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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62화 (62/210)

062화. 장백산 (3)

* * *

‘그래, 난 청송문의 제자다!’

몇 군데 잘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침을 퉤 뱉어 두려움을 떨쳐버린 영근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쉬이익.

검이 공기를 갈랐다.

속전속결.

세 번을 연달아 싸워야 할 수도 있기에, 영근은 첫수부터 최선을 다했다.

뻗어가는 검을 따라 거센 바람이 일었다.

검날에 깃든 검풍(劍風)을 보고 구경꾼들의 입에서 찬탄이 터졌다.

하지만 그뿐.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영근의 검풍은 정작 흑의 사내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가볍게 허리를 돌려 검을 피한 사내가 벼락같은 역습을 가했다.

채앵.

급히 검을 회수해 공격을 막는 영근.

안전하게 방어한 것 같았지만, 손목에 전해지는 묵직한 통증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역시 상대는 뛰어난 고수.

어찌 상대해야 하나 고심하는 사이, 사내의 공격이 밀어닥쳤다.

챙. 채앵. 챙. 챙.

영근이 본능적으로 검을 움직여 날아드는 검을 막아냈다.

사내의 쾌검은 꽤나 대단해서 점점 속도를 더해갔지만, 영근은 당황한 눈빛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급소를 방어했다.

거친 폭풍우를 일으키는 자신의 검을 막아내는 영근의 모습이 의외였는지, 삼십여 회의 검격이 끝난 후 흑수방 사내가 말했다.

“일류에 한 발 겨우 걸친 수준이지만, 방어 동작은 제법이구나.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난 건가? 아니면… 청송문의 검법이 수비에 특화된 것인가?”

“흥, 타고난 감각은 무슨… 청송문에 성질 더러운 대사저가 계셔서 말이오. 그 누님에게 하도 시달림을 당하다 보니 막고 피하는 실력이 좀 늘었지.”

“그런가? 좋은 사저를 두었군. 내 이름은 고륜일세. 자네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언제라도 나를 찾아오라고 그녀에게 전하시게.”

“그런 말은 나를 이긴 후에 하시오!”

영근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외쳤지만, 속마음은 철렁 내려앉았다.

고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길림성 일대에서 손꼽히는 낭인 무사. 작년 단신으로 철마대 마적들을 무찌른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해서, 장백산 깊은 산골짜기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고수가 뭔 바람이 불어 흑수방에 발을 담근 것인지 모르겠으나… 오늘 승부는 길보다 흉이 클 것이 분명했다.

의지를 북돋아 두려움을 감추는 영근을 보고 고륜은 피식 웃었다.

정신력만 갖고는 이길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다양한 방식으로 공격을 가해 영근을 괴롭혔다.

실력의 차이뿐만 아니라 실전 경험의 차이.

쾌속 일변도였던 좀 전과 달리 속도에 변화를 주자 영근의 수비 자세도 흐트러졌다.

채앵, 샤악, 챙~

구경꾼들 입장에선 흥미진진했지만, 영근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나마 고륜이 독심을 품지 않아 아직까지 버텼지만, 옷 여기저기가 베어지고 가는 핏물이 번져 나오는 것이 이미 승부는 기운 상황.

세 판 중 두 판을 이겨야 하는데, 첫판부터 우스운 꼴을 보이고 있으니….

필승의 묘수가 없을까 고민하는 사이 고륜이 펼친 검이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느낌이 싸했다.

자신도 모르게 솜털이 곤두섰고, 그제야 검날에 뿌옇게 어리는 빛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검기(劍氣).

굳이 필요 없는 검기까지 꺼내 든 것은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쯤이면 되었으니 이제 포기하라고.

원초적인 공포에 몸이 얼어붙었지만, 영근은 포기할 수 없었다.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질끈 문 후 검을 곧추세우고 한 발 전진했다.

아아!

사람들의 안타까운 함성이 터졌고.

고륜의 검기가 영근의 검을 막 절단 내려는 순간.

“졌어요.”

하얀 그림자가 휙 날아들더니, 영근의 뒷덜미를 낚아채 뒤로 당겼다.

아슬아슬하게 검기를 벗어나는 영근.

고륜은 더 이상 공격을 가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하얀 그림자가 뛰어들기 전 분명히 ‘졌어요.’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졌기는 누가 져! 누가 감히 내 싸움에…?”

흥분한 영근이 자신을 끌어당긴 사람을 돌아보는 순간.

따악!

정신이 번쩍 드는 딱밤이 이마에 작렬했다.

“실력이 안 되면 도망칠 생각을 해야지, 어디 어린놈이 싸우다 죽을 생각을 하고 있어?”

익숙한 목소리에 영근의 눈이 번쩍 뜨였다.

딱밤이 어찌나 셌는지 이마에 혹이 생겼지만, 지금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 가린 대사저! 무림맹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긴 어떻게…?”

“너랑 송윤이가 사고 치고 있을 것 같아 한번 와봤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네.”

“정말… 잘 오셨어요. 저는 영근 사형이 어떻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진가린의 품에 매달린 송윤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 년 넘게 못 본 사이에 키는 부쩍 자랐지만, 아직 막내티는 벗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대사저, 정말 어떻게 오신 거예요? 흑수방 문제를 알고 왔을 리는 없고… 혹시 무림맹에서 쫓겨난 거예요? 그런 거죠? 와, 진짜 사고 치지 말라니까! 그리고 옆에 남자는 누구예요? 애인?”

따악!

강력한 딱밤이 다시 한번 영근의 이마에 작렬했다.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는 영근을 향해 미소를 지어준 진가린이 비무장 가운데로 나섰다.

“심판님, 안녕하셨어요? 청송문 선수 교체입니다. 문제없죠?”

“어? 가린이구나. 마침 잘 왔다. 청송문 소속이면 누구라도 나설 수 있으니 문제없고말고.”

갑자기 등장한 진가린을 보고 손위덕은 무척 놀랐다.

하지만 이어진 것은 흡족한 웃음.

한때 마음에 두었지만, 감히 다가가지 못했던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줄 좋은 기회였다.

“고륜 무사. 저년이 바로 청송문의 천방지축 진가린이오. 실력이 제법이라 무림맹에 합격했다 하던데… 그래도 고 무사의 실력이면 문제없겠죠?”

“글쎄요. 무인의 승부란 붙어 보기 전엔 모르는 것.”

손위덕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고륜은 냉랭하게 답변하고 비무장으로 나섰다.

상대가 여인이라고 무시하는 마음은 없었다.

좀 전 영근을 낚아채던 속도만 보더라도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잘되었어.

대가가 후하길래 흑수방 편에 섰지만,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영근을 상대하는 것이 영 불편했었는데….

“그대가 저 청년이 이야기했던 청송문의 대사저시군. 난 고륜이라 하오.”

“흑수방에 계실 분 같지는 않은데… 어쨌거나 잘 부탁드려요.”

싱긋 웃는 진가린의 모습이 조금은 의외였다.

분명 자신의 검에 맺혔던 검기를 봤을 텐데?

“시작합시다!”

고륜의 외침에 맞춰, 진가린이 물 찬 제비처럼 몸을 날렸다.

심판도, 관중들도, 그리고 흑수방 무리도…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두 사제 영근과 송윤이었다.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은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자신이 없는 동안 어린 사제들이 감당했을 고생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보여줘야만 했다.

자신이 왔으니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을.

비록 작고 가난한 청송문이지만, 흑수방 따위를 겁낼 이유는 없다는 것을.

가벼운 걸음으로 쇄도하여 날렵하게 휘두른 진가린의 검.

가냘픈 무희가 춤을 추듯 아름답기만 할 뿐 위력은 없어 보이는 검이었지만, 수없이 실전을 치른 노련한 사내 고륜은 방심하지 않고 검을 마주쳤다.

콰아앙!

분명 가벼워 보이는 검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힘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제자리에 버티고 선 진가린과 달리, 고륜은 정신없이 뒷걸음질 쳤다.

관중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손위덕을 비롯한 흑수방 무리는 놀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누구보다 더 놀란 것은 고륜 자신이었다.

아니, 실은 영근과 송윤이 받은 충격은 그보다 더했다.

“이것… 참. 믿을 수가 없구려. 그 나이에 절정의 공력이라니… 휴, 좋소. 나도 이제 최선을 다하겠소.”

진심을 담은 고륜의 말에 진가린은 여전한 미소로 답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공력을 끌어올린 고륜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고, 영근에게 보였던 것보다 더 선명한 검기가 검 날을 휘감았다.

“앗! 대사저, 조심해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베어버릴 것 같은 농밀한 검기.

다시 한번 소름이 돋은 영근이 가쁜 경고를 외쳤다.

하지만 그의 놀람은 이른 감이 있었다.

마주쳐가는 진가린의 검에도 검기가 맺혀 있던 것이다.

고륜의 그것보다 더 밝게 빛나며, 별 무리처럼 아름다운 빛이 반짝거리는 검기가.

샤아악.

전과 같은 폭음은 터지지 않았다.

비단폭을 가르는 듯한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고륜의 검이 깨끗하게 잘렸다.

툭.

바닥에 떨어지는 검날.

그와 함께 고륜의 고개도 힘없이 숙어졌다.

“내가 졌소.”

우와와아~

관중들의 함성이 터졌다.

영근과 송윤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사제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진가린도 코끝이 찡했다.

내가 청송문을 지켜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 이들을 돌볼 수 있을까?

하지만 상념에 젖기엔 아직 일렀다.

이제 일대일. 아직 한 판이 더 남아있으니까.

“이건 말도 안 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음에도, 흑수방 손위덕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고륜은 길림성 일대에선 알아주는 검기를 다루는 고수.

청송문의 솔밭을 차지하기 위해 어렵게 모셔온 필승의 한 수였는데….

“진가린! 네가 어떻게 검기를 쓰게 된 것이지? 아무리 재능이 좀 있다고 한들, 불과 일이 년 만에 이럴 수는 없는 법! 무림맹에 들어갔다더니, 몸이라도 팔아 절정 무공을 얻어 배운 것이냐?”

“어머? 손위덕. 아주 용감한 말을 하네? 내가 정말로 무림맹 고위층의 애인이면 어쩌려고 그래? 뒷감당할 수 있겠어?”

“뭐? 너… 너 설마 진짜로?”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진가린의 답변에 손위덕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정말로 든든한 뒷배가 생겼다는 말인가?

설사 그렇다 한들 청송문의 솔밭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솔밭을 확보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임무.

“대충 일각 지난 것 같은데,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비무를 해야지? 흑수방에선 누가 나설 건데? 고륜 무인께서 다시 나설 생각인가? 솔직히 난 손위덕 네가 나오면 좋겠는데.”

“치잇….”

당황한 손위덕은 어떤 결정도 할 수 없었다.

문서로 작성했고 증인이 될 관중들까지 지켜보고 있는 상황.

여기서 마지막 판을 진다면 솔밭 확보라는 임무는 물 건너가는 것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봤으나, 고륜은 손위덕을 외면했다.

검이 부러지는 순간 그의 투지도 꺾인 것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으로 욕만 퍼붓고 있던 손위덕을 구한 것은 뒤쪽에서 들려온 냉엄한 목소리였다.

“흥, 위덕. 믿고 맡겨 놓았더니 일을 어렵게 풀고 있구나!”

“아… 아버님!”

흑수방의 방주 손윤방이 인파를 헤치고 등장했다.

실망이 컸던 듯 아들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 곧바로 진가린을 향해 말했다.

“진가린. 못 본 새에 많이 컸구나. 낙양 무림맹에 있어야 할 네가 여긴 어쩐 일이지?”

“방주님도 못 뵌 새에 많이… 호호, 무림맹에 휴가라는 제도가 있더라고요. 덕분에 고향에 온 건데, 와보니 매우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마치 우리 흑수방이 핍박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청송문과는 아무런 마찰이 없었다. 이번 비무도 상호 합의에 의한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럼 뭐 더 할 말은 없어요. 빨리 비무나 끝내도록 하죠.”

“흥, 성격은 여전하네. 어쨌건 청송문도 선수 교체를 했으니 우리 흑수방도 교체를 하려고 한다. 문제없겠지?”

“흑수방 소속이 맞는다면 문제될 게 없죠. 누가 나설 건데요? 혹시 방주님이 직접…?”

“설마 일파의 수장인 내가 너 같은 어린 것을 직접 상대하겠느냐? 마침 새로 흑수방의 호법으로 모신 분이 계시니, 그분께서 네게 가르침을 주실 것이다.”

말을 마친 손 방주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초로의 사내.

솔밭을 차지하기 위해 흑수방이 준비한 진짜 고수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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