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신 척혈단 (1)
* * *
만복자를 처리한 강한월 일행은 동창의 안가로 향했다.
장준검과 함께 암자에서 내려온 환생거사가 기다리는 곳.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들을 환생거사가 반갑게 맞았다.
“여어~ 대장.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아직 변장을 지우진 않았지만, 몹시도 익숙한 기운.
그제야 광군영과 진가린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뭐예요? 이게 다 대장이 꾸몄던 거예요?”
진가린이 입을 삐죽거렸다.
미리 알려주지 않은 게 몹시 서운했으니까.
“그건 아니야. 십만대산으로 출발하기 전 적들을 유인할 함정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게 다야. 이후의 일은 모두 제갈이 진행한 거다. 물론 환생거사의 소문을 듣는 순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강한월이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걸 이해할 수 있었다.
회귀자를 잡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냉정한 대장이니까.
“그나저나 별문제는 없었고? 예상대로 흑사련과 남궁세가에서 찾아왔던가?”
강한월의 질문을 받은 제갈윤이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다.
소나무 숲에 부적과 진법을 설치해 대비했던 것부터 동창의 장준검을 비롯한 여러 세력에서 들이닥친 것까지.
어렵게 소나무 숲을 빠져나온 흑사련과 남궁세가는, 동창의 장준검을 보고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상대가 황실의 고위 관료라 하여 무조건 물러설 수는 없는 일.
황실과 무림은 상호 불가침 아니냐고 따졌고, 장준검은 환생거사의 일은 무림의 일이 아니라 혹세무민 사건이라고 맞섰다.
당당한 장준검의 모습에 남궁세가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났지만, 흑사련은 아니었다.
대놓고 황실을 적대할 용기는 없지만, 그렇다고 말 몇 마디에 꼬리를 말고 물러선다면 사파의 종주 흑사련이 아닌 것이다.
몇 번의 불편한 대화가 오간 끝에, 결국 일대일의 승부로 결론을 내기로 합의했다.
“흑사련에서는 어마어마한 기도의 노고수가 나섰는데, 알고 보니 사파 오대 고수로 꼽히는 염왕장 초윤이었어요. 이제 정말 큰일 났다고 걱정했는데, 여기 장준검 천호께서는 태연한 표정이더군요. 그러더니 불과 삼십여 초 만에 그 유명한 초윤을 꺾더라고요.”
제갈윤의 설명은 간단했지만, 그 대결이 얼마나 위험하고 치열했을지 강한월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장 천호께 감사드립니다. 지난번 동굴 때도 그렇고 번번이 신세를 지는군요.”
“별말씀을. 이번엔 운이 좋았소. 초윤 그 노인이 진법을 부수고 오느라 지쳐 있어서 겨우 이길 수 있었던 거요.”
장준검이 겸손하게 답했다.
하지만 강한월은 알고 있었다.
초윤이 최상의 상태였다 하더라도 장준검이 결국 이겼을 것임을.
“그나저나 대장은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저기 저 여자분은 누구고요?”
제갈윤이 유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실은 아까부터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소영영 때문이었다.
강한월과 함께 유선이 들어서는 순간, 소영영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으니까.
“흠…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제법 긴 이야기인데.”
흑시 경매에 참가했을 때부터 십만대산을 떠나올 때까지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매우 긴 이야기였으나, 또한 무척이나 놀라운 이야기였기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크게 놀란 것은 장준검.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이어지고 간간이 혈승이나 회귀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오자, 그의 표정은 점점 당혹감으로 물들어갔다.
“강 소협. 이거 왠지 내가 들으면 안 될 이야기 같구려.”
“아니오. 이제는 장 천호도 아셔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요? 그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소?”
“지금까지 솔직히 밝히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인지라… 황실에 속한 분이라면 더더욱.”
“이제는 믿을 수 있다는 말이오?”
“믿을 수 있습니다. 믿어야만 하고요.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 더 초대할까 합니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시죠.”
* * *
추가로 초대한 사람은 흑시의 주인이자 하오문의 후계자인 민정화였다.
대원들은 무척 놀랐다.
지금껏 철저히 비밀을 유지했던 대장이 오늘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제 때가 된 것.
강한월의 판단은 그랬다.
황실, 흑사련, 거대 세가들… 적들의 강대함이 확인되었고, 문무대만으로 상대하기엔 불가능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믿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장준검과 민정화는 놓칠 수 없는 인물들.
“장 천호, 민 소저. 두 분 다 정보를 다루는데 전문가이시고 합리적인 추론에 능하신 분들이라 오히려 제가 드리는 말씀을 믿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에 앞서 우려를 표하자, 민정화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강 소협을 믿으니 편하게 이야기해주세요.”
“흠…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백 년 후입니다.”
“자… 잠시만요. 이백 년 전이 아니라 이백 년 후라고요?”
“그렇습니다. 미래의 그 시대에 혈교라고 하는 사교 집단이 출현합니다. 그들은….”
혈교의 출현에서부터 척혈단과의 전쟁, 그리고 혈승들이 과거로 탈출한 사건을 담담하게 풀어나갔다.
강한월이 하는 말은 모두 믿겠다던 민정화였지만,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이걸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장준검과 민정화의 표정이 신경 쓰였지만, 강한월은 개의치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미래의 무림맹이 의식 정보를 보내온 것, 천마의 지원을 받아 문무대가 만들어진 것, 그리고 원숭이, 돼지, 말 혈승을 체포한 것까지.
“이것이 우리 문무대가 설립된 목적이고 맡은 임무입니다. 어떻습니까? 믿기 힘든 이야기지요?”
당혹감에서 먼저 벗어난 것은 장준검.
“나는 강 소협의 말을 믿겠습니다. 최근 몇 년간 황실에서 벌어진 이상한 일들과 곤혹스런 상황들이 강 소협의 설명과 부합되니까요.”
“저는…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강 소협과 장 천호의 판단력은 믿습니다. 그나저나, 강 소협이 이런 비밀을 털어놓으시는 것은 뭔가 계획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숨어 있던 혈승 개인을 추적하는 것은 저희 힘으로 해볼 수 있었지만, 드러난 적들의 규모와 세를 볼 때 앞으로의 일은 저희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봅니다.”
“그들에 맞설 연합 세력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궁극적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 단계는 아니고… 장 천호와 민 소저 두 분이 개인 자격으로 힘을 보태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문무대의 대원이 되는 건가요?”
“문무대는 무림맹과 천마신교의 공동 조직입니다. 양쪽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두 분을 부대로 들어오라 할 수는 없지요.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 맞을 겁니다.”
“새로운 조직이라. 생각해두신 이름이라도…?”
“척혈단입니다. 이백 년 후의 미래에도 그렇고 지금 이 시대에도… 혈교에 맞설 조직의 이름은 척혈단이지요.”
* * *
방문 손잡이를 잡은 채 소영영이 망설였다.
유선이 홀로 격리되어 있는 방.
도대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친자매 같은 유선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선아. 나 왔어.”
벽을 향해 누워있던 유선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난 할 말 없어요.”
“선아. 나 좀 봐봐. 마음이 편치 않겠지만 이야기를 좀….”
“흥, 아직도 당신이 내 언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강한월 그자에게 다 들었잖아요. 나는 당신이 알고 있던 신녀 후보 유선이 아니라고요!”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그제야 유선이 몸을 돌렸다.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목소리엔 울분이 가득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옛정을 생각해서 나를 풀어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신녀님을 공격한 죄라도 묻겠다는 건가?”
“신녀님께는 왜 그런 거야? 친자식처럼 우리를 아껴주신 분인데….”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난 당신이 아는 그 유선이 아니라고! 난 미친개 혈승이야! 이 세상 모두가 내 적이고, 내가 죽여야 할 대상이란 말이야!”
찌푸린 얼굴로 악귀처럼 고함을 치는 유선.
하지만 소영영의 눈에는 안타까운 절규로 보일 뿐이었다.
“대장에게 들었어. 신녀님이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네가 독하게 손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아무리 신녀님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네가 마음만 먹었으면 즉사를 면치 못했을 거라고.”
“흥. 그래서? 그래서 뭐가 바뀌지? 내가 혈승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어. 그러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그만 나가줘.”
유선이 다시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영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네가 회귀하기 전 미래에서 몇 년의 생을 살았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십만대산에서 함께 생활한 이십 년의 시간이 아무 의미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 * *
천하 사파의 지존 정철섬의 아들이자, 추후 흑사련을 물려받을 정진악.
거대한 태사의에 걸터앉은 그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고서를 읽었다.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언짢은 표정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흑사련의 수하들이 있었다면 식은땀을 흘렸어야 할 상황.
하지만 정진악에게 보고서를 들고 온 것은 그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뭐 맘에 안 드는 게 있어요?”
비록 환생거사를 포섭해오는 임무에 실패했다지만, 부친이 이렇게까지 언짢아하는 것을 정옥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흠… 이 보고서에 빠진 내용이 있구나. 행사 이후 만복자의 행적.”
“만복자요? 그자가 중요한가요? 특임대 애들이 수소문은 해본 모양인데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어요. 행사장을 나선 후 곧바로 종남산을 뜬 것으로 보여요.”
“만복자를 찾아야겠다. 그가 어떻게 미래의 일을 알고 있던 것인지 알아야겠어.”
“그건 점을 친 거라고….”
“그렇게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점술은 세상에 없다. 어쨌건 만복자를 찾는 일은 다른 자에게 맡길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말거라.”
“알겠어요. 그건 그렇고… 그 건방진 동창은 가만두실 거예요? 흥, 황실의 개 주제에 마치 지가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당분간 동창은 잊어라. 언젠가는 황실과도 대면을 해야 할 테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보다는… 남궁세가를 만나야겠다.”
“남궁세가요? 아니, 왜요? 소나무 숲에서 싸웠던 일을 따지려고요? 그럴 정도로 큰 싸움은 아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네가 알 것 없다. 내가 직접 남궁세가를 만날 테니 자리나 주선토록 해.”
오늘따라 설명을 피하는 정진악.
정옥수의 마음에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부친의 표정이 심각했기에 더 이상 물을 순 없었다.
“해보긴 할게요. 그런데… 과연 그들이 만나줄까요? 명색이 정파의 주축인데. 아버지가 만나자고 하면 꺼려 할 것 같은데요.”
“걱정 마라. 이와 같은 보고서를 그들도 받았다면… 분명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알겠어요. 그건 그렇고요… 생명원을 망쳐 놓은 놈들 말인데요….”
“아직도 그 일을 못 잊고 있는 게냐?”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제 사업이 엉망이 됐는데! 성전사의 재료를 확보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래서?”
“실력 좋은 애들로 백 명만 붙여주세요. 온 천하를 뒤져서라도 그놈들을 잡고 말 테니.”
“쯧쯧. 흑사련 무사들로는 그들을 찾을 수 없단다.”
“아니, 왜요?”
“흑한쌍귀의 말을 들어보니 한 놈은 소림의 공력을, 다른 한 놈은 천마신교의 무공을 썼다더군.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조합이긴 하지만, 어쨌건 그들이 정파나 마교의 영역에 숨어있다면 우리 무사들이 찾을 수 없을 거야.”
“그럼 그냥 내버려 두자는 말씀이세요?”
“넌 딴생각 말고 남궁세가와 만날 일정이나 잡아. 그들을 통하면 뭔가 방법이 생길 테니.”
그제야 웃음을 띠고 물러나는 정옥수.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진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참으로 독한 애란 말이야. 하긴 그러니까 쓸모가 있는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