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피의 제사장 (2)
* * *
강한월의 무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자소단과 마단의 기운이 이제 완전히 흡수된 덕분.
검을 뻗을 때마다 괴인들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강한월의 활약에 자극받은 광군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유선을 진가린에게 맡기고는 괴인들 속으로 뛰어들어 강렬한 장력을 날렸다.
괴인의 머리는 단단했지만,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뭐야? 별것도 아니잖아? 호호, 유선 언니는 겨우 이런 것에 쫄았던 거예요?”
강한월과 광군영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강함은 진가린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유선은 여전히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는데….
“흥, 어리석은 것. 혈제 영역이 왜 무서운 것인지 너는 모른다.”
“왜요? 다른 괴물들이 더 있는 거예요?”
“저 두 멍청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안 보이나?”
“열심히 괴인들을 죽이고 있잖아요. 목을 베어야 한다고 알려준 건 당신이고….”
“그래. 혈제의 영역에 들어온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도대체 뭔데요?”
“멍청아. 혈제의 영역에서 피 흘리며 죽는 자들은, 결국 또 다른 제사의 제물이 되는 거야. 즉, 강한월과 광군영이 적들을 죽이면 죽일수록 혈제는 더 강하게 활성화된다는 말이지.”
“그… 그럼?”
“그래. 지금 죽어가는 혈병의 피를 제물 삼아 다음에 나올 괴물이 더 강력하게 거듭나고 있는 거지. 혈제 영역이란 그런 거다. 많은 피가 흐르면 흐를수록 제사는 끝없이 이어지고, 영역은 더 강해지지. 벗어날 수 없는 피의 축제. 그것이 혈제 영역이야.”
“다음에 나올 괴물은 어떤 괴물인데요?”
“흥. 설명한다고 네가 알아들을 수 있겠어? 보면 알 거야. 마침 나올 때가 되었으니.”
유선이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농밀한 피 안개가 자욱하게 번지는 틈으로 검붉은 그림자가 비쳤다.
사방을 포위하며 다가오는 서른여섯 개의 그림자.
힘과 방어력만 강했던 혈병들과는 달리, 무림 고수처럼 강한 기파를 뿜어내는 그들.
조금 전, 일백 명의 희생으로 치러진 제사를 통해 혈승의 검으로 거듭난 혈영(血影).
“저들은 핏빛 그림자 혈영이다. 혈병과는 차원이 다를 거야.”
유선의 가라앉은 목소리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저들도 결국 제물이라는 말인가요?”
“맞아.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고, 반대로 저들을 죽이면 혈제가 계속된다. 피의 쳇바퀴를 도는 거지.”
유선의 목소리는 강한월과 광군영의 귀에도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담담한 얼굴.
강한월은 뭔가 생각이 있는 듯했고, 광군영은 적이 있는 한 그저 싸울 뿐.
“좋아. 도대체 그 바퀴는 몇 번이나 도는 건지 확인해보자고.”
* * *
콰아아앙!
다시 한번 거대한 폭음이 터졌다.
이전과는 다르게 가까운 거리.
소나무 숲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며, 드디어 길이 열렸다.
초윤이 열어젖힌 공간을 통해 사람들이 속속 걸어 나왔다.
정옥수를 비롯한 흑사련의 무인들이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남궁세가와 팽가의 고수들도 뒤따랐고.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숲 안에서 조우한 후, 그들 사이에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대결 초반엔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연합이 우세를 점했다.
흑사련 특임대가 독한 수를 펼치며 공격을 가했지만, 명문 세가 정예들의 실력이 위였다.
하지만, 흑사련의 원로고수 초윤이 나서는 순간 상황은 역전.
남궁청과 남궁환이 함께 상대했음에도 초윤 한 명을 상대하기 버거웠고, 정옥수마저 삼안혈도를 뽑아 들고 합세하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몰리게 되었다.
진법을 부수느라 초윤이 지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세가연합과 굳이 척을 질 생각이 없던 정옥수가 제때 휴전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남궁세가 입장에선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결국 휴전이 되었고, 진법을 벗어나 환생거사의 신병을 확보할 때까지는 서로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저기 있네요. 환생거사. 시간을 지체해 걱정했는데, 다행히 늦지는 않은 것 같군요.”
정옥수가 환생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암자 앞마당에 나란히 서 있는 그들.
정옥수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강한월을 찾는 것이었다.
혹시 그마저 잡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
하지만 없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찾고 있던 강한월이 아니라, 몹시도 부담스러운 다른 누구.
“이런… 훼방꾼이 있었군. 하필이면….”
그녀를 긴장하게 만든 것은 정삼품 황실 정복을 차려 입은 장준검이었다.
동창의 고위직이 스스럼없이 환생거사 곁에 서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황실이 공식적으로 개입한 것이라면, 보통 껄끄러운 일이 아닌데….
* * *
샤아악.
콰아아앙!
강한월의 검이 바람을 가르고 광군영의 장력이 폭발함과 동시에, 마지막까지 버티던 혈영 셋이 바닥을 굴렀다.
분명 좋은 일이었으나, 혈제 영역이 무엇인지 대략 깨달은 진가린은 더 이상 기뻐할 수 없었다.
혈영들이 하나하나 쓰러질 때마다 피 안개는 더욱 짙어졌으니까.
분명 다음에 닥쳐올 적들은 더 강해졌을 테지.
강한월과 광군영.
비록 부상을 입진 않았지만, 분명 많이 지쳤을 텐데… 과연 괜찮을까?
“다음은 어떤 괴물인가요?”
“글쎄. 제사장들마다 각기 다르니 나도 정확히 예측하진 못해. 확실한 건 전보다 더 강하다는 것, 그리고 계속 또 그렇게 이어질 것이라는….”
유선이 말하고 있을 때, 강한월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
“그래, 강한월 너라면 지금쯤 눈치챘겠지. 혈제 영역은 제사장의 속주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 외에 한 가지 효능이 더 있다.”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인가?”
“우리라는 표현은 좀 그런데. 적어도 나는 해당되지 않으니까. 여하튼… 영역 안에 들어온 생명체 중 피의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점차 혈액의 생명 활동이 제한된다. 아직 초반이긴 하지만 너는 이미 느꼈나 보네.”
예상했던 것인지 강한월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광군영과 진가린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좀 전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이 찾아오고, 이상하리만큼 피로감이 몰려왔던 것이다.
“광군영, 진가린.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간단한 심법 하나를 알려줄 테니 그에 맞춰 공력을 운행해봐.”
강한월이 서른여섯 자로 이루어진 짧은 운기법을 알려줬다.
심법은 간단했고, 광군영과 진가린은 나름 천재 소리 듣던 터라 즉시 습득할 수 있었다.
미리 준비했던 건가?
유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저 인간은 어떻게 혈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대비책까지 가지고 있다니… 정말 혈승 동료 중에 배신자가 있는 걸까?
“강한월. 이런 간단한 심법으로 혈제의 공능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유선이 빈정대는 투로 물었다.
하지만 답변은 듣지 못했다.
그 순간, 열여덟의 붉은 그림자가 파공성을 일으키며 사방에서 덮쳐왔기 때문이다.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든 혈도객들은 합격술의 묘리를 살리고 있었다.
확실히 이전 괴인보다 강하고 까다로운 적들.
하지만 강한월의 검은 거침이 없었다.
혈도객이 든 두꺼운 칼을 두 동강 내며 그대로 목을 날려버렸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붉은 피.
—대장. 이렇게 죽이면 적을 도와주는 꼴이잖아? 피를 보지 않고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데….
장력을 날려 혈도객을 밀어내며, 광군영이 전음으로 물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척추를 분지르거나 무릎뼈를 가루로 만들면 될 텐데.
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한월은 그 순간에도 혈도객의 목을 베어 피를 뿌렸다.
—괜찮아. 혈승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 주자고. 나에게 생각이 있으니.
그래, 대장은 계획이 있구나.
광군영의 손속이 과감해졌다.
칼을 찔러오는 혈도객의 머리를 붙잡아 그대로 뽑아버렸다.
피가 흥건히 고였고, 피 안개는 더욱 농밀해졌다.
열여덟의 혈도객도 모조리 바닥에 쓰러졌다.
유선의 표현대로 피의 쳇바퀴.
그런 식의 반복이 이어졌다.
혈도객 다음으로는 긴 창을 든 혈창객들이 나섰고, 이후엔 지독한 암기를 뿌리는 혈봉들이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혈제의 영역이 무게를 더해, 강한월 일행을 압박했다.
몸속을 흐르는 혈액이 제 역할을 못 하는지, 피로가 몰려오며 숨이 가빠졌다.
강한월이 알려준 심법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진가린의 안색은 이미 파리해진 지 오래.
하지만 쳇바퀴가 무한히 돌진 않았다.
다행히 만복자가 준비한 피의 제물도 모두 소진된 것이다.
마지막까지 미쳐 날뛰던 혈봉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간 뒤, 지금껏 모습을 숨겼던 만복자가 다시 등장했다.
“놀랍군. 이백의 제물을 동원한 혈제 영역에서 살아남다니. 채 서른이 안 된 젊은 놈들 중 이런 수준에 오른 놈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역한 혈향과 어울리는 끈적끈적한 목소리.
놀랍다는 말과 달리, 만복자는 여유 있게 웃고 있었다.
“만복자. 이제 직접 손을 쓸 준비가 된 거요?”
“혈제야 환생거사의 실체를 알 수 없어 혹시나 하고 준비했던 것이고, 기왕 제물이 준비되었던 터라 제사를 올렸을 뿐. 너희 정도야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글쎄… 과연 그럴까?”
“흥, 네가 제물들을 베었다고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이냐? 네가 그들을 이길 수 있었던 건, 내가 그들의 피 흘림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소롭다는 듯 웃는 만복자.
하지만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경계심이 솟아났는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강한월의 담담한 눈빛.
절대로 겁에 질린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도대체 뭘 믿고 이러는 것일까?
“만복자. 당신은 열두 명의 혈승 중 몇 번째로 강하오?”
“열두 명의 혈승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 저 배신자가 많은 것을 알려준 모양이구나. 어쨌건 네가 궁금해할 내용이 아닐 텐데?”
“당신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오늘 내 손에 죽을 거요.”
“뭐라고? 어디서 감히…!”
“얼마 전 나의 무공이 구성을 돌파했소. 회귀하기 전 당신들과 싸우던 장무영과 비교할 시 단지 일성의 부족함이 있을 뿐이지.”
“장, 장무영? 네가 어찌 척혈단 단주의 이름을…?”
만복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척혈단은 그들에게는 금기와 같은 단어.
만복자는 분노를 담아 유선을 노려봤다.
그녀는 억울했다.
척혈단이란 말을 들었을 때, 그녀가 받은 충격도 그보다 못하지 않았으니까.
“누가 알려줬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오. 당신이 다섯 강자에 들 실력이 되느냐가 중요하지.”
“흥, 헛소리! 그렇게 자신 있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덤비지 않은 거냐?”
“당신이 준비해 놓은 혈제 영역을 보는 순간, 확인하고 싶은 게 생겼거든.”
“일부러 놀아나 준 거라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걸 알고 싶으면 나를 이기시오. 하지만 쉽지 않을 거요. 당신은 지금껏 만나봤던 다른 혈승들보단 강하지만, 그렇다고 최상위 강자로 보이진 않으니까.”
강하월의 몸에서 세 가지 기운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기운들은 강한월의 몸을 감싸며 은은하게 소용돌이쳤고, 주변을 맴돌던 역한 피 안개를 멀찍이 밀어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만복자에게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척혈단.
천하를 굽어보며 거침없이 질주하던 혈교의 발목을 잡았던 그들.
분명 장무영 등 몇몇 수뇌부는 정파의 것과 마교의 것이 합쳐진 무공을 썼었는데….
만복자가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떻게 저놈이 척혈단 수뇌부가 사용했던 무공을 쓰는 거지? 설마, 배신한 혈승의 수하가 아니라는 말인가…?’
강한월과 유선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만복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미친개가 배신한 게 아니었나 보군. 너… 도대체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