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십만대산 (5)
* * *
부교주와의 면담을 마친 강한월은 신녀궁으로 향했다.
후계분쟁 덕분에 정마대전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홀가분했다.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
지니고 있기 부담스러운 마신환을 천마에게 전달하고, 정파와의 전쟁은 피해달라고 부탁하면 이곳에서의 용무는 마무리되는 것이다.
후계 경쟁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신녀궁에 도착한 순간, 계획이 바뀌었다.
신녀궁 입구에서부터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궁인들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대신 낯선 무사들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머리까지 덮는 칠흑같이 검은 피풍의, 어깨 위의 황금색 견장.
얼음장 같은 표정의 천마근위대.
천마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그들이 어째서 신녀궁에…?
“강한월 소협이시오?”
“제가 강한월입니다만.”
“따라오시오.”
동행을 요구하는 근위대원을 따라 걸으며 강한월의 가슴 속에서 불안감이 치솟았다.
신성한 공간인 신녀궁에서,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들어가 보시오.”
근위대원이 안내한 곳은 신녀 옥수련의 방이었다.
불안감이 더욱 커진 강한월이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모든 것을 품어줄 것 같은 포근하고 따뜻한 온기가 흐르던 신녀의 처소.
지금은 전혀 결이 다른 기운이 대신하고 있었다.
허무와 혼돈, 순수한 파괴의 근원적인 공포.
그리고 그 속에서 언뜻 비치는 죽음의 기운.
“만마의 종주, 천마를 뵙습니다.”
두 눈을 감고 탁자에 앉아있던 천마가 고개를 들었다.
천하를 오시하는 절대적 위엄이 뿜어져야 할 그의 눈에선, 피곤함과 후회의 기미만 엿보일 뿐이었다.
“나는 혼돈을 바랐고, 네가 그것을 가져왔구나. 하지만 이것은 내가 원한 결과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신녀가 죽었다.”
강한월은 충격에 휘청거렸다.
불과 몇 시진 전까지 다정한 모습으로 자신을 챙겨주던 그녀가 죽다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천마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실의 문을 열었다.
침상 위에는 신녀 옥수련이 누워있었다.
가슴을 감아 놓은 새하얀 천 위로 번져 있는 붉은 피.
강한월은 떨리는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두 시진이 채 안 되었다. 불현듯 심령에 날카로운 타격을 느꼈지. 나와 영적인 연계가 있는 것은 오로지 신녀뿐. 불안한 마음에 단숨에 달려왔으나 그녀는 이미 죽어 있었다.”
“치료가 불가능했던 겁니까? 천마시라면 분명 방도가….”
“나에게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녀 본인에겐 비슷한 능력이 있지.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가루가 되지만 않는다면 한 번은 죽음에서 회복할 수 있는데… 어쩐 일인지 그녀는 회복을 못 하고 있다. 지금은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닌 상태다.”
“도대체 어떤 수법에 당했길래 그런 겁니까?”
“피에 생명력이 응결되지 않는다. 그녀의 신령력으로도 극복하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수법에 걸렸어.”
피에 영향을 끼치는 무공.
강한월은 순간 혈마를 떠올렸다.
하지만 혈마는 분명 아니다.
이미 구마동에 감금된 데다, 천마신교의 마력에 의한 부상이었다면 신녀가 극복 못 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피를 다루는 또 다른 종류의 수법이란 말인데.
신녀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술법이라면…?
혈승.
“희로애락을 초월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견디기 힘든 슬픔과 분노가 느껴진다. 그녀는 내가 허무에 잠식되어 간다고 늘 걱정했었지. 자신의 불행으로 내 인간적인 감정을 다시 일깨워준 것일까?”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천마가 강한월을 똑바로 쳐다봤다.
“네가 이 일에서 무관하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분명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왠지 제가 쫓는 자들과 연계되어 있을 것 같군요.”
“범인을 잡아라. 신녀를 공격한 수법이 무엇인지 밝혀내. 그러면 신녀를 다시 깨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신교에 인재들이 많은데, 어째서 저에게 이런 중임을…?”
“내부인의 소행이 분명하니, 외부인의 손을 빌리는 게 효율적이겠지. 이 건에 관한 한 전권을 주겠다. 천마근위대가 너를 도울 것이다.”
천마의 목소리에서 회한이 느껴졌다.
만마의 종주.
수백만의 교인을 다스리는 정점에 섰으나 결국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황.
교내의 경쟁과 싸움을 유도하고 방치한 것이 그 자신이니, 후회도 그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 * *
그날 저녁, 마신환을 탈취하기 위해 떠났던 자들이 복귀했다.
대공자, 마가의 가주들, 구마동의 원로들… 그리고 물론 광군영과 진가린도 함께였다.
강한월이 마신환을 가지고 떠난 것을 알고 발길을 서둘렀음에도 이제야 십만대산에 도착한 것이다.
광군영과 진가린을 만나 상황을 설명한 강한월은, 이어서 대공자와 이공자를 신녀궁으로 소환했다.
마신환이 사라진 탓에 당황했던 대공자는 물론, 혈마를 시켜 강한월을 제거하려 했던 이공자도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강 소협. 마신환을 들고 내빼더니 며칠 사이에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거요? 천마근위대가 당신 곁에 붙어있는 것은 또 무슨 일이고?”
“흥, 대사형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강한월 이자가 천마님 곁에 붙어 알랑방귀를 뀐 거지. 마신환을 들고 나타났으니 지가 뭐라도 된 줄 알고. 또 모르지 이 기회에 우리 천마신교를 날름 삼키려는 걸지도.”
대공자와 이공자가 한마디씩 불평을 던졌다.
천마가 철저히 정보를 통제했기에, 이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천마께서 지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니 두 분은 불편하더라도 따라주셔야 합니다. 한가지 확인할 것이 있으니까요.”
“도대체 무슨 임무인데 그러는 거요? 확인할 것은 무엇이고?”
“신녀께서… 습격을 받았습니다.”
강한월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지만, 파장은 컸다.
대공자의 얼굴은 불신과 당혹으로 물들었고, 이공자는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신녀님을 습격한 것이 우리라고 의심하는 거냐?”
“확인해보면 알게 되겠죠.”
“뭐야? 네가 감히!”
새빨개진 얼굴로 강한월의 멱살을 잡으려는 이공자를 대공자가 제지했다.
감정이 상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으나, 도대체 무얼 확인하려는 것인지 묻는 것이 순서.
“천마께서 당신에게 일을 맡긴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뭐, 솔직히 교내에서 사단이 생기면 우리가 의심받는 것도 당연한 거고. 도대체 계획이 뭐요? 어떻게 협조하면 되겠소?”
“신녀님을 공격한 수법이 괴이합니다. 피에 영향을 끼치는 무공인데, 이런 무공은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대공자와 이공자에게 이런 류의 공력이 있는지 확인해 봤으면 합니다.”
“이 새끼가 정말!”
이공자가 다시 발끈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인에게 공력을 확인하겠다는 것은, 남들 앞에서 발가벗으라는 것과 마찬가지.
당당한 천마의 제자이자 차기 대권 후보에겐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사제는 좀 진정하게! 신녀님이 위태로운 상황이라지 않는가! 그리고 강 소협. 그 방법이 정말 사태 해결에 필수적인 거요? 당신이 우리 공력을 확인하면 범인을 잡고 신녀님을 회복시킬 수 있냐는 말이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공력을 확인하는 것은 제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럼 누가 확인한다는 말이오?”
강한월이 곁에 있던 천마근위대장에게 눈짓을 보내자, 방문이 열리고 세 명의 젊은 여인이 들어왔다.
유선을 포함한 신녀 후보들이었다.
“아시겠지만, 이들은 차기 신녀 후보생입니다. 신녀님이 여러 가지를 교육시키셨죠. 제가 궁금한 것을 확인할 비술을 포함해서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은 대공자와 이공자뿐만이 아니었다.
사전에 어떤 정보도 받지 못했던 신녀 후보들도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고, 유선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강 소협.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신녀님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강 소협은 내부의 분란만 부추기고 있으니….”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그냥 따라주십시오. 만약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한다면 제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지만….”
“천마께서 일임하신 일입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신녀 후보 여러분은 대공자와 이공자에게 잔혼반이 나타나는지만 확인해 주면 됩니다. 제가 요청드린 시약은 준비해오셨겠죠?”
유선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사이, 억지로 참고 있던 이공자가 먼저 폭발했다.
“어디서 되도 않는 개소리를! 잔혼반인지 뭔지 나와 상관도 없는 것 때문에 시약을 먹으라고? 너를 어떻게 믿고 뭔지도 모르는 약을 마시라는 말이냐?”
“나를 믿을 필요는 없소. 시약을 만든 것도, 그리고 비술을 거는 것도 모두 신녀 후보들이니.”
“흥, 그녀들도 믿을 수 없다! 신교 내의 누구도 믿을 수 없어! 독이라도 탔거나 심령에 타격을 주는 위험한 비술이면 어쩌려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죠. 신녀 후보들이 먼저 시약을 먹고 잔혼반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유선 소저, 시범을 보여줄 수 있죠?”
강한월이 담담한 눈빛으로 유선을 바라봤다.
대공자와 이공자, 천마근위대 대장의 눈길도 그녀에게 쏠렸다.
“왜 굳이 제가? 다른 후보생들도 있는데….”
“신녀님과 가장 가까웠던 분이 유선 소저라고 들었습니다. 문제없지 않습니까? 잔혼반 비술이 안전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하지만… 잔혼반은 명치 부근에 나타나는 거예요. 여자인 제가 어찌 남자들 앞에서….”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당연히 남자분들은 보지 않을 겁니다. 제가 대신 확인하면 되니까요.”
얄밉게도 진가린이 끼어들어 말을 가로챘다.
표정을 감추고 연기하는 것에 능한 유선이지만, 이번만큼은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강한월 저자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잔혼반 비술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소영영이 교를 나가 강한월과 함께 하고 있다는 일이 혹시…?
다른 신녀 후보 한 명이 유선에게 시약을 건넸다.
별일 아니니 어서 마시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약병을 받아 든 유선의 손은 눈에 띄게 떨렸다.
—이공자. 설마 나 혼자 죽으리라 생각하진 않겠지?
갑자기 귓가를 파고든 유선의 전음에 이공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뭐가 문젠데? 설마 진짜 독이라도 든 거야?
—흥, 끝까지 멍청한 것. 잊지 말아라. 내가 잡히면 너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떨리던 그녀의 손이 안정을 찾았다.
붉게 상기됐던 혈색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뭐, 좋아요. 신녀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이 정도 협조야 당연히 해드려야죠.”
유선이 약병을 들고 입가로 가져갔다.
한 모금 시약을 마시던 그녀가 갑자기 입안에 머금고 있던 약물을 뿜었다.
암기처럼 사방으로 뻗어가는 물줄기에 가까이 서 있던 몇몇이 몸을 움츠릴 때, 유선은 손에 쥔 약병을 강한월에게 던졌다.
쐐애애액.
가공스러운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온 약병을 피하느라 강한월이 한 걸음 물러서는 사이, 유선이 빛살처럼 몸을 움직여 창문을 향해 달렸다.
“어딜!”
검을 뽑아 든 근위대장이 그녀를 잡으려 했으나, 인상을 잔뜩 쓴 이공자가 근위대장을 막아섰다.
채애앵.
이공자와 근위대장의 검이 부딪치는 굉음이 터졌다.
모두가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
그 틈에 유선의 몸은 창문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그녀의 도주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한발 앞서 창문을 막아선 광군영이 거센 장력을 날렸다.
콰아앙!
혼신의 힘을 다한 육합흑철마장.
너무 과한 공격이 아닌가 싶었지만,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간 것은 유선이 아닌 광군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