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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63화 (63/210)

063화. 장백산 (4)

* * *

사내의 겉모습은 평범했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진가린처럼 그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있었는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에 눈빛마저 조금 퀭한 것이 뛰어난 고수로는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상대한 고륜보다 더 강할 것은 분명한데….

고수가 분명하지만 겉모습이 평범하다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강호의 상식.

과연 어느 정도의 고수일까?

상대의 실력을 재보는 사이, 강한월의 전음이 들려왔다.

—저 사내… 매우 위험해 보인다. 상대하기 쉽지 않을 거야.

—대장이 걱정할 정도라고요? 흑수방 형편에 그런 고수를 포섭할 수는 없었을 텐데…?

—그런 사정은 모르겠고. 어쨌든 네가 상대하긴 버거울 거야. 내가 대신 싸우겠다.

고마웠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흑수방이야 방(幫)이라는 구조상 누구라도 신규 방원이라 주장할 수 있지만, 사부와 제자의 사승관계로 구성된 청송문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대장, 고맙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조심해서 싸울게요.

결심을 전한 후 비무장 중앙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등 뒤로 무언가 휙 날아왔다.

탁!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강한월이 던져준 백학검.

고륜을 상대할 때는 영근이 쓰던 검을 들고 싸웠는데… 이번에는 검의 힘이라도 빌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허허. 이런 예쁜 처자랑 같이 땀을 흘리게 될 줄이야.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군. 난 윤창호라 한다. 우리 재미있게 한번 놀아보자고.”

“어쩌죠? 저는 땀을 안 흘리는 체질이라.”

윤창호의 저질스러운 말투에 싸늘하게 답한 진가린이 백학을 뽑았다.

주인의 감정을 느낀 걸까, 검이 차가운 빛을 뿌렸다.

능글맞던 윤창호가 표정을 바꿀 만큼 서늘한 예기였다.

“이거 놀랍구나. 정말 보기 드문 명검이군. 어디 네가 그 검을 들 자격이 되는지 보자꾸나.”

윤창호는 무기도 없이 진가린을 향해 쇄도했다.

샤아악.

날아드는 그를 향해 진가린이 곧게 검을 뻗었다.

상대가 무서운 고수임을 알았기에, 첫수부터 선명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안개처럼 사라지며 검기를 피한 윤창호가 진가린의 오른쪽에서 나타났다.

순발력을 발휘한 그녀의 검이 거침없이 오른쪽으로 향했을 때, 윤창호는 이미 반대쪽으로 옮겨간 후.

진가린이 이를 악물고 좌우로 반월형의 검기를 흩뿌리자, 윤창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 검지를 뻗어 백학의 검 날 중앙을 튕겼다.

타아아아앙~

거대한 범종을 울리듯 퍼져 나가는 음파와 함께 진가린은 서둘러 뒷걸음질 쳤고, 크게 팔을 몇 번 휘두른 후에야 요동치는 손목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허허, 이거 놀랄 일이군. 이 수법에 버틸 수 있는 후기지수는 한 손에 꼽을 텐데… 어째서 네 소문을 못 들어본 걸까?”

낭패한 모습을 보였지만 윤창호의 입에선 감탄이 터졌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놀랐다 해도 진가린의 놀람만은 못 했다.

장난치듯 가볍게 튕긴 손가락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뻔했고, 가슴엔 격한 통증이 전해졌다.

십오대 문파의 장로급이라 해도 믿을 만한 고수가 변방 이류 방파에 호법으로 들어왔다고?

—가린. 검기를 뿌려대서 어쩌려는 거야? 정면으로 붙지 말고 네 장점을 살려!

강한월의 전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적절한 충고였고, 진가린은 바삐 몸을 움직였다.

윤창호가 날린 날카로운 지풍(指風) 몇 줄기가 화살처럼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핑, 피잉.

말이 쏘아진 화살이지, 실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여러 줄기가 마치 진법이라도 이루듯 방위를 갖추어 날아든 탓에 피하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분명 몇 달 전의 진가린이라면 피하지 못했을 공격.

하지만 그녀는 지풍 사이를 아슬아슬 헤엄쳤다.

천마에게서 하사받은 무영보의 위력이 발휘되고 있었다.

‘무영보가 없었으면 몸에 바람구멍이 났겠구나.’

마른침을 삼키며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진가린이, 연속해서 날아드는 지풍을 뚫고 서서히 윤창호에게 접근했다.

마치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묘한 움직임을 보이며 접근해오는 진가린을 윤창호는 신기한 듯 바라봤지만, 그렇다고 긴장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거 계속해서 놀라게 하는구나. 그럼 어디 이것도 피해 보거라.”

윤창호가 코웃음을 치더니 손가락 열 개를 동시에 튕겼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도 없이, 빛줄기 열 개가 공간을 갈랐다.

네댓 배는 더 빨라진 속도.

지풍이 아닌 지기(指氣)였다.

치잇.

무영보라는 절세의 경공으로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진가린은 검을 휘둘렀다.

눈으로 보고 생각할 틈도 없이, 육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다행히 손에 쥔 것은 백학이었기에 강력한 지기를 쳐내면서도 부러지지 않았다.

또다시 이어지는 빛줄기들.

윤창호는 가볍게 손가락을 뻗었지만, 진가린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야 했다.

그래도 잘 막고 있는 것일까?

실은 아니었다.

지기가 검에 부딪힐 때마다 충격으로 몸을 떨었고, 조금씩 누적되는 내상으로 인해 그녀의 입가엔 가느다란 핏물이 흘렀다.

—진가린. 지력을 검기처럼 쓰는 것을 보니 그자는 대리 단가의 직계 고수다! 구파의 장로급을 넘어선 인물이니 그만 항복하고 물러서!

걱정 가득한 강한월의 전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설 수 없었다.

사제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이게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비무일 수도 있는데….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다시 몇 걸음을 내디뎠다.

버티기 힘들었지만, 윤창호도 신주의협이나 천마가 아닌 이상 한계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시 몇 번의 공격과 수비가 반복되었고, 어느새 진가린은 윤창호의 이 장 앞까지 접근했다.

“보기 드문 실력과 투지.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재능 있는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라도 든 걸까?

윤창호가 내뱉은 말엔 제법 진심이 담겨있었지만,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오히려 독하고 과한 한 수.

우우우웅.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윤창호는 오른손 검지 하나만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서 말벌의 날갯짓 같은 진동음이 울렸고, 하늘에서 내려치는 벼락같은 지기가 공간을 찢었다.

이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진가린은 직감했다.

무영보의 신법으로도 피할 수 없고, 백학으로 막는다고 한들 충격으로 쓰러지겠지.

각도를 조정해서 힘을 흘려보내면?

대장이 그렇게 하는 것을 자주 봤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분명 충격을 절반 이상 줄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한들 결국 지는 것은 자신.

“챠압!”

힘찬 기합을 지르며 진가린이 검을 곧추세웠다.

육신의 눈을 감아 감각의 눈을 활짝 뜬 그녀는 날아오는 기운을 향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퍼어엉!

폭음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뒤로 나뒹굴었다.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역시… 안 되는 거였나?

안타까운 함성이 관중들 틈에서 터져 나왔다.

한 바가지 피를 토하며 억지로 일어서는 진가린을 부축하기 위해 영근과 송윤이 달려왔다.

“세 번째 대결. 무승부! 둘 다 부상이 심하니 더 이상 대결은 불가요!”

핏물을 훔치는 진가린의 귀로 심판의 외침이 들려왔다.

헤헤, 성공한 건가?

고개를 들어 윤창호를 보니, 뭉개진 왼쪽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펄썩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너… 너… 초절정에 달한 내 공격을… 어떻게 나에게 되쏠 수 있는 거지? 아무리 네 검이 명검이어도 이럴 수는 없는 법! 지금껏 공력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냐?”

경악과 불신에 물든 표정.

상처를 지혈할 생각도 못 하고 진가린에게 따져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의 등 뒤.

그곳엔 강한월이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봤죠, 대장?

내 몸속에 괴물이 잠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죠?

“넌 항상 그랬지만 이번엔 특히 무모했다. 앞으로는… 이러지 마라.”

하지만 대장도 알았잖아요.

내가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날 구하러 뛰어들지 않은 거잖아요?

“다행히 내상이 심한 것 같지는 않구나. 며칠 요양을 하면….”

대결은 끝이 났다.

하지만 청송문과 흑수방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진가린! 이제 보니 무림맹에서 요상한 사술을 배워왔구나! 네까짓 게 어떻게 감히….”

부축을 받으며 힘들게 서 있는 진가린 앞으로 손위덕이 뛰어들었다.

분을 참기 힘들었는지, 삿대질하는 손가락을 파르르 떨면서.

“흑수방의 소방주. 방금 무림맹이 사술을 가르친다 했소?”

진가린의 앞을 막아선 강한월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 사술이 아니라면 어찌 저년이….”

“닥쳐라!”

방주 손윤방이 급히 아들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아버님! 제가 진가린 저년을 잘 압니다. 악독한 사술이 아니고서는….”

“그 입 닥치라고 했다!”

보는 눈들이 없었으면 뺨이라도 한 대 갈겼을 텐데.

한동안 아들을 죽일 듯 노려보던 손윤방이 강한월을 향해 말했다.

“보아하니 무림맹의 분 같은데… 방금의 실언은 내가 대신 사과드리오. 정명한 무림맹이 사술을 가르칠 리 없지요. 이번 비무의 결과에 대해서는 깨끗이 인정하는 바요.”

“방주께서 사과를 하시니 더 이상 문제 삼진 않겠습니다.”

“고맙소. 하지만… 이걸 어쩐다? 비무가 무승부가 되었으니 청송문의 채무 또한 해결되지 않은 것인데….”

우우우우~

구경꾼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다.

손 방주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먼 산을 쳐다봤지만, 그래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염치없다 욕을 먹더라도 솔밭만은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청송문의 채무가 총 얼마입니까?”

“도합 이천 냥이요. 당장 해결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관아에 고할 수밖에….”

강한월이 뒤를 돌아봤다.

이천 냥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영근은 고개를 저었고, 도와줄 필요 없다는 듯 진가린도 고개를 저었다.

“이천 냥이면 청송문과 흑수방의 문제는 모두 해결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기….”

강한월이 품속에서 전표를 꺼냈다.

손 방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대했던 건 이게 아닌데….

“안돼요! 제 개인적인 일에 공금을 쓸 순 없어요.”

“그래, 공금을 쓸 순 없지. 하지만 이건 내 개인 돈이다.”

“하지만….”

강한월은 전표를 건냈다.

손 방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천 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자.”

강한월과 진가린을 향해 독한 눈빛을 남긴 후 흑수방 무리는 떠났고, 모여 있던 구경꾼들도 썰물처럼 흩어졌다.

“형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대사저의 연인이셨던 거군요? 왈가닥 성격 받아 주기가 쉽진 않으셨을 텐데….”

따악~

다시 한번 딱밤이 작렬했다.

이번 것은 좀 더 셌는지 영근이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우리도 가자.”

진가린이 기운을 차리고 앞장섰다.

내일 일은 알 수 없지만… 당장은 기분이 좋았다.

* * *

석양이 붉게 물들 무렵 청송문에 도착했다.

지난 추억들이 샘솟는지 진가린은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작은 장원.

아니, 장원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작은 건물 두세 채가 전부인 곳이었다.

“여기가 제가 자란 청송문이에요. 좀 볼품없죠?”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구나.”

강한월의 말은 진심이었다.

주변 경관에 자연스레 동화된 모습.

나무 한 그루, 돌담 하나까지 생기를 가득 담고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죠. 하지만 별 볼 일 없는 건 사실이에요. 문파의 인원이래 봐야 사부님과 제자 셋이 다이니.”

“그러니 한 가족같이 지낼 수 있었겠지. 그리고 넷이면 작은 게 아니야. 내가 자란 금검문은 몇 명인지 알아?”

“몇인데요?”

“사부님과 사백, 그리고 나. 단 셋이야.”

게다가 사부와 사백을 금검문 내에서 보는 날은 드물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르침을 주기 위해 사부가 가끔 들렸을 뿐… 강한월은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야 했다.

강한월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청송문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금검문의 모습과 겹쳐지며 사부 신주의협이 떠올랐다.

아마도.

청송문의 사부도 신주의협과 같은 기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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