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신 척혈단 (2)
* * *
쐐애애액.
산 정상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검이 날았다.
날카로운 파공성에 놀란 새들이 푸드덕 날아 자리를 피했고, 뒤이어 또 다른 검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채앵. 채앵.
마치 투명한 손에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두 자루 검은 공중에서 승부를 겨뤘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며 공중전을 펼치던 중, 검 한 자루가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십여 장 떨어진 아래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졌고,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두 자루 검은 천천히 떨어져 내려 각자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하하하. 신주의협께서 봐주신 덕분에 오늘은 삼십여 초를 버틸 수 있었습니다. 마치 내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통쾌했어요.”
“제가 봐주다니요. 곤륜일검 선배의 이기어검이 그만큼 무르익었기 때문이지요. 정말 놀랍습니다. 불과 한 달도 안 되어서 이처럼 능숙한 경지에 다다르다니….”
“모든 게 귀하의 덕이오. 내 살아생전에 이기어검을 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십 년 동안 넘지 못하던 벽을 덕분에 깰 수 있었소. 하하하.”
“천하 오대 검수로 꼽히던 선배이신데, 제가 아니었더라도 당연히 벽을 넘으셨겠죠. 그보다… 오늘은 눈이 내려 풍취가 좋으니 내려가서 따뜻한 술이라도 한잔하시죠.”
“좋소. 존경하는 신주의협과 한잔하는 것은 언제라도 환영이오. 하하하.”
흰 눈으로 덮인 산길을 휘적휘적 내려온 두 사람.
곤륜일검의 어린 시동이 향기 그윽한 술병을 데우는 동안, 모옥 앞 평상에 앉아 환담을 나눴다.
“신주의협께서 먼저 술을 청하는 것을 보니, 이제 이곳을 떠나실 생각인가 봅니다?”
“실은 그렇습니다. 한 달 넘게 신세를 지며 선배의 수행을 방해했으니 이제 떠날 때도 되었지요.”
“방해라니 가당치 않소. 열성적으로 지도를 해주시고 깨달음을 주셨으니 감읍할 따름이지. 생각 같아선 더 붙들고 싶지만… 보아하니 중요한 일이 있으신 것 같아 그러진 못하겠고.”
곤륜일검이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할 때, 시동이 소박한 술상을 차려 왔다.
따뜻한 술로 몸을 덥히며 정갈한 안주 몇 가지를 집어 먹던 중, 곤륜일검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주의협. 내 강호를 떠나 산중에 은거한 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눈치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라오. 아마도 내게 하실 말씀이 있을 듯한데….”
“아니, 뭐… 특별히 그런 것은….”
“괜찮소. 편하게 이야기해 보시오. 전대 무림 맹주이자 천하제일 고수인 귀하가 나 같은 퇴물 늙은이를 찾아와 괜히 시간을 낭비했을 리 있겠소? 나에게 하명할 일이라도 있으신 거요?”
“하명이라뇨. 제가 어찌 감히 선배님께…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은 있습니다.”
곤륜일검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비록 은거 후 이십 년 넘게 세상일에 관심을 끊었지만, 천하제일인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이 거물이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이 늙은이가 도울 일이 무엇이오?”
“혹시라도 나중에 척혈단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시면… 선배께서 도움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척혈단? 그런 단체가 있소? 어쨌거나 신주의협의 말이라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등 모두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설 텐데… 나 같은 늙은이가 낄 자리가 있을까?”
“이름 있는 세력들의 도움을 받긴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요. 자세한 말씀은 올리기 힘듭니다만, 척혈단이 누구를 상대하게 되더라도 저를 믿고 한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팔십 넘는 생을 살아오는 동안 세상의 온갖 일을 겪었던 곤륜일검.
분명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더 묻고 따지지 않았다.
신주의협은 그 정도의 신뢰를 받을 만한 인물인 것이다.
“좋소. 비록 늙은 몸이지만, 척혈단의 이름이 들려온다면 내 반드시 산을 내려가 돕도록 하겠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주의협이 술잔을 놓고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였다.
기뻐하는 표정이었으나, 눈빛 깊숙한 곳에서 얼핏 피로가 엿보이기도 했다.
하긴… 곤륜일검만은 못해도 그도 이젠 적지 않은 나이.
“의협께선 어디로 가시려오?”
“몇몇 선배들을 더 찾아뵐까 합니다.”
술병이 빌 때까지 환담을 나눈 신주의협은 그날 산을 내려왔다.
다음 목적지는 천산.
세수 구십을 넘긴 전전대의 고수 백응신장이 은거 중인 곳이었다.
‘나와는 별로 인연이 없던 선배인데… 과연 내 부탁을 들어줄까?’
시간 낭비가 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신주의협은 망설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월아. 이 사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밖에 없구나….’
* * *
좌우로 늘어선 높다란 기둥 사이를 걸으며, 동창의 일인자 병필태감 곽공공의 허리가 서서히 굽혀졌다.
조정의 고위 대신이나 대장군들마저 눈 아래로 보는 그였지만, 이곳을 방문할 때만큼은 감히 허리를 꼿꼿이 펼 수 없었다.
곽공공이 다가오자 문 앞에 대기하던 궁녀가 안쪽을 향해 고했다.
“귀빈 마마. 동창 병필태감이 찾아왔습니다.”
스르륵 문이 열렸다.
곽공공은 허리를 더 깊숙이 숙인 채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촛불 하나만이 은은한 빛을 뿌리는 어두운 방.
침상에 옆으로 누운 여인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왔다.
“곽공공.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내가 쉬는 시간이란 것을 잊었나요?”
“그럴 리가요. 다만 즉시 보고하라 명하신 환생거사 건의 보고가 접수되었기에….”
“아, 그 건이 있었죠. 그래, 어떻게 되었나요?”
곽공공은 대답하기 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단어 선택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했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여인.
반라의 몸으로 침상에 누워있는 저 아름다운 여인은, 실은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인 것이다.
동창 수장 자리는 말 몇 마디로 날려버릴 수 있는 권세가 그러했고, 자신 정도는 손바닥 몇 번 휘두르는 것으로 압사시킬 수 있는 절세의 무공 또한 그러했다.
남들은 곽공공 본인을 황실 최고수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장 천호가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환생거사는 치졸한 부적술과 어설픈 점괘로 회귀자를 사칭한 사기꾼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혹세무민한 죄를 물어 체포하려 했으나, 흑사련, 남궁세가 등이 방해하는 틈을 타 도주했다고 하며….”
“호호호. 흑사련과 남궁세가의 방해가 있어 임무에 실패했다고? 동창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부드럽고 간드러진 웃음소리였지만, 곽공공이 몸을 떨었다.
즉시 무릎을 꿇은 곽공공이 이마로 바닥을 찧었다.
쿠웅.
“임무에 실패하여 귀빈의 심기를 어지럽힌 죄 죽어 마땅합니다. 부디 용서를….”
“흥, 마음에도 없는 연기하지 말고 어서 보고나 계속해요. 곽공공도 머리가 있으니 나름 분석을 했겠죠?”
“예. 우선 흑사련과 남궁세가가 의심스럽습니다. 감히 동창과 적대하면서까지 환생거사를 확보하려 한 저의가 무엇인지….”
“계속해봐요.”
“저의 조심스러운 추측으로는, 혹시 흑사련과 남궁세가에도 귀빈님과 마찬가지로….”
“회귀자가 있다?”
“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좋아요.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에요. 그리고 또 다른 것은?”
그녀의 진정한 신분은 미래에서 온 회귀자.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곽공공 자신이 유일했다.
알더라도 쉽게 꺼내기 힘든 주제였는데, 다행히 그녀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도주한 환생거사도 여전히 의심스럽습니다. 사기임을 확인했다지만, 여전히 그 배후에 회귀자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겠죠. 아직 끝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죠?”
“우선은 이 정도입니다. 더 상세한 것은 장 천호가 복귀하면….”
“쯧쯧. 명색이 동창의 병필태감이라는 분이 일 처리가 어설프군요. 당신이 놓치고 있는 것과 알면서도 숨기는 것이 있어요.”
“제가 놓친 것이라뇨? 귀빈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얼마 전 회귀자 하나가 죽었어요. 시점으로 볼 때 분명히 환생거사 건과 관련이 있어요. 하지만 그와 관련한 내용이 곽공공의 보고에는 없네요.”
“그…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속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예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숨기고 있는 문제죠.”
“속하가 어찌 감히 귀빈을 속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물론 고의로 속이는 것이 아닐 수도 있죠. 하지만 결과는 같아요.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을 텐데요?”
“장 천호에 관한 말씀입니까?”
“그래요, 장준검. 일전 연쇄 실종사건에서부터 동굴의 보물을 찾아오는 일, 그리고 이번 환생거사의 건까지. 세 번 연달아 임무에 실패하고 있잖아요. 그의 능력을 내가 아는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허나 장 천호는 십여 년 전 귀빈께서 직접 지목하시어 발탁한 인재 아닙니까? 게다가 그는 결코 은혜를 저버릴 성격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귀빈께서 하사하신 무공과 영약이 얼마인데… 그가 절대경에 근접한 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귀빈의 은혜….”
“쯧쯧. 이제 보니 곽공공은 그의 실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군요. 듣기로는 그를 친자식처럼 아낀다더니, 인정이 당신의 눈을 흐리게 했나 보네요.”
정말 내 눈이 흐려진 걸까?
곽공공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귀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복마전 같은 황궁에서 유일하게 정을 주었던 존재를 자신의 손으로 쳐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먹먹해 왔기 때문이다.
“저는 장 천호를 믿습니다. 허나 정말로 그 아이가 의심스러운 짓을 했다면… 반드시 제 손으로 처단하겠습니다.”
* * *
문무대의 지하실.
모두가 자리를 비운 탓에, 원숭이 혈승과 말 혈승은 몇 달간 방치되어 있었다.
각종 기관장치와 금제가 겹겹이 둘러쳐져 감히 탈출을 시도할 엄두는 내지 못했고, 기관장치로 공급되는 건량이 다였기에 식사가 부실했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좋은 시간이었다.
일체의 방해 없이, 몰래 확보한 혈정액과 혈령의 힘을 배양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
【 이봐, 말. 자네도 이 소리 들었나? 】
【 무슨 소리야? 】
【 자넨 한 층 더 아래에 있어 못 들었나 보군. 위에서 소리가 들리네. 강한월 패거리가 복귀한 것 같아 】
【 그래? 그거 잘됐군. 이제 이 지겨운 건량은 그만 먹어도 될 테니. 술도 몇 병 얻을 수 있을지 모르고 】
【 그게 다가 아니야. 느낌이 온다. 또 다른 형제가 잡혀 온 것 같아 】
또 다른 형제?
말 혈승은 즉시 신경을 집중해서 감각을 널리 퍼뜨렸다.
과연… 미약하게나마 혈령의 기운이 느껴졌다.
말 혈승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굴까?
【 혈령이 느껴지는군. 어떻게 된 일이지? 강한월이 공력을 없애고 금제를 가했을 텐데… 】
【 나도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느낌으로 봐선 자네나 나보다 더 강력한 혈령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
물론 알고 있었다.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혈령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의미.
평상시라면 동료를 공격할 리 없으나, 지금 같은 특수한 상황이라면 힘을 흡수하기 위해 자신들을 잡아먹으려 들 수도 있었다.
【 그래서… 어떡하자는 말인가? 】
【 나도 모르지. 어쨌거나 우리에게 혈령이 남아있다는 건 무조건 숨겨야 하네. 그리고 잊지 말게. 자네와 나는 힘을 합쳐야 한다는 걸. 우리가 이 녀석을 잡아먹으면 먹었지, 절대로 먹혀선 안 된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