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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57화 (57/210)

057화. 무림맹주 (1)

* * *

소영영과 진가린은 인근 주루에서 술잔을 나눴다.

요 며칠 소영영이 계속 우울해 보였기에 진가린이 마련한 자리였다.

“왜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요? 선배답지 않게.”

“음?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뭐가 괜찮아요? 얼굴에 다 쓰여있는데. 유선 언니 때문에 그런 거예요?”

“뭐, 유선이 문제는… 좀 그렇긴 하지.”

“십만대산에 있을 때 많이 친했나 봐요?”

소영영은 대답하지 않고 술잔을 들었다.

사실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이십 년을 함께 생활했으니 친분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내가 회귀자라면 어떨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각성을 해서 회귀자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선배는 나를 죽일 건가요?”

“얘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반대로도 생각해봤어요. 만약 선배가 회귀자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선배를 잡아서 지하실에 가두고 결국엔 죽게 만들 건가?”

진가린의 극단적인 예에 소영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풋, 얘가 점점… 그래서, 내가 만약 회귀자라면 넌 어떻게 할 건데?”

“난 선배를 구할 거예요.”

“위험한 소리를 하는구나. 문무대의 대원은 사적인 감정에 흔들리면 안 되는 거야.”

“내 맘이죠, 뭐. 난 모든 회귀자가 다 죽여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물론 미래의 정보를 활용해서 나쁜 짓을 하는 건 못하게 막아야겠지만. 유선 언니에 대해서는 선배가 잘 생각해봐요. 만약 새로운 기회를 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제가 돕겠어요.”

“하하, 네가 대장이라도 된 듯 말하는구나. 됐고, 이제 그만 복귀하자. 중요한 작전 회의가 있다고 했으니.”

* * *

문무대에 장준검과 민정화를 포함한 척혈단이 모였다.

장준검은 조만간 황실로 복귀해야 해서, 그 전에 향후 계획을 논의하려는 자리였다.

오늘을 위해 지난 며칠간 제갈윤과 민정화가 머리를 맞댔다.

“강호에서 가장 똑똑한 남자와 현명한 여자가 힘을 합쳤으니 근사한 계획이 나왔겠지?”

곽철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는데, 제갈윤은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

“솔직히 암담해요. 민 소저와 함께 수백 가지 경우의 수를 검토해봤지만, 아직 궁극적인 계획은 수립하지 못했어요. 다만,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리했을 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제갈윤이 설명을 시작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황실, 흑사련, 그리고 남궁세가를 비롯한 몇몇 세가들이 혈승에게 장악된 것은 확실합니다. 천하 사대 세력 중 천마신교를 제외한 모두죠.”

끔찍한 이야기.

천마신교가 혈승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막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혈승들은 회귀자라는 신분을 끝까지 부인할 것이고, 저희 몇몇이 부르짖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죠.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과 전쟁을 벌인다면… 우린 뭐가 될까요?”

“황실에 대적하면 역적이 될 거고, 천마신교와 손을 잡고 세가들과 대적하면 무림 공적이 되겠지.”

담담한 목소리로 강한월이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대원들은 역적이나 무림공적이란 말 앞에서 그처럼 담담할 수 없었다.

특히나 황권을 보위한다는 사명감으로 무장한 장준검은 더더욱 그랬다.

“제갈 소협의 분석엔 저 역시 동의합니다. 힘의 크기뿐만 아니라 명분과 민심 모든 것이 우리에게 불리하죠. 그래,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장준검이 물었다.

이 질문에 답한 것은 민정화.

“말씀드린 것처럼 아직 뾰족한 계획은 수립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림맹주의 입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맹주의 입장이요?”

“그래요. 남궁세가와 몇몇 세가들이 혈승에게 장악되었지만 그들의 힘은 전체 정파 무림의 일부일 뿐이죠. 과연 소림과 무당을 비롯한 나머지 정파가 우리 편이 되어줄 수 있느냐가 현재로서는 가장 중요한 변수이고, 그 답을 쥐고 있는 게 맹주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최우선으로 할 일은….”

“맞아요. 무림맹주가 신분을 숨긴 회귀자인지 아닌지, 그걸 확인해야만 합니다.”

강한월에게로 이목이 쏠렸다.

무림맹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것은 그였으니, 그가 답할 수밖에 없었다.

“문무대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고민했던 문제인데, 지금까진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파의 수장인 맹주에게 천마신교의 잔혼반 비술을 시전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방법을 찾아야만 해요.”

민정화가 강한월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왠지 그라면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예전에는 방법이 없었지만… 어쩌면 지금은 방법이 있을지도….”

“무언가요? 그 방법이?”

“만복자를 상대할 때 확인한 것인데, 혈승끼리는 서로를 느낄 수 있더군요.”

“유선을 데리고 맹주를 만나겠다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위험합니다. 유선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데다가, 만약 맹주가 혈승일 경우 우리 정체만 드러내는 꼴이 될 테니까요. 아직은 맹주의 공격을 감당할 자신도 없고요.”

“그렇겠죠. 그럼 도대체 어떤 방법이…?”

“천마께서 도와주셔서 유선의 몸에 고(蠱)를 심었고, 유선이 흡수한 만복자의 혈령을 고 안에 가둬두고 있습니다. 그 고를 제 몸으로 옮겨 혈령의 힘을 연화시키면… 저에게 혈승을 느낄 힘이 생길지도….”

“안 돼요!”

여러 명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특히나 만복자의 혈제 영역을 경험했던 광군영과 진가린은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런 위험한 기운을 몸 안에 넣겠다고요? 절대로 안 돼요! 차라리 유선 언니한테 부탁해서….”

“아니, 괜찮다. 맹주 건이 아니더라도 원래 하려던 일이야. 유선의 몸에 고를 심은 목적이 그것이니까. 내가 직접 혈령을 체험하고 분석하는 것.”

“그래도 안 돼요! 혹시 부작용이 있으면 어떡해요?”

“맹주가 회귀자인지 확인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물론 혈령을 연화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시도해볼밖에.”

* * *

유선이 강한월의 방으로 불려왔다.

비록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꽤나 수척해진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기를 잃은 눈빛.

“나를 왜 부른 거지? 내가 죽을 때가 된 건가?”

“그럴 리가. 내가 너를 죽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다고.”

“흥, 닭 혈승 만복자의 목을 주저 없이 날려버린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자는 너무 많은 생명을 해쳤어. 너도 그자의 혈제 영역을 봤잖아? 내가 알기로는 유선 너는 이번 생에서 그렇게 살생을 저지른 적은 없는데.”

“흥.”

유선은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강한월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직접 살인을 저지른 경우는 없었다.

그렇다고 본인이 선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신녀궁의 제약 때문에 직접 활동할 기회가 없었을 뿐.

게다가 신녀를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니….

“술 한잔할 텐가?”

강한월과 대면하는 것이 몹시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술까지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유선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흥, 싸구려 술이군. 명색이 대장인데, 술은 좀 좋은 걸 마시지. 그나저나 뭔데? 나한테서 뭘 뽑아 먹으려고?”

“표현이 좀 그렇지만, 뭘 뽑아내려는 건 맞아.”

“뭔데?”

“고(蠱).”

유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금제를 풀어주려는 것은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너… 혹시? 고에 담겨있는 닭 혈승의 혈령을 흡수하려는 거야?”

“맞아.”

“미친놈. 좋은 말 할 때 생각 접어라. 닭 혈승은 제사장이었다고. 제사장의 혈령을 네 몸에 넣겠다고? 자살하고 싶으면 차라리 극독을 마셔.”

말을 해놓고 유선 스스로 흠칫했다.

왜 그를 걱정해주는 걸까?

몹시 혼란스럽고 쑥스러웠지만, 다행히 강한월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너는 술이나 마시고 있어. 고를 빼 줄 테니.”

강한월이 손을 뻗어 유선의 혈을 차례대로 짚어갔다.

천마가 알려준 방식대로 혈을 짚고 진기를 밀어 넣자, 유선의 뇌 속에 자리했던 고가 슬금슬금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얼른 손바닥을 뻗어 유선의 목 뒤 대추혈을 감쌌다.

손바닥에서 따끔한 느낌이 전해졌다.

유선의 몸을 빠져나온 고가 강한월의 손바닥을 뚫고 들어온 것이다.

“너… 정말로 미친놈이구나! 도대체 뭘 믿고… 혈령을 연화하는 방법은 알고 있는 거냐?”

“아니. 이제부터 이것저것 시도를 해봐야지.”

“제대로 미친놈.”

유선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줄까 순간 고민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혈교의 공력이 없으면 소용없는 방법. 게다가 완전한 것도 아니었으니….

“이제부터 집중해야 하니까, 유선 너는 그만 돌아가도록 해. 술 몇 병 가져가고.”

“흥. 정 시도해보겠다면 뭐 좋아. 자살을 하든 미치광이가 되든 알아서 하라고.”

선반 위에 있던 술 몇 병을 챙겨 나가며, 유선이 나직이 덧붙였다.

“혈령만 고에 흡수된 게 아니야. 혈제 영역의 기운들도 들어있다는 걸 잊지 마라.”

유선은 지하실로 돌아갔고, 강한월은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제부터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혼자만의 승부.

이미 몸속에서는 알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이 날뛰고 있었다.

혈관을 돌아다니고 있는 고가 뿜어내는 혈령의 기운이 거북한 파장을 만들어내며 강한월의 기운과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피가 저항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뭔 일이 나도 났을 상황.

“좋아.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나직이 혼잣말을 내뱉은 강한월이 혈령의 힘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 * *

“어이, 미친개. 술을 얻어왔구나! 나도 좀 나눠 달라고.”

지하실로 돌아온 유선을 반긴 것은 원숭이 혈승의 유들유들한 목소리였다.

대꾸도 하기 싫었기에, 유선은 말없이 술병 하나를 휙 던졌다.

“하하, 고맙군. 그나저나 너 강한월하고 무슨 관계야? 술까지 얻어오는 것을 보니 꽤 가까운가 본데? 이러다 둘이 사귀는 거 아냐?”

“입 닥쳐라, 원숭이. 뒤지기 싫으면.”

“누가 미친개 아니랄까 봐 입이 걸구나. 하하하. 어? 그런데… 너?”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기에, 유선은 돌아서 누워버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말을 멈출 원숭이가 아니었고, 표정 또한 평소와 달리 심각했다.

“어떻게 된 거지? 네 몸속에서 혈령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데? 혹시 강한월에게 빼앗긴 건가?”

“관심 끄고 잠이나 자라.”

“이봐, 미친개! 네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똑바로 이야기하라고! 어떻게 된 거야? 혹시 강한월이 혈령을 흡수하려는 거야?”

“뭐가 그리 궁금한데? 네가 알아서 뭐 하려고?”

“만약 그렇다면 이건 좋은 기회다! 강한월이 그런 무모한 시도를 한다면, 그 틈을 타 내가 혈뇌제령술로….”

유선이 몸을 돌려 원숭이를 노려봤다.

어금니를 질끈 물은 그녀의 두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혈뇌제령술? 네가 어떻게 그 비술을 펼칠 힘이 남아있지?”

“아… 아니, 나도 남은 힘은 없어. 실은, 아주 조금 남아있을 뿐이지. 보통 때라면 어렵겠지만 강한월이 혈령과 동기화를 시도하는 순간이라면 조금의 힘으로라도 충분히 강력한 정신 공격을….”

“역시… 돼지를 죽이고 혈령을 흡수한 것이 너였구나!”

“무슨 그런 억측을! 내가 왜 동료를 죽인다는 말이냐?”

“흥. 이봐 원숭이. 시도해보고 싶다면 네 맘대로 해. 하지만 동료로서 조언을 하자면… 쓸데없는 짓 말고 그냥 찌그러져 있는 게 나을 거다. 만에 하나 성공하지 못하면 네 몸 안에 혈령이 있다는 것을 강한월에게 들킬 거고, 만약 성공한다 해도 나머지 대원들이 가만 있지 않을 테니까.”

유선의 눈빛은 사나웠다.

게다가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흥, 쟤 왜 저렇게 심각해? 진짜 강한월이랑 사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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