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58화 (58/210)

058화. 무림맹주 (2)

* * *

그것은 매우 특이한 경험이었다.

고(蠱) 속에 담겨있는 혈령(血靈)을 뽑아내자, 마치 맑은 물에 짙은 먹이 번지듯 알 수 없는 감각이 강한월의 전신으로 퍼져갔다.

실제 경험해본 적은 없으나, 앵속과 같은 마약을 복용하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먼저 영향을 발휘한 것은 만복자가 펼쳤던 혈제 영역의 기운이었다.

뒤를 이은 것은 전신의 피를 오염시키는 혈령의 기운.

아니, 오염이라는 표현은 적합지 않았다.

실로 새로 태어나는 듯한 엄청난 환희.

온몸에 힘이 샘솟고 전에 없던 감각이 눈을 떴다.

생명력이 몇 배로 강화되는 느낌과 함께, 세상의 지배자로 거듭난 것 같은 자신감이 몰려왔다.

이 힘을 받아들여라.

피의 힘과 함께 새로 태어나라.

모든 것이 가능한 신세계의 문을 열어라.

혈령의 힘은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런.

강한월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서둘러 정신을 수습했다.

작은 벌레 속에 담긴 기운이 이 정도라니.

피는 곧 생명이라더니… 실로 엄청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혈령의 속삭임을 참아내며, 천천히 연화를 시도했다.

부작용을 배제하며 힘을 흡수하는 정확한 방법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익힌 마불 진경에 참고할만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만약 이 방법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즉시 금검의 기세로 혈령을 벨 작정이었다.

‘누구의 피가 더 강한지… 해보자.’

* * *

대원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홀로 혈령 연화를 시도하고 있는 강한월을 두고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긴 시간이 흘렀다.

저물었던 해가 다시 중천에 떴을 때, 드디어 방문이 열렸다.

“대장! 어떻게 됐어요? 성공했나요?”

걱정과 불안에 지친 대원들과 달리, 강한월의 안색은 평안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대원들은 안심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실패했다.”

“네? 어째서… 아니, 그보다 몸에 이상은 없고요?”

걱정이 가득한 제갈윤의 물음에 강한월은 씁쓸한 미소로 답했다.

많이 아쉬웠다.

혈령에 대한 이해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혹은 마불진경의 성취가 십성이 되었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몸 안에 잡아 두었던 혈령은 결국 강한월의 기운에 연화되기를 거부하고 증발해 사라졌다.

“괜찮아요. 그딴 요상한 기운 몸에 담아두면 찜찜하기만 하죠 뭐.”

진가린이 일부러 밝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태평할 수도 없는 것은, 당장 무림맹주가 회귀자인지를 확인할 방법이 묘연한 것이다.

“능력을 습득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야. 밤새 혈령의 기운을 관조하며 씨름을 했더니 나름의 감각이 생겼어.”

“정말요? 방법이야 어찌 됐든 맹주의 신분만 확인할 수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을 거야. 그냥 어느 정도 느낌을 받는 수준이지. 게다가 이 감각이 유지되는 것도 불과 며칠일 거다. 능력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서, 감각이 희미해지면 더 이상 느낄 수도 없겠지.”

“어머? 그럼 빨리 맹주를 만나봐야겠네요?”

“그래. 가능하면 오늘이라도….”

* * *

맹주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일정은 꽉 차 있었다.

거대 문파의 수장이라면 모를까,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면담이 어려운 것이 맹주.

전대 맹주인 신주의협은 그나마 격이 없고 소탈했지만, 현 맹주 위무진의 성격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강한월과 맹주의 만남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원로원주 사마염을 통해 뵙기를 원한다는 청을 넣자마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즉시 만남이 성사되었다.

맹주전으로 향하는 긴 복도를 걸었다.

이번만큼은 강한월도 긴장을 피할 수 없었다.

맹주가 회귀자인지 밝혀내야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자신을 감추는 것.

마공을 익히고 있는 걸 들켜버리면, 혹은 문무대에 마교 출신 대원들이 있는 것이 발각되면 득보다 실이 큰 만남이 될 테니까.

호위무사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강한월이 안으로 들어섰다.

한 발 내딛자마자 느껴지는 위압감.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저편에 무림맹주 위무진과 총군사 제갈현선이 앉아있었다.

“문무대 대주 강한월이 맹주와 총군사께 인사 올립니다.”

“어서 오시게, 강 대주. 진작부터 만나고 싶었네.”

은은한 미소와 밝은 목소리.

하지만 맹주의 눈빛은 폐부를 꿰뚫을 만큼 강렬했다.

마치 모든 것을 파헤쳐보겠다는 듯이.

이미 진검 승부는 시작됐다.

강한월은 공력을 꽁꽁 숨기는 한편, 혈령의 감각을 한껏 끌어올렸다.

“빨리 인사드리지 못한 것 사과드립니다. 공사마당하신 맹주님을 방해하는 것이 저어되어….”

“허허, 무슨 그런 생각을. 자네는 전대 맹주이신 신주의협 선배의 제자 아닌가. 남이라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대하도록 하게.”

“맹주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가 오고 갔다.

하지만 말뿐.

그 와중에도 맹주의 눈빛은 끊임없이 강한월의 내부를 파고들었다.

발가벗겨지는 느낌이었고, 그렇기에 감각을 집중하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맹주의 기운을 파악해야 하는데….

“그래, 문무대의 일은 어떤가? 강호의 유물들을 발굴하는 일이라지?”

“맹에서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신 덕분에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성과도 나고 있고요.”

이대로 의미 없는 대화만 계속할 순 없었다.

강한월은 공력을 감추기를 포기하고, 혈령의 감각에 집중하기로 했다.

잠깐이면 된다.

길어야 반 각.

“아, 맞아. 얼마 전 왕희지의 진품을 찾아왔다 들었네. 정말 큰 일을 해냈어.”

강한월이 보호막을 푸는 순간, 누군가 내부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일체의 공력을 일으키지 않고 오로지 눈빛만으로.

과연 무림맹주였다.

정파 무림의 수장으로 대접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노화순청의 경지.

강한월은 대답하는 것조차 잊고 감각에 집중했다.

지금 맹주는 자신의 금검문 공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후엔 그 안에 감춰진 소림의 공력을 보게 될 테고.

거기까진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금강부동신공으로 꽁꽁 싸매 둔 마공을 눈치채기 전에 확인을 끝내야만 한다.

“내가 화산파 출신인 것은 알고 있지? 실은 우리 화산파에서도 찾고 싶은… 유물이….”

맹주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한 껍질 한 껍질 벗겨내며 강한월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것이 즐거운 것 같았다.

이제 한 껍질만 파고들면 마공이 드러날 텐데….

“어떤 유물인가요? 하명만 해주시면 전력을 다해 찾아보겠습니다.”

순간 강한월의 몸속에서 금빛 광채가 폭발하며 맹주의 시선을 차단했다.

여기까지.

더 이상 맹주의 탐색을 허용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맹주의 기운은 충분히 느꼈으니까.

“찾고 싶은 것은 한 폭의 매화도인데… 이제 보니 자네에게 유물 조사만 맡기기엔 아까운 것 같군.”

맹주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역시 신주의협의 제자라는 말인가?

자신의 시선을 차단할 때 선보인 공력의 깊이가 상상 이상이었다.

“저는 지금 일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찾는 건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고요.”

강한월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웠다.

맹주는 혈승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으니까.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어렵게 얻은 혈령의 감각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용무를 마쳤으니 빨리 만남을 끝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내가 성격이 좀 모난 구석이 있어. 좀처럼 남을 인정하지 않지. 하지만 그런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선배가 계신데… 바로 자네의 사부이신 신주의협이시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강한월은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궁금해하지. 어째서 천하제일의 고수이자 무림 맹주를 역임한 신주의협에게 뒤를 이을 제자가 없는 걸까? 자네처럼 훌륭한 후계자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말이야.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뗄 필요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왜 스스로를 숨기는 거지? 왜 신주의협의 제자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강호에 몇 안 되고, 게다가 그 제자가 이처럼 고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예 없는 거지?”

“제가 어찌 감히 고수라 불릴 수….”

“이래도?”

맹주의 눈동자가 노을빛으로 물드는 순간, 강한월의 감각이 비상종을 울렸다.

기척 없이 날아와 가슴을 때리는 맹주의 기운.

위기라고 느껴진 걸까?

보호 본능에 따라 호신강기가 저절로 발동했다.

노을빛 기운을 맞아 파르르 떨리는 호신강기.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맹주가 기운을 슬쩍 끌어올렸다.

어쩐다?

여기서 힘이 없는 척 물러서도 맹주가 믿어줄 것 같진 않았다.

늘어나는 맹주의 힘에 맞춰 강한월의 호신강기도 두터워졌다.

금검문의 내력만으로는 감당이 안 돼 금강부동신공의 기운이 호신강기에 더해졌고….

“이것 봐. 허허, 이렇다니까.”

재밌는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맹주가 다시 기운을 높였다.

노을빛과 금빛이 부딪쳐 찬연한 빛 가루가 뿌려졌다.

강한월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맹주가 계속 힘을 늘려갈 경우, 숨겨 놓았던 마기가 튀어나올 텐데….

하지만 다행히도 맹주의 유희는 거기까지였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강한월의 가슴을 향하던 기운이 스르륵 사라졌다.

“하하하, 이게 명색이 자하신공(紫霞神功)이거든. 자네는 끄떡없이 막아내는구나.”

“무슨 그런 말씀을… 맹주께서 거의 힘을 쓰지 않으셔서….”

“아니, 그렇지 않아. 내 자랑 같지만 자하신공이 정파 삼대 신공으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어. 물론 내가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격이 맞지 않으면 자하신공을 막아낼 수 없지.”

이놈 잘 걸렸다.

맹주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보게, 제갈 군사.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다른 대주들이 내 자하신공을 막을 수 있을까? 청룡대나 백호대 대주면 가능할까?”

“턱도 없지요.”

“그래? 그럼 단주급은? 사신전단 단주는 어떨까?”

“원차승 단주는 사십 후반의 원숙한 초절정이니 버티기는 할 겁니다만… 얼굴이 사색이 될 겁니다. 내상을 입을 수도 있고요.”

“뭐라고? 여기 문화사업을 담당하는 문무대 대주는 이렇게 멀쩡한데?”

사실 강한월은 멀쩡하지 않았다.

몸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죽이 척척 맞는 맹주와 총군사.

자신이 숨은 의도가 있던 것처럼, 맹주도 면담을 허락한 이유가 있는 듯했다.

도대체 뭐지?

강한월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봐, 총군사. 사신전단의 단주보다 강할지도 모르는 이 친구가 문화재 유물이나 찾고 다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쓰는 격이지요. 인사와 조직 관리 측면에서 무림맹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맹주가 강한월에게 말했다.

“이렇다는군. 나야 뭐 별생각이 없지만, 총군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러니 터놓고 이야기 좀 해보자고. 도대체… 의도가 뭔가?”

“의도… 라니요?”

“터놓고 이야기하자니까. 신주의협 그분이 자네를 꽁꽁 숨겨놓은 의도가 뭐냐고? 문화 유물의 소중함 따위의 핑계는 대지 말고. 그건 협(俠)만큼 중요할 수는 없으니.”

맹주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진지하고 엄숙한 정파 무림 최고자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지만, 한편 이해할 수 있었다.

맹주는 궁금했을 것이다.

은퇴 이후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신주의협이 뭔가를 꾸미는 것은 아닌지.

“실은… 제가 많이 아팠었습니다. 사부님은 제가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 걱정하셨었죠.”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사부님이 백방으로 노력하신 끝에 치료는 되었습니다만… 언제 또 재발할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가늘게 뜬 맹주의 눈이 반짝 빛났다.

강한월이 말이 진실인지 파악하려는 듯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