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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45화 (45/210)

045화. 십만대산 (6)

* * *

광군영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구르는 사이, 유선은 이미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대공자나 이공자도 광군영을 한 방에 쓰러트릴 수는 없을 텐데…?

강한월은 그녀를 과소평가했던 걸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근위대장님. 이공자를 붙들어 놓으십시오. 가린이는 광군영을 보살피고.”

당부의 말을 남기며 강한월도 창문을 넘었다.

* * *

유선은 미친 듯이 달렸다.

항상 숨어서 무공을 익혔기에 이렇게 전력으로 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공기의 저항에 피부가 저릿했으며 숨은 가슴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리 새가 된 듯한 자유로움도 느껴졌다.

절대로 원했던 상황은 아니었고, 잃을 것이 많았음에도… 한편으론 굴레에서 벗어난 기쁨도 피어났다.

이십 년 동안 스스로를 옭아맸던 거짓.

그 거짓을 버리고 이처럼 자유롭게 달릴 수 있다면… 머지않아 한 차원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샘솟았다.

분명 그랬다.

끈질기게 뒤를 쫓아오는 강한월만 없다면… 분명 달리는 도중에 벽을 깰 수도 있으리라.

순간 원망과 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마교 본진의 위험지대도 벗어났겠다, 이쯤에서 저 훼방꾼을 갈가리 찢어 놔야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인적이 없는 황량한 벌판에 들어선 그녀가 달리기를 멈췄다.

한두 번 숨을 고르는 사이,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강한월이 나타났다.

“야, 이 새끼야! 너 도대체 뭐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유선 소저는 도대체 누구요?”

“시치미 떼지 말고 까놓고 말해보자고. 어차피 여긴 듣는 귀도 없으니. 너 뭔가를 알고 있는 거지? 무림맹의 특수조직인가?”

“그렇게 묻는 것을 보니 당신이야말로 비밀이 있는 것 같군. 신녀를 공격한 이유가 뭐요? 어째서 잔혼반 확인을 거부한 거지?”

“야! 이런 식이면 대화가 계속 겉돌잖아. 까놓고 이야기하자니까!”

정말로 다 털어놓자고?

진심을 확인하겠다는 듯, 강한월이 유선의 눈빛을 살폈다.

지금까지 만난 혈승들은 하나같이 존재를 부인했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여인은 다를지도.

“당신. 십이간지 중 누구요?”

십이간지?

유선의 표정이 싸늘히 굳었다.

까놓고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훅 들어올 줄은 몰랐던 것.

“역시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거네. 어디까지 아는 거야?”

“웬만큼은 알고 있소. 원숭이, 돼지, 말이 꽤 많이 실토했거든.”

유선은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거짓말이 능숙하지 못하군. 돼지나 말은 몰라도 원숭이가 정보를 흘렸을 리가 없지. 어쨌거나 놀랍네. 우리가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뒤를 쫓는 자들이 있다니. 얼마 전 형제 하나가 죽었던데, 그것도 너희들 짓인가?”

“아니. 그건 당신네 작품이었소. 원숭이가 돼지를 죽였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유선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원숭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았다.

“뭐 좋아. 마교의 기반을 잃은 게 속이 터지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은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지. 나머지 궁금한 것은 널 잡은 후에 확인하도록 할게. 비밀을 술술 불게 만들 방법은 차고 넘치니까.”

말을 마친 유선이 공력을 개방했다.

먼저 표출된 것은 천마신교의 마공.

검은 아지랑이 같은 마기가 주룩주룩 뿜어져 나왔다.

안개처럼 모호하지 않고 한 줄 한 줄이 선명한 것이, 그녀의 성취가 광군영을 넘어섰음을 증명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신녀 후보들 중 최강은 소영영인 줄 알았는데… 유선은 아예 차원이 달랐다.

“원래는 이 정도면 되겠지만, 네가 마단을 흡수하는 광경을 직접 봐 버려서 말이지. 나도 숨겨둔 밑천을 드러낼 수밖에.”

그녀의 몸에서 또 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 아지랑이 사이로 서서히 번지는 붉은 빛.

코끝을 간질이는 역한 혈향.

천축과 서장의 무공에 피의 비술을 더한 혈교의 무공이었다.

“마공과 혈공은 결이 다른 무공인데. 그걸 합쳐낸 모양이군?”

검은 마기와 붉은 혈기가 하나로 합쳐지며 끈적끈적한 검붉은 기운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강한월은 제법 감탄했다.

그리고 유선은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내심 바랐던 모양.

“난 무공의 천재거든. 냄새나는 마인들 틈에서 이십 년을 굴렀는데 마공 하나 융합하지 못한다면 그건 내가 아니지.”

“하지만 하나 더하기 하나가 언제나 둘이 되는 건 아니라오.”

“흥, 재수 없는 자식. 말했지? 나는 천재라고!”

유선을 감싼 검붉은 기운이 요동치며 벼락처럼 뻗어 나왔다.

쐐애액.

급하게 머리를 돌려 피했지만, 머리카락 몇 올이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강한월이었지만 검을 뽑을 새도 없었고, 하마터면 첫수부터 낭패를 볼 뻔했다.

더 이상 기습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강한월이 반격을 가했다.

섬전처럼 움직이는 몸보다 더 빠르게, 금광을 띈 묵빛 검기가 그녀를 향해 쏘아졌다.

콰앙!

검기와 권기가 부딪치며 굉음이 터졌고, 그 순간 유선의 신형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강한월의 남다른 동체 시력으로도 쫓아가지 못한 쾌속.

흠칫 놀라는 사이 등 뒤의 사각에서 묵직한 권경이 느껴졌고, 강한월은 전력으로 회선장력을 펼쳐 후면을 쓸었다.

콰아앙!

다시 한번 터지는 폭음.

지금까지는 간 보기였다는 듯 유선이 풀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제법이네. 역시 최상급 마단을 복용한 효과가 있는 건가?”

“당신 혼자만 이질적인 기운을 융합할 수 있는 건 아니지.”

“흥, 건방진 놈. 장난은 여기까지다!”

유선의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며 마신의 형상을 닮은 기세가 등 뒤로 솟아올랐다.

정말로 전력을 다하는 듯 주변에 흐르던 역한 피 냄새마저 확 끓어올랐고, 그녀가 내 뻗는 주먹으로 검붉은 광채가 충천했다.

한 겹 한 겹 주먹을 둘러싸는 순수한 힘의 결정체.

권강(拳罡).

놀랍게도 이십 대 여인의 몸을 한 유선은 이미 절대경을 돌파한 것이다.

모든 것을 부숴버리겠다는 당당한 선언.

유선의 주먹에 맺힌 강기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맞상대하는 강한월의 눈빛에 두려움은 없었다.

자소단과 마단을 섭취하며 구성을 돌파한 순간, 그 역시 강기의 영역에 들어섰으니.

강한월이 내뻗는 검에 오색 광채가 맺히더니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광채를 감쌌다.

그리고 유선의 권강과 부딪히기 직전 찬연한 금광이 뿜어져 나와 먼저의 두 기운을 둘러싸며 단단히 굳어졌다.

파지지직.

더 이상 기운이 충돌하는 폭음은 터지지 않았다.

대신 유선의 권강과 강한월의 검강 사이에서 원초적인 기운이 마모되며 빛의 입자가 부서져 내렸다.

파지지직.

사포질을 당한 듯 권강이 깎여 나갔고, 대패로 밀 듯 검강이 벗겨졌다.

제길… 이게 아닌데.

강한월이 대등하게 강기 무공을 펼치자 유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법이다만… 비슷한 실력이면 결국 내가 이긴다. 난 미친개거든. 한번 물면 숨통을 끊어버리는 미친개, 술(戌) 혈승이 바로 나라고!”

유선이 독하게 혀를 깨물어 피를 머금더니, 강한월의 검강과 대치 중인 자신의 주먹을 향해 뱉었다.

점점 얇아져 가던 권강에 핏줄기가 떨어지자, 불에 기름을 부은 듯 폭발적인 기세가 뿜어졌다.

쏴아아악!

권강이 쭈욱 늘어나며 검을 부수려 했지만, 그 순간 검강 또한 몇 배는 굵어지며 역공을 가했다.

퍼어엉!

힘의 균형은 무너졌다.

부서진 것은 유선의 권강이었다.

“미안하지만 우린 비슷한 실력이 아니오. 난 아직 마신환을 차고 있거든.”

일순간 힘을 쏟아내 검강을 강화시켰던 마신환이 강한월의 손목에서 밝게 빛났다.

“이런… 개 같은….”

쓰러지는 유선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단어는 우습게도 자신의 이름이었다.

* * *

강한월은 기절한 유선을 들쳐 메고 신녀궁으로 돌아왔다.

이공자는 근위대와 대공자에 의해 제압당해 있었고, 광군영은 안색이 조금 창백했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듯했다.

근위대장에게 부탁해 천마를 모셔오라 청한 후, 강한월이 신녀 후보들에게 말했다.

“잔혼반 비술. 그리고 섭혼술을 준비해주십시오.”

다른 곳이라면 소영영 없이는 확인이 불가능하겠지만, 이곳 신녀궁은 예외.

잔혼반 확인이야 급한 것이 아니었지만, 신녀를 살리기 위해선 섭혼술은 당장 실시해야 했다.

“강 소협. 도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소만.”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의 대공자가 다가와 말했다.

어떻게든 설명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지만, 쉽게 말해줄 수는 없는 것.

“천마께서 설명하실 겁니다.”

“아니, 난 당신에게 듣고 싶소. 천마께선 원래 말이 없으신 분이고… 보아하니 강 소협 당신이 더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말해주지 않으면 싸움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듯 고집스러운 눈빛의 대공자.

한동안 말없이 눈싸움을 벌이던 강한월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자. 잔혼반을 확인해도 되겠소?”

“그게 뭔데 아까부터 잔혼반, 잔혼반 하는 거요?”

“확인되면… 그 후 모든 것을 말해주겠소.”

“좋소. 확인하시오. 궁금해 죽는 것보단 뭔지 모를 비술에 당하는 것이 났겠지.”

기절한 유선, 마혈을 제압당한 이공자, 그리고 스스로 나선 대공자에게 차례로 시약을 먹였다.

잔혼반을 확인할 준비가 모두 끝났을 때, 때마침 천마도 현장에 도착했다.

“범인을 잡았군.”

“다행히 천마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습니다.”

“확인할 것이 있으면 빨리 확인하게. 신녀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으니.”

천마근위대를 물린 후 비술이 시작됐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유선의 가슴 언저리에선 선명한 보랏빛 반점이 나타났고, 대공자와 이공자에게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회귀자의 존재가 증명되는 놀라운 광경이었고, 대공자와 이공자의 입장에선 의심을 벗어나는 증명의 시간.

하지만 천마에게는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오로지 신녀를 치료할 방법을 찾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독촉이 있었고, 신녀 후보들은 지체 없이 섭혼술을 펼쳤다.

섭혼의 파장이 유선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천마가 보는 앞이라 너무 긴장한 탓일까, 아니면 유선의 방어력이 탁월했기 때문일까…?

좀처럼 성과를 보지 못했다.

기억을 덮고 있는 두꺼운 장막을 열기 위해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으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식은땀을 흘릴 뿐….

“비켜라. 내가 직접 해볼 테니.”

보다 못한 천마가 나섰다.

신녀의 섭혼술과는 달랐지만, 마공의 정점에 서 있는 천마에게도 상단전의 문을 열 비술은 있었다.

하지만 몹시 파괴적이고 위험한 방법.

자칫 잘못하면 피시술자의 정신이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말려야 하나?

걱정스러운 상황.

하지만 강한월이 말릴 수는 없었다.

신녀를 살리려는 천마의 의지가 워낙 강한 데다가, 절대경에 오른 유선의 정신 방어를 깨려면 천마의 방법 외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주문을 외우는 번거로운 절차는 없었다.

천마가 손을 뻗어 유선의 천령개를 잡았다.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상단전을 파고들었다.

몇 겹으로 감싸고 있던 방어 금제가 마력의 침투를 막으려 몸부림쳤지만… 상대는 천마.

공력이 깊음은 말할 것도 없고, 천마의 공력에는 영성마저 깃들어 있었기에 그 어떤 금제도 소용이 없었다.

붉은 장막이 찢겼고, 피의 강물 속으로 잠겨 드는 기억의 파편들이 천마의 손에 붙들려 끌어올려 졌다.

유선의 눈과 코에서 가는 핏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리고 천마가 입을 열었다.

“흥, 하찮은 개새끼였구나.”

눈을 감고 기억들을 살피던 천마가 고개를 돌렸다.

이공자를 향한 서늘한 눈빛.

유선과 이공자의 관계마저 파악이 된 듯했다.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는 듯 천마의 손에서 강한 파장이 뿜어졌다.

유선의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더 이상은 무리일 것 같아 강한월이 말리려 할 때, 천마가 손을 털고 일어났다.

“이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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