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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64화 (64/210)

064화. 장백산 (5)

* * *

흑수방의 회의실.

만만히 봤던 청송문에 패배나 다름없는 무승부를 당한 터라 분위기는 침울했다.

“고륜은 어째서 보이지 않는 것이냐?”

“패배에 책임을 지겠다며, 받았던 은자를 돌려주고 떠났습니다.”

퉁명스러운 방주의 질문에 그의 아들 손위덕이 답했다.

“허허 돈 몇 푼 반납하는 것으로 책임질 수 있는 일이란 말이냐? 그깟 어린 계집 하나 못 이겨서 대사를 그르쳐놓고는….”

불만을 토하던 방주 손윤방이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멈췄다.

그깟 어린 계집에게 이기지 못한 또 다른 인물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호… 호법. 이거 죄송합니다. 윤 호법이 계신데 제가 말실수를….”

“괜찮소. 방주 말 대로 그 계집을 이기지 못해 일을 어렵게 만든 것은 사실이니까.”

괜찮다는 말과는 다르게 윤창호는 잔뜩 인상을 썼다.

손 방주의 실언에 감정이 상한 것인지, 아니면 비무 중 입은 부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방주가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눈치를 본다는 것.

윤창호의 실질적인 위치가 방주 그 이상이라는 것인데, 실은 이곳에 모인 자 중 가장 높은 사람은 방주도, 윤창호도 아닌 중년의 승려였다.

“손 방주. 많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나, 결과만 놓고 문책할 생각은 없소. 중요한 것은 다음 계획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승려가 입을 열자 모두 공손한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청송문에서 빌린 돈도 이미 갚았다고요? 그렇다면 더 이상 채무를 꼬투리로 솔밭을 요구할 수는 없게 된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설마 이천 냥이라는 큰돈을 그리 쉽게 내놓을 줄이야….”

손 방주가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대사님. 기왕 이리된 것… 오늘 밤 청송문을 급습하여 모조리 요절을 내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연놈들을 모두 베어버리고 청송문을 차지하면 솔밭은 자연스레 딸려올 테니까요.”

젊은 객기일까?

몸을 사리는 아비와 달리, 손위덕이 용감히 의견을 말했다.

“허허, 소방주는 강단이 있군. 하긴 무림 방파 간의 싸움이 드문 일은 아니지. 하지만… 과연 이길 자신은 있고?”

“저… 그… 옥룡 대사님이 진가린 그년만 맡아주신다면, 늙은 사부와 제자 두 놈은 저희가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제발 입 닥치라는 아비의 매서운 눈짓에도 불구하고, 손위덕이 뻔뻔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제 불호령이 떨어지겠구나 싶어 손 방주의 목이 움츠러들었지만, 의외로 옥룡이라 불린 승려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런 일 처리 방식은 내 극히 싫어하는 것이지만… 당사자인 흑수방에서 강력히 희망한다면 고려해볼 수는 있겠지. 어찌 되었건 솔밭 확보를 미룰 수는 없으니 말이야.”

“그럼 지금 당장 출동 준비를 할까요?”

“아니. 일이 급하다 한들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 솔밭이 도망갈 일은 없으니까. 그보다… 윤 사제.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진가린 뒤에 있던 검은 무복의 사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내가 보기엔 범상치 않아 보이던데.”

“저 역시 그리 느꼈습니다. 계속해서 전음을 날려 진가린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 같더군요. 분명 그가 한 수 윗줄로 생각됩니다.”

“한 수 위라… 그리 보셨는가? 그럼, 사제가 상대하면 이길 수 있겠는가?”

“옥룡 사형. 제가 아까 승리하지 못한 것은 방심하였기 때문이지, 절대로 제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 사제가 오해를 하고 있군. 그런 뜻이 아닐세. 진심으로 묻는 거야. 그 사내가 풍기는 기운이 정말 심상치 않았거든.”

“네? 그렇게 느끼실 정도였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한들… 옥룡 사형이 계시는데 걱정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허허, 자네는 나를 너무 추켜세우는군. 어쨌든 좋아. 젊은이의 실력이란 물리적 한계가 있는 법이니 괜한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산인(山人)의 명이 지엄하시니 우리가 나서서 결론을 보자고. 내키진 않지만 말이야.”

* * *

툇마루에 걸터앉은 강한월은 아직도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보면 볼수록 고즈넉한 모습이 정겨웠다.

동방선도의 맥을 잇는 명문의 본가로서는 허름했지만, 속세의 풍진에 관여치 않는 고인의 거처로는 더할 나위 없는 곳.

차가운 산 공기의 청명함과 해거름의 운치를 즐기고 있을 때, 스르륵 방문이 열리며 진가린이 나왔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다. 당연히 네가 먼저 사부님께 인사를 드려야지. 그래, 좀 어떠신 것 같아?”

“모르겠어요. 왜 이렇게 갑자기 안 좋아지신 건지… 제가 낙양으로 출발하기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셨는데.”

진가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웠다.

자신이 회귀자가 아닐까 걱정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좀 뵐 수 있을까?”

“그럼요. 안 그래도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강한월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영근이 열심히 불을 땠는지 바닥은 따뜻했고, 그 온기만큼이나 포근한 인상의 노인이 강한월을 맞이했다.

“강 소협, 반갑소. 가린이의 상관이 오셨는데 내 일어나 맞이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시오.”

“불쑥 찾아뵙게 되어 제가 송구합니다. 말씀 편히 하시지요, 장학송 문주님.”

벽에 기대앉은 노인에게선 세월의 지혜가 묻어났다.

하지만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밝은 미소와는 달리, 병색이 완연했다.

기름이 다해 꺼져가는 등잔불의 심지.

강한월은 이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선도(仙道)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양생(養生)을 추구하는 공부이고, 장학송 문주는 동방선도를 일평생 정진한 수도자인데… 어째서 원기와 생명력이 소진된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허허, 강 소협께선 내 모습이 안타까운가 보구려. 그리 생각할 필요 없소. 사람이 죽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순리인 것이지요.”

“사부!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진가린이 소리를 빽 질렀다.

제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 사부는 작심하고 말을 계속했다.

“가린아. 너도 마음을 편하게 먹거라. 청송문의 가르침이 무엇이냐?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탈각하여 우화등선하는 것이 한 방법이며, 몸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자연과 하나 되는….”

“아, 듣기 싫다고요!”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진가린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강한월은 그녀를 도와 장학송 문주를 회복시킬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이 우선이니까.

“문주님. 실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 강 소협. 궁금한 것이 무엇이오? 내가 아는 것이라면 답변을 드리리다.”

진가린 때문에 곤혹스럽던 장학송은 강한월의 질문에 반색을 했다.

“흑수방에 관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그냥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아서요. 분명 조만간 공격이 있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요?”

“그것이… 청송문이 소유한 솔밭을 넘기라고 이 사달을 일으킨 것인데….”

“적당한 가격을 쳐준다면 솔밭을 넘기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빨리 소란을 끝내고 문주님의 건강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만.”

“우리 청송문은 재물에 욕심내는 곳이 아니오. 다른 것이라면 얼마든지 넘기겠지만… 하지만 솔밭만은 그럴 수가 없소.”

“어째서입니까?”

“청송문을 만드신 개파조사께서 명하셨기 때문이오.”

“청송문의 시조께서요? 아직 이해하기 어렵군요. 도대체 그 솔밭에 어떤 의미가 있길래….”

나름 문파의 비밀이라도 되는 건지, 장학송은 즉답을 못 하고 망설였다.

강한월과 진가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결국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청송문을 물려받을 제자에게 알려줘야 할 내용인데, 지금이 적당한 때인 것 같군. 여기 가린이가 있고, 마침 강 소협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

장학송 문주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청송문을 세운 인물은 동방선도의 기틀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 백선(白仙).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지만, 당시에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무공과 공명정대한 인품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소림이나 무당 같은 거대 문파를 세울 수도 있었지만, 부와 권력에는 뜻이 없던 그는 청송문을 세우고 소수의 제자를 가르치며 조용히 살았다.

말년에는 세상을 유람하며 지냈는데, 언젠가는 천축으로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검고 윤기 나는 바위 두 개를 가져왔다.

조용히 뒷산의 솔밭을 매입한 백선은, 깊이 땅을 파고 그 속에 바위를 보관했다.

“솔밭을 넘길 수 없는 이유가 실은 그 바위 때문이라는 거군요.”

“맞소. 백선 시조께선 이후 제자들에게 유훈을 남기셨소. 어떤 일이 있어도 솔밭이 남의 손에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우리 청송문이지만, 이 유훈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명이 된 것이지.”

“도대체 그 바위가 무엇이기에…?”

“시조께서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으셨소. 다만, 천기를 거스르는 역천(逆天)의 기물이라는 말씀만 하셨지. 악인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가 혼란에 빠질 수 있으니 빛을 보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 그분의 유훈이었다오.”

“그렇다면 차라리 바위를 파괴하지 않으시고…?”

“그 이유까진 나도 모르오. 다만, 시조께선 보통 분이 아니셨으니, 무언가 생각이 있으셨겠지.”

상황은 명쾌해졌다.

도대체 청송문의 비밀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흑수방이 노리는 것은 솔밭에 묻혀 있는 바위.

왠지 천하를 혼란에 빠트릴 커다란 음모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세상을 위협하는 가장 큰 재앙은 회귀자인데….

혹시 흑수방의 배후에도 회귀한 혈승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강한월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앞마당 평상에 소슬한 달빛이 쏟아졌다.

장학송 문주와 대화를 마친 강한월은 그곳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술맛이 좋구나.”

“물이 좋으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동방선도의 선인들이 선택한 곳이니 땅과 물의 기운이 남다를 수밖에.

그러니 더욱 이상했다.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이곳에서 생활하는 장학송 문주는 무병장수해야 함이 당연한데….

“사부님 상태는 어떤 것 같아요?”

“맥을 짚어본 것이 아니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진원지기가 크게 상하신 것 같더구나.”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요?”

강한월은 답할 수 없었다.

특별한 조치가 없다면 일 년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시간을 연장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진기를 불어넣어 억지로 생명을 붙들어 놓고, 천고의 영약을 구해 복용시키면 되는 것이다.

영약을 구하기란 극히 어려운 것이지만 강한월은 이미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불진경을 소림에 건네주며 대환단을 요구해도 될 것이고, 흑시의 주인 민정화에게 부탁하면 수백 년 묶은 설삼을 구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이런 것은 그야말로 임시방편인 것이다.

기껏해야 몇 년의 시간을 더할 뿐이고 근본적인 치유책은 될 수 없었다.

장학송 문주가 병을 얻은 원인을 찾아야 했다.

“가린아. 일단 몇 달은 문제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정작 위급한 문제는 따로 있으니까.”

“흑수방 말인가요?”

“그래. 누군가 오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들 같구나.”

강한월이 술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가린은 사제들을 불러 사부님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접근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담장 너머에서 일렁였다.

검은색으로 복장을 통일한 백 명이 넘는 장정들이 청송문의 대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쯧쯧. 듣던 대로 초라한 곳이군.”

야심한 밤 찾아온 불청객다운 무례한 인사말.

흑수방 방주와 윤창호, 그리고 옥룡이 장정들을 헤치고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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