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피의 제사장 (3)
* * *
“내 이름은 강한월이오.”
“강한월? 네가 신주의협의 하나뿐인 제자 강한월이란 말이냐?”
역시 무불통지라는 별호는 그냥 얻은 것이 아니었다.
강한월의 신분을 아는 자는 천하에 몇 없었으나, 만복자는 이름을 듣는 순간 즉시 알아챘다.
하긴, 흑시의 주인 민정화도 마찬가지였으니.
“하하하, 무얼 믿고 그렇게 기고만장한가 했더니 신주의협을 믿는 거였군. 그럴 만해. 넌 네 사부가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할 테니.”
상대의 신분을 알게 되자 만복자의 마음이 편해졌다.
흥, 신주의협?
나는 혈교 내에서도 단 세 명뿐인 제사장이다!
다른 혈승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제사장만이 진정한 혈신의 사도인 것을.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은 많았지만, 그건 강한월을 제압한 후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신주의협의 이름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게 해주마!”
쿠르르르~
만복자가 노호성을 터뜨리며 힘을 개방했다.
장원을 메우고 있던 붉은 안개가 부르르 떨리며, 디디고 선 지면이 거북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졌다.
피 안개의 소용돌이 속에 당당히 선 만복자는 마치 악몽 속의 괴물 같았다.
“피의 제사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봅시다.”
건방진!
핏빛 바람이 일어 날카롭게 휘몰아쳤다.
비수같이 뻗어 나온 바람의 파편들이 강한월을 향해 폭사했다.
강한월은 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머리카락이 우수수 베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여유 있는 표정.
날뛰는 피 바람 사이를 잉어가 유영하듯 헤쳐오는 강한월.
위태로워 보였음에도 차근차근 다가오는 그를 보며 만복자가 내심 감탄했다.
자연체(自然體)에 가까운 움직임.
젊은 나이에 도달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경지였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신주의협의 제자라 할 수 있겠지.’
만복자가 양팔의 소매를 강하게 휘둘렀다.
사방 오장의 영역에서 피 안개가 뭉클뭉클 뭉치더니, 수십 개의 혈구로 변해 강한월에게로 쇄도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드는 혈구가 몹시도 날카로워, 스치기라도 하면 예리한 톱니바퀴에 갈리듯 살과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이건 피해갈 수 없겠다 생각한 강한월이 검을 들어 크게 사선으로 베었다.
수십 가닥의 검기가 뿜어져 나오며, 눈앞까지 날아들었던 핏덩이들과 충돌했다.
치이이이익.
달궈진 인두가 물에 닿는 소리와 함께, 혈구들은 핏빛 수증기로 변해 흩어졌다.
“말했지 않소, 내가 구성을 돌파했다고. 그런 류의 공력으론 나를 이길 수 없소. 천마신교의 혈마가 선보인 마공도 이보다 못하진 않았으니….”
“흥, 의외로 말이 많은 놈이었구나!”
만복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신의 내공은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지난 이십 년간 힘들게 쌓아 올린 공력에 더해, 방금 전 이백 명의 제물로 펼친 혈제를 통해 힘을 보강했으니.
그럼에도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거대한 공력이 담긴 혈구가 검기 따위에 소멸될 리가 없는데.
이게 신주의협의 무공인가? 아니면 정말로 미래 척혈단의 무공?
의문이 꼬리를 물었으나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어린것에게 혈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제사장의 권능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미래의 척혈단도 우리를 어쩌지 못했다! 겁 없이 덤벼들었던 단원 대부분이 한 줌 핏덩이로 변해 사라졌단 말이다! 너라고 다를 것 같으냐?”
성난 외침과 함께 만복자의 상단전으로 기이한 힘이 솟구쳤다.
순수한 혈기가 주변을 자욱이 적시며, 근원적인 피의 힘이 폭발했다.
쏴아아악.
동심원이 퍼지듯 강한월에게 몰려간 파장이 그의 몸을 덮었다.
무공이 아니었고, 물리적인 힘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검으로도, 호신강기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강한월의 피가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서로 뭉치고 굳어 혈관을 막더니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오르는 피.
강한월의 오른팔 한 부분이 불룩 튀어나오더니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이어서 왼쪽 종아리에서도 터져 나오는 핏물.
강력한 화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네댓 군데 살 거죽이 터지며 강한월이 무릎을 꿇었다.
“하하하, 이제 알았느냐? 이것이 진정한 제사장의 권능이다!”
광포한 웃음을 터뜨리는 만복자.
하지만 그는 웃음을 멈춰야만 했다.
웬일인지… 고통에 몸부림쳐야 할 강한월이 담담히 미소 짓고 있던 것이다.
“만복자. 이게 당신이 선보일 수 있는 전부요? 역시… 당신은 제사장 중 제일 하수였군.”
한쪽 무릎을 꿇고 버티던 강한월의 몸에 세 종류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각각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에서 번지기 시작한 빛이 서서히 하나로 합쳐지더니, 만복자가 뿜어내는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몸 곳곳에서 흐르던 피가 멈추고, 혹처럼 부풀었던 피부가 스르륵 가라앉았다.
“너… 도대체 어떻게…?”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두 가지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었소. 과연 구성을 돌파한 내 신공이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 그리고… 내 피가 혈신의 권능에 얼만큼의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네 피가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고?”
“기대일 뿐이었으나 이제는 확신할 수 있소. 분명 내 피는 다르다는 것을.”
강한월이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만복자가 급히 주술을 외우며 혈신의 힘을 배가시켰지만, 더 이상 강한월의 피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혈신의 힘이 출렁이며 덮쳐 온 탓에 칼에 베인 듯 몸 곳곳에서 피가 흘렀지만… 고작 피륙의 상처일 뿐이었다.
강한월은 개의치 않고 검을 뻗었다.
파지직거리는 검강이 일며, 혈신의 권능으로 쳐놓은 보호막을 단숨에 갈랐다.
차라리 무공으로 상대했으면 이리 허무하게 끝나진 않았을 텐데….
제사장의 능력을 과신하던 만복자의 머리가 공중 높이 떠올랐다.
“미래 척혈단원들의 복수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만복자의 머리를 향해 강한월이 나직이 외쳤다.
* * *
역한 피 냄새와 사방에 널린 시체들을 피해 장원 밖으로 자리를 옮긴 일행.
유선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강한월을 바라봤다.
제사장을… 아무리 하급 제사장이라지만… 단 일 검에 베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과 대결할 때는 힘을 숨기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마신환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자신은 졌을 것.
왠지 허탈했고,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강한월. 네 피가 저항력을 가졌다는 게 무슨 말이야?”
“궁금한가?”
열심히 금창약을 바르는 진가린에 몸을 맡긴 채, 강한월이 반문했다.
“궁금하니까 묻지. 아, 네 약점을 찾으려는 의도는 아니고….”
“뭐, 그 정도 비밀은 아니야. 실은 난 병을 알았었다. 피가 제 기능을 못 하는 병이었지.”
“병? 너같이 튼튼한 놈이?”
“그래. 치료법을 찾지 못했으면 난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들었을 거야.”
어린 강한월의 재능을 알아본 신주의협은 그를 제자로 들였다.
친자식처럼 아끼며 키웠는데, 강한월이 열 살이 되던 해 병이 발견되었다.
피가 생명력을 응결하지 못하는 병이었고, 천하의 명의들도 두 손을 들었다.
신주의협의 엄청난 내공으로도 치료하지 못했고, 그때부터 눈물겨운 노력이 시작됐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끝에, 결국 방법을 찾았는데….
소림과 특별한 관계가 있던 것인지 신주의협은 금강부동신공과 대환단을 구해왔고, 동시에 무림맹 비고(秘庫)에 보관되어 있던 마공 심법도 몰래 가져왔다.
“사부님이 찾으신 치료법은 불공과 마공이라는 극단적인 공력을 동시에 익혀 피에 끊임없는 자극을 주는 거였다. 자석의 양극처럼 극단의 자극을 받자, 피에 생명력이 맺히기 시작했지.”
“네 몸의 마기는 그럼 그때부터…?”
“그래. 마불진경을 익히기 전, 이미 소림의 신공과 천마신교의 마공을 익히고 있었다. 어쨌거나 사부님 덕분에 병은 치료되었고, 우연찮게 혈교 비술에 저항하는 힘도 생긴 거야.”
“너… 정말 운이 좋은 놈이구나. 하지만 자만하지 마라. 만복자의 제사 능력은 다른 제사장에 비해….”
“알고 있어. 다른 제사장들은 훨씬 강하다는 걸. 그보다… 나도 궁금한 게 있다.”
“뭔데?”
“만복자는 십이간지 중 어떤 동물이었지?”
“몰라. 그건 겉에서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겉보기엔 모르겠지. 하지만 당신은 이제 알 수 있을 텐데? 만복자의 혈령(血靈)이 당신에게로 옮겨갔을 테니.”
유선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 기척도 없었고, 어떤 티도 나지 않았을 텐데….
“혈령… 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혈령이라는 표현은 틀렸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만복자의 영능 일부가 당신에게 흡수된 것은 사실이잖아?”
제길, 제길, 제기랄.
이 힘을 이용하면 탈출의 기회를 만들 수 있었는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유선이 되물었다.
“그래, 닭의 힘 일부가 내게 흡수됐다. 그런데, 너…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이냐?”
“만복자가 닭이라고? 내 추측이 사실이었군. 혹시나 하고 넘겨짚은 것인데.”
“뭐야? 이 자식이!”
분노가 치밀었다.
도대체 강한월 이 자는 몇 개의 함정을 파고, 몇 번의 덫을 놓는 것인가?
번번이 걸려드는 자신의 어리숙함이 한탄스러웠다.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 나 역시 섭혼술로 정보를 얻어낼 기회를 버리면서까지 모험을 한 거니까. 일전에 원숭이가 돼지를 죽인 일이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줄곧 의문이 들었지. 혹시… 혈승이 죽으면 가까이 위치한 다른 혈승이 힘을 흡수하는 건 아닐까? 합리적인 추론은 그것밖에 없었고, 사실인지를 확인해야만 했어.”
“흥, 흡수한 힘이라 봐야 별것 없어. 의식의 파편 한 조각일 뿐이니까.”
“글쎄? 그 별것 아닌 것을 위해 원숭이가 돼지를 죽였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군.”
“원숭이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원래 비술 담당 혈승은 죄다 미친놈들이거든.”
“뭐, 그럴지도. 하지만 유선 당신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 확인해보면 알 일.”
“뭘 어떻게 확인한다는 말이냐? 내 머리를 갈라 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할 테면 해보라는 듯, 유선이 눈에서 독기를 뿜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이미 강한월의 능력에 승복하고 있었던 것.
“천마에게는 마신강림이라는 무공이 있다. 외부의 영적인 힘을 몸 안에 받아들이는 것으로는 고금 최고의 절학이라 할 수 있지.”
“허 참. 지금 마교에서 배우고 자란 내 앞에서 마공을 강의하겠다는 거냐?”
“들어봐. 어쨌든 그 마신강림 때문에 천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영적인 힘을 내부에 가두고 통제하는 비술을 여럿 알고 계시거든.”
“뭐…? 그럼 혹시?”
“이제야 눈치챘나 보군. 맞아. 혈제 영역에 저항하라고 광군영과 진가린에게 불러 준 서른여섯 자의 운기법. 그게 천마께서 알려주신 비술이었어. 유선 너 역시 궁금했을 테니 몰래 그 운기법을 시도해봤겠지?”
“그래서?”
“천마가 네 몸에 금제를 가할 때 함께 펼쳐 둔 비술이 있어. 서른여섯 자의 운기법을 통해 그 비술이 활성화되면, 이후 외부에서 주입되는 모든 영적 기운이 한 곳에 쌓이게 되지. 바로 네 머릿속에 심어진 벌레 속으로. 나중에 그 벌레를 끄집어내 살펴보면 닭 혈승에서 옮겨온 혈령의 힘을 탐구할 수 있는 거다.”
“강한월… 이 비겁하고 잔인한 자식!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거냐?”
“아니, 이럴 계획은 아니었어. 원래는 원숭이 혈승에 대응하려고 막연히 생각했던 건데… 천마께서 뜻밖의 기회를 주셨고, 만복자 덕에 빨리 시행되었을 뿐. 그리고 네 머리에 심어진 벌레가 독을 뿜는 고(蠱)인 것도 사실이고.”
유선은 입을 다물었다.
자포자기, 회환, 분노… 여러 감정이 뒤섞인 그녀의 표정은 침울했다.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는지, 강한월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대장. 이제 어디로 갈 건데?”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광군영이 물었다.
“이제 환생거사에게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