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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61화 (61/210)

061화. 장백산 (2)

* * *

장백산 초입에 자리 잡은 안도현.

인근에서 가장 규모 있는 전장이자 전당포를 겸하고 있는 정가전장 입구를 누군가 서성이고 있었다.

각각 십 대 후반과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들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 무언가 고민이 깊은 것 같았다.

“영근 사형. 정말 괜찮을까요? 이건 사부님이 직접 하사하신 검이잖아요. 전당포에 맡긴 걸 아시면 엄청 실망하실 텐데….”

“괜찮아. 팔겠다는 것도 아니고 잠시 맡겨 두는 거니까. 나중에 돈을 벌어서 다시 찾으면 돼.”

“하지만 지금까지 빌린 돈도 아직 못 갚고 있는데….”

“괜찮대도. 다음 달부터 광배 아저씨 따라서 표국에서 일하기로 했어. 석 달만 쟁자수로 일하면 표사로 승진할 수 있도록 아저씨가 힘써주기로 했으니까… 몇 달만 버티면 돈을 모을 수 있다고.”

“사부님이 표국 일을 허락해 주실까요?”

“송윤아. 사부님이 많이 아프시잖아. 그렇다고 큰 뜻을 품고 무림맹에 들어간 대사저를 불러올 수도 없고. 좋든 싫든 우리가 청송문을 이끌고 갈 수밖에 없어. 사부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너는 너무 걱정 마라.”

영근의 목소리는 진지했고 눈빛은 단단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장난치길 좋아하는 개구쟁이 사형이었는데… 대사저가 떠나고 사부님이 몸져누우신 후에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래요, 사형. 사부님 약값은 구해야죠.”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 사형제가 전장의 입구로 들어섰다.

가슴에 품고 있는 검집을 계속 쓰다듬는 것을 보니 송윤은 무척 아쉬운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사부님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윤 집사님. 안녕하세요?”

“오, 영근이랑 송윤이구나. 그래, 사부님은 좀 어떠시고?”

“아직 누워 계세요. 그래서 약을 지어야 하는데… 돈을 좀 빌렸으면 해서요.”

정가전장 윤 집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현재 이자도 못 내고 있는 이들이 돈을 더 빌리자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평소 존경하던 청송문의 사부가 쾌차를 못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

“그러게 청송문에서 쓸 것은 좀 남겨 놓으셨어야지. 아무리 가뭄에 굶주린 사람들이 불쌍했기로서니 그렇게 있는 거 없는 거 탈탈 털어서 남들 다 도와주고… 그런 일이 매년 반복되니 재물이 남아 날 턱이 있나. 에효, 이거 참….”

“괜찮아요. 저희는 아직 땅도 있고 집도 있는데요 뭐. 오늘은 이 검 두 자루를 맡기려고 해요. 겉모습은 이래도 꽤 좋은 철로 만든 검이거든요. 이걸 담보로 하면 얼마나 빌릴 수 있을까요?”

“생각 같아서는 그냥 도와주고 싶은데, 내가 전장 주인은 아니니 그럴 수는 없고. 어디 한번 보자꾸나. 내가 최대한 잘 쳐줄 테니.”

윤 집사가 꼼꼼히 검을 살폈다.

아무 장식도 없는 평범한 모양새지만, 영근의 말마따나 검 자체는 훌륭했다.

자신도 모르게 윤 집사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손때가 묻은 손잡이와 그에 비해 거울처럼 닦아 놓은 검날을 보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청송문의 어린 제자들에게 이 검이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를.

시세보다 넉넉하게 값을 쳐줘야겠다 생각하고 있을 때, 전장 안쪽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이봐, 윤 집사!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도련님 나오셨습니까? 손님이 담보물을 가지고 와서 감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버럭 호통을 지르며 등장한 젊은 사내는 담보물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손님? 담보? 다시는 청송문에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지시를 잊은 거야?”

“그… 그건 아닙니다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담보를 가져왔기에 안전한 거래라고 판단하여….”

챠악.

사내가 윤 집사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울렸다.

제법 무공을 익혔는지 손힘이 장난이 아니었고, 땅에 쓰러져 대굴대굴 구른 윤 집사의 입술에선 피가 터져 나왔다.

“손위덕!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송윤이 쓰러진 윤 집사를 부축하는 사이, 젊은 사내의 앞을 막아선 영근이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을 날렸다.

영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흑수방이 장백산 일대를 주름잡는 문파라지만, 왜 남의 영업장에 와서 간섭을 하고 직원을 후려친다는 말인가?

“흥, 뭐 하는 짓은. 보면 모르나? 상부의 지시를 어긴 아랫것을 훈계하는 중이지.”

“아랫것? 왜 윤 집사님이 네 지시를 들어야 하지?”

“흐흐흐, 영근 이 녀석. 혼자 똑똑한 척하더니 실은 멍청이였구나. 달포 전에 우리 흑수방이 정가전장을 인수한 사실을 모르는 것이냐? 전장이 흑수방의 소유가 되었으니, 소방주인 내가 집사에게 훈계를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

전장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뒤를 돌아보니 윤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제길… 진짜구나.

사부님 병간호를 하다가 간만에 산에서 내려온 영근은 정말로 모르는 일이었다.

“흥, 흑수방이 어디서 그런 큰돈이 생겨서 전장을 인수한 지는 모르겠지만… 뭐 좋아. 나도 손위덕 너한테서 돈 빌릴 생각은 없으니 이만 가겠다.”

사부님 약값은 급했지만, 애먼 윤 집사에게 피해가 가도록 할 수는 없었다.

검을 집어 들고 영근이 몸을 돌렸지만….

비열한 웃음을 머금은 손위덕은 그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잠깐! 내 용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딜 마음대로 간다는 말이냐?”

“무슨 용무? 난 너랑 더 할 말 없는데.”

“흥, 빚진 놈이 배짱이라더니. 청송문이 지금까지 빌려 간 이천 냥은 어쩌겠다는 거냐? 설마 갚지 않고 떼어먹겠다는 것이냐?”

“무슨! 우리가 빌린 돈이 왜 이천 냥이란 말이냐?”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었다.

대사저가 무림맹 시험 보러 갈 때 빌렸던 것을 시작으로 그 후 사부님의 약값까지 수차례 돈을 빌린 것은 맞다.

하지만 총액은 대략 육백 냥.

밀린 이자를 계산하더라도 절대로 천 냥은 넘을 수 없었다.

“한 번도 일정에 맞춰 돈을 갚은 적이 없더군. 일정을 어기면 위약금이 붙는다는 것을 모르나?”

“매번 양해를 구했고, 정가전장에서도 위약금을 물릴 거란 말씀은 하신 적이 없다고!”

“흥, 그건 옛날이야기고. 이젠 주인이 바뀌었으니 새 규칙을 따라야지. 잔말 말고 이천 냥 당장 갚으라고!”

“손위덕. 네가 평소 나랑 사이가 안 좋다고 이러는 모양인데… 우리 둘 사이의 관계를 이런 공적인 일에 개입시키지 말고….”

“웃기시네. 영근이 너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 같은 가난뱅이 문파의 떨거지를 신경 쓴다는 말이냐? 그리고 너! 나보다 어린놈이 계속 반말로 지껄일 거야?”

분한 마음에 손이 파르르 떨렸지만, 영근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흑수방의 손위덕과 사이가 틀어진 것은 이미 수년 전.

그가 감히 대사저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남몰래 찾아가 호되게 야단을 쳐준 것이 발단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손위덕 따위에게 굽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대사저도 없는 상황에서 사문을 위기에 빠뜨릴 수는 없는 일.

“손 소방주. 지금까지 제가 무례하게 군 것은 사과드립니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을 테니 시간을 좀 주시죠.”

“이제 정신을 좀 차린 것 같군. 하지만 시간을 준다고 갚을 수 있을까? 네놈이 일해서 벌 수 있는 돈보다 이자 쌓여가는 속도가 더 빠를 텐데?”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쉽게 쉽게 가자고. 너희 청송문이 가지고 있는 솔밭 있잖아. 그걸 우리에게 넘겨라. 값은 넉넉하게 쳐주도록 하지. 빚도 싹 갚고 남은 돈으로 사부님 약값도 할 수 있게 말이지.”

결국 그거였나?

영근은 비로소 이 상황이 이해되었다.

얼마 전부터 흑수방에서 솔밭을 팔라고 계속해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청송문에서 도무지 땅을 팔 생각이 없자, 다른 수단으로 압박하기 위해 전장까지 인수한 것이 틀림없었다.

“솔밭은… 팔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제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요.”

“네가 아니면 누가 결정할 수 있는데? 명색이 무림인이라는 네 사부는 병에 걸려 일어나지도 못하고, 대제자라는 네 사저는 혼자만 잘살겠다고 무림맹으로 내뺐는데?”

“내빼긴 누가 내뺐다는 말이냐!”

채앵.

영근이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았다.

자기 혼자 문제라면 얼마든지 참겠지만, 존경하는 사부와 사저를 모욕하는 것은 참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호? 검으로 해결을 하시겠다? 명색이 무인이라 이거지?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냐? 너희 청송문과 우리 흑수방이 비무를 하는 것이다. 만약 너희가 이기면 지금까지의 빚을 탕감해주고, 돈을 더 빌려주도록 하지. 하지만 만약 너희가 질 경우, 솔밭을 우리에게 파는 거다.”

“안 돼요, 영근 사형! 뻔한 격장지계라고요!”

뒤로 빠져 있던 송윤이 달려 나오며 영근에게 외쳤다.

사제가 아는 걸 사형이 왜 모르겠는가?

영근도 이것이 흑수방의 계략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진지하게 비무에 대해 고민했는데, 사실 돈을 갚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마땅치 않던 것이다.

빚을 지고 일정을 어긴 것은 엄연한 사실.

만약 흑수방이 관아에 고발할 경우 솔밭을 빼앗길 가능성이 컸다.

“정말로… 내가 이기면 빚을 탕감하는 것이오?”

“명색이 흑수방의 소방주인 내가 설마 약속을 안 지킬까? 뭐, 원한다면 문서로 써줄 수도 있고.”

“좋습니다. 청송문 대표와 흑수방 대표가 삼판양승의 대결을 펼치기로 합시다. 당신네가 이기면 솔밭을 팔겠소. 대신 우리 청송문이 이기면 위약금을 탕감하고 새로이 이백 냥을 빌려주는 것. 이대로 문서로 써주시오.”

“하하하, 써주지. 얼마든지 써주고 말고. 그래, 비무는 언제 할 텐가?”

“지금 당장 합시다.”

* * *

안도현의 가장 번화한 거리.

청송문과 흑수방이 대결을 펼친다는 소리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땅을 강제로 빼앗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선 증인이 필요했고, 그런 목적으로 흑수방이 사람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잠시 후, 심판을 맡아줄 장백무관의 관주가 도착했다.

꼬장꼬장한 성격의 은퇴한 노 검객이었는데, 평소 청송문과 친분이 있기에 영근이 그를 선택한 것이다.

이런 친분을 알면서도 흑수방은 순순히 동의했고, 그것이 오히려 영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흑수방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

도대체 누가 나서려는 걸까?

흑수방의 대부분은 삼류 건달이고, 제대로 무공을 익힌 고수는 거의 없는 데….

“험험. 영 내키지 않는 비무이지만, 당사자들이 이미 합의를 보았다고 하니 심판을 보겠소. 그 어떤 비겁한 수작도 용납하지 않을 테니 각별히 유의하시오. 자, 그럼 첫 번째 대결을 시작하겠소.”

심판의 신호에 맞추어 영근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뒤이어 흑수방의 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이는 서른쯤 되었을까?

예상했던 대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오늘의 대결을 위해 외부에서 초빙한 고수가 분명했다.

싸한 느낌에 영근의 팔뚝 위로 소름이 돋았다.

‘이게 아닌데….’

빚을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것이지만, 실은 그때만 해도 자신이 있었다.

어린 자신을 상대로 설마 흑수방의 노고수들이 나서진 않을 테고, 나머지 젊은 무사들의 수준이야 뻔하니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자신은 어리석었다.

눈앞의 검은 무복 사내가 그 증거.

솔밭을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흑수방이라면, 게다가 목적 달성을 위해 전장을 인수하는 수고도 마다치 않은 그들이라면… 필승을 자신할 고수 또한 준비해 놓았음이 너무도 당연했는데.

“준비가 덜 되었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냐?”

아직 검도 뽑지 못하고 있는 영근을 향해 흑수방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높낮이 없는 차가운 목소리.

말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길. 몸 성히 끝나기는 글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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