기 힘든 듯, 찻잔을 쥔 손마저 부르르 떨렸다.
“그래서? 내게 부탁할 것이 무엇이냐? 설마 겁쟁이처럼 몸을 사리고 싸움을 피하라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가 아니고 바로 그것입니다.”
“불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한다면 더 이상 천마신교가 아닌 법!”
역시나 무리였던가.
약간의 기대를 했던 강한월이 씁쓸히 미소 지었다.
“하지만… 어쩌면 네놈이 굳이 부탁할 필요도 없을 것 같군.”
“무슨 말씀이신지?”
“안타깝게도 당분간은 외부와 전쟁을 할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후계 경쟁만으로도 이미 정신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