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반 척혈단
* * *
곽공공의 부름을 받은 이형백호 조철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대략 예상이 되었다.
그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했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 예를 표했음에도, 곽공공은 눈도 돌리지 않고 분재의 잔가지를 다듬기만 했다.
매우 느긋하고 평온한 모습이었지만, 돌조각상처럼 직립한 채 명을 기다리는 조철상으로서는 속이 타들어 갈 노릇.
“조철상. 네가 동창에서 일한 지 몇 년이지?”
“육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육 년이라. 그럼 너도 정보를 분석하고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은 있겠군.”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부족? 그러면 안 되지. 황권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동창의 간부가 실력이 부족하다면, 황제 폐하께서 안심하고 국정에 집중하실 수 있겠나?”
“실언을 했습니다. 추호도 차질 없이 임무를 수행토록 하겠습니다.”
“좋아.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말이야….”
곽공공이 황제까지 언급하며 밑자락을 깔자, 조철상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후 무슨 말이 나올지 뻔했고, 과연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장 천호가 최근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가 되어서 말이지.”
“그… 그렇지 않습니다! 장 천호의 충심은 병필태감께서도 익히 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자식처럼 아껴주시는 병필태감의 은혜를 장 천호는 한시도 잊은 적이….”
순간 곽공공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감도는 것을 조철상은 놓치지 않았다.
다행히 장준검에 대한 신뢰는 여전한듯했다.
“그래, 그의 충심은 내 누구보다 잘 알지. 그래서 이상하다는 말이야. 탁월한 실력으로 지금껏 모든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던 그가 최근 연달아 실책을 범하고 있으니.”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피로가 누적된 것일 수도….”
“나 또한 그리 생각한다. 하지만… 귀빈께서 의심하고 있다는 게 문제야.”
조철상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실의 온갖 은밀한 일을 맡아서 처리하는 동창의 간부로서,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의 눈 밖에 나면 죽은 목숨이라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장 천호를 보호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를 대신할 희생양을 빨리 찾아야 하네. 조철상 자네가 장 천호와 가장 가까운 사이 아닌가? 모든 게 자네에게 달려있네.”
곽공공의 말이 맞았다.
의심의 주체가 곽공공이라면 그간의 정리로 비벼볼 구석이라도 있겠지만, 귀빈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존경하는 장준검을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다.
“저… 실은 좀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그래? 그게 누군가?”
“일전에 낙양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부터 장 천호가 조금 이상했는데… 그게 웬 젊은 무사를 만난 후부터….”
“낙양의 젊은 무사?”
“네. 이름은 강한월이라고….”
* * *
달조차 숨어버린 밤.
삿갓을 깊이 눌러쓴 누군가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인적 없는 산길을 휘적휘적 올라가 도착한 곳은 다 쓰러져가는 관제묘.
내키지 않는 것처럼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삿갓인은, 고개를 흔들며 결국 안으로 들어섰다.
관제묘는 칠흑처럼 어두웠지만, 삿갓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풍파를 못 이겨 칠이 다 벗겨진 관우상.
그 앞에 마련된 아담한 탁자와 의자 두 개.
거기 느긋하게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삿갓인이 입을 열었다.
“당신인가? 나를 보자고 한 사람이?”
“그렇소. 대남궁세가의 태상가주를 이런 허름한 곳으로 청하게 되어 유감이오.”
“장소는 문제 될 게 없지. 만나기로 한 사람이 흑사련의 괴수라는 것이 문제이지.”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매우 무례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진악은 그저 피식 웃을 뿐,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신 말대로 나는 흉악한 사파인이요. 그것도 우두머리급이지. 당당한 정파의 거물인 당신이 어째서 만나자는 내 요청에 응한 것이지?”
“흥, 지금 사람을 청해 놓고 말싸움이라도 하자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소. 그저 뭐가 그리 꺼려지는지, 아직도 삿갓을 깊이 눌러쓰고 있는 당신이 조금 어이가 없어서 말이오.”
휴우.
남궁윤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삿갓을 벗었다.
정진악의 말이 맞다.
내키지 않아 만남을 거부했다면 모를까, 여기까지 온 이상 거리를 둘 필요는 없었다.
“좋아. 나도 쓸데없는 기 싸움을 할 생각은 없네. 도대체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것인가?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게.”
“무슨 일인지는 당신도 이미 알지 않나? 설마 겨우 이십 년 가면을 쓰고 살았다고 형제들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남궁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형제들을 잊었느냐고? 물론 아니다.
하지만… 다시 모이기로 한 때는 지금이 아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형제? 나 남궁윤이 흑사련의 후계자와 형제라? 이거 매우 위험한 말이군.”
“터놓고 이야기하자 한 것은 당신이야.”
“그렇지. 그럼에도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우선 서로 확인이 필요하지 않겠나?”
“무얼 확인하겠다는 말인가?”
“형제가 워낙 여럿이어서 말이지. 나랑 급이 맞는 형제인지 확인해야겠다.”
“급이 맞냐고? 하하하하.”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린 정진악의 눈동자가 빨갛게 변해갔다.
몸 주위로 붉은 광채가 번지더니 짙은 혈향이 관제묘 안을 가득 채웠다.
정진악의 등 뒤로 서서히 떠오르는 핏빛 기세.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그것은, 붉은 용이었다.
“나는 십이 혈승 중 피의 제사장. 진(辰)이다!”
정진악의 기세를 확인한 남궁윤의 가슴이 격동했다.
누추한 관제묘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이제 자신의 기세를 드러내야 할 차례였다.
으르렁 소리가 울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남궁윤의 몸에서도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관제묘의 서까래가 들썩거릴 정도로 과격하게 퍼져 나간 기운이 다시 하나로 뭉치며,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사나운 형상으로 나타났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흉맹한 호랑이.
“반갑군, 진 혈승. 나는 무(武)의 수좌. 인(寅)이다.”
자신을 소개하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반가움, 회한, 희망, 고통…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다.
이렇게, 이십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이백 년 후의 동료들이 다시 만났다.
“다행이군. 처음으로 만난 형제가 무술왕 호랑이 혈승이라니 든든하기 그지없어. 그나저나 호칭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남궁 태상가주라 불러드릴까?”
“호칭이 무어 중요하겠나. 그것보다… 어째서 지금 만나자고 한 거지? 각자의 자리에서 힘을 키운 후 삼십 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다시 뭉치기로 한 것이 우리의 약속 아닌가?”
“나도 삼십 년의 약속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 신속하게 힘을 합치지 않으면 각개 격파를 당할 것이 우려되어서….”
“최근 두 명의 형제들이 세상을 떠난 것 때문에 그러나?”
“그래. 그것 외에도 몇 가지 사건들이 더 있고. 자, 아직 밤은 기니 술이나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세. 대 남궁세가의 태상가주께서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군.”
정진악이 미리 준비한 큰 술동이를 꺼냈다.
매우 큰 항아리였다.
수십 년 만에 만난 형제가 회포를 풀려면 아무리 많은 술도 모자랄 터.
그렇게 그 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궁세가의 태상가주와 흑사련의 후계자가 되어 은밀히 조직을 장악해간 이야기.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간 이야기는 재미있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정말로 고생이 많았군. 그리고 대단한 성과를 쌓았어. 성전을 위한 전사들을 육성하고 있고, 언젠간 흑사련도 물려받을 테니 자네의 공이 크네.”
“고생은 자네가 더 많았을 것 같군. 나야 사파로 들어갔으니 행동이 편했지만, 자네는 고루한 정파 샌님들 틈에 섞여 사느라 마음고생이 심했겠어.”
“뭐, 그런 면이 없진 않지. 하지만 정파 것들도 알고 보면 이익에 눈이 먼 이기적인 놈들이라 다루기 어렵진 않았네. 그나저나….”
“그래.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지. 자네도 느꼈다시피 두 명의 형제가 죽었네. 비록 우리 사이에도 실력 차가 크다지만 그렇다고 쉽게 객사할 정도는 아니지. 분명 누군가가 우릴 노리고 있네. 내가 몰래 운영하던 생명원의 일도 그렇고, 자네가 흑시의 경매에서 보물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그렇고. 냄새가 나지 않나? 아주 지독한 냄새가.”
“하지만 누가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지 않는 이상….”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혹은… 미래의 무림맹에서 무슨 수를 썼을지도?”
“그럴 리는 없네. 회귀의 비술은 자(子) 혈승 외엔 불가능해.”
“그렇게 단정할 순 없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하네. 지금 이곳에 새로운 척혈단이 결성되었을 가능성을.”
“척혈단!”
남궁윤의 긴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얼마나 치가 떨리는 이름인지…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으로 도망치게 만든 원수.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힘을 합쳐야겠군.”
“그래. 아직 삼십 년의 기한이 찬 것은 아니지만, 하루속히 형제들을 규합해야 하네. 그리고 두 가지 일을 처리해야 해.”
“두 가지 일? 하나는 척혈단일지도 모르는 적들을 찾아내 제거하는 것일 테고,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혈경(血經), 그리고 십이신석(十二神石)을 찾는 일.”
“혈경과 십이신석? 그건 자 혈승이 맡은 일 아닌가?”
혈경을 언급할 때의 정진악, 그리고 자 혈승을 언급할 때의 남궁윤의 표정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열두 명의 혈승 중에서도 최상위 초강자에 속하는, 천하제일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이들이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자네는… 자 혈승을 믿나?”
“그는… 혈교의 교주이며 우리에겐 사부나 마찬가지인 존재. 그를 믿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난 그가 두렵다네. 예전의 그때도 이미 두려운 존재였는데, 이곳에서 혈경을 손에 넣으면 얼마나 더 강해질지… 게다가 시간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십이신석마저 그의 손에 들어간다면….”
“무슨 뜻인지 나도 이해할 수 있네.”
정진악이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남궁윤 앞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은 아닐까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법.
“혹시 생각해본 적 있나? 자 혈승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의 생을 살고 있을까?”
“글쎄. 그의 위치와 능력을 생각하면… 황실이거나 무림맹, 혹은 천마신교?”
“나와 생각이 같군. 나도 그에게 대적할 마음은 없어. 그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는 알고 싶을 뿐.”
“좋아. 정보를 공유하며 함께 찾아보세. 그 김에 혈경과 십이신석도 알아보고.”
남궁윤의 동의는 정진악을 기쁘게 했다.
무공을 담당하는 혈승은 성격이 단순해서 협력이 용이한 것이다.
게다가 정파의 기둥인 남궁세가를 장악하고 있으니 용도도 무궁무진.
벌써부터 몇 가지 계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보게, 인 혈승. 우리 연맹이 맺어진 김에 쉬운 일 하나 먼저 해보면 어떨까?”
“쉬운 일? 남궁세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인가?”
“그래. 전에 열두 명의 정파 무사를 납치한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의 방해로 무산됐거든.”
“아, 낙양 인근에서 성전을 일으켰던 게 자네였군!”
“맞아. 십이지 혈제를 준비 중이야. 흑사련 내에 꼭 써먹을 데가 있어서.”
“십이지 혈제라… 누굴 죽이려고?”
“내 부친. 흑사련주. 이 늙은이가 공력이 심후해서 도무지 죽을 기미가 보이질 않아서.”
“하하하, 그렇다면 내가 도와야지. 흑사련주가 빨리 죽어야 자네가 그 자리를 물려받을 것 아닌가.”
“바로 그거지. 자네가 도우면 훨씬 수월할 거야. 구체적인 계획도 이미 세웠다네.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면….”
거대한 항아리의 술이 바닥날 때까지 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우연찮게도, 반 척혈단도 기지개를 편 것이다.
강한월이 신 척혈단을 구성하던 바로 그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