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화. 장백산 (6)
* * *
차갑게 내려앉는 달빛 아래에서 진가린과 손 방주가 마주 섰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을 보니 우리가 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구나?”
“발소리가 이리도 요란한데 모를 수가 있나요.”
“흥, 공손하지 못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가린이 너와는 할 말이 없다. 어서 네 사부를 모셔오너라.”
“어쩌나. 사부님은 불청객은 상대하지 않으시는데….”
“문주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뭐, 좋다. 그럼 대제자인 너와 이야기하도록 하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뒷산의 솔밭을 우리 흑수방에 넘겨라. 가격은 시세의 열 배를 쳐주마.”
“좋네요, 답하기 쉬운 이야기여서. 솔밭은 안 팔아요.”
“가격이 마음에 안 드는 거냐? 하긴 무림맹 물을 먹고 왔으니 눈이 높아졌겠군. 좋다, 시세의 오십 배를 주겠다!”
진가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손 방주는 이것이 좋은 신호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그녀가 놀란 것은, 이런 미친 가격을 부를 정도로 이들이 솔밭을 원하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
“시세의 천만 배를 주시면 고려해 볼게요.”
“천… 만 배? 이 미친 것이!”
“잠깐. 손 방주는 좀 진정하시오.”
발끈하는 손 방주를 만류하며 옥룡 대사가 나섰다.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서는 손 방주를 보고 진가린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제야 두목이 등장한 건가요?”
“두목이라… 허허 나 같은 출가인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군. 나는 옥룡이라 하네. 우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보세나.”
“허울뿐인 방주보다는 대사님과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네요. 말씀해보시죠.”
“자네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네. 솔밭의 소유권은 우리에게 넘어오게 되어있어. 다만 그 방법은 아직 유동적이지. 흡족한 가격으로 거래를 할 것인가, 아니면 청송문이 멸문당할 것인가? 무얼 선택하겠나?”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은 분명한 협박.
하지만 십만대산을 다녀오며 악전고투를 겪은 진가린이 벌벌 떨 정도는 아니었다.
“본색을 드러내니 대화하기 편하네요. 멸문시킬 자신은 있고요?”
“내가 보기엔 진가린 자네와 저 뒤편의 젊은이가 청송문 전력의 전부인데… 자신이 없을 리가 없잖는가?”
그렇게 자신 있다는 말이지?
하지만 나도 자신 있거든.
우리 대장이 얼마나 강한데….
진가린은 고개를 돌려 강한월을 보았다.
그게 신호가 되었을까?
지금껏 조용히 있던 강한월이 앞으로 나섰다.
“대사. 대리국 천룡사에 계셔야 할 분이 이 먼 곳까지 걸음 하신 이유가 궁금하군요.”
갑작스런 질문에 옥룡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응? 눈썰미가 대단하군. 자네는 누군가?”
“저는 강한월이라 합니다. 청송문의 호위무사이지요.”
“자네 정도의 고수가 이런 작은 문파의 호위무사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아직 제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솔밭의 바위 두 개.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다만 지엄한 명을 받아 확보에 나섰을 뿐.”
옥룡의 말은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더욱 궁금해졌다.
대리국 천룡사의 고승에게 지엄한 명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대화를 나누며 강한월은 옥룡의 기를 살폈다.
회귀자나 혈승의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만만히 볼 수는 없는 것이, 이미 밝힌 것처럼 그는 천룡사 출신인 것이다.
소수의 몇몇이 하나의 왕국을 수호할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자랑하는.
“청송문은 매매할 생각이 없고, 흑수방은 물러날 뜻이 없는 듯하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군요. 대사와 제가 대결을 펼쳐 결론을 내면 어떻겠습니까?”
“무엄하다! 이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너 같은 젊은 것이 도전을 한다는 말이냐! 너는 내가 상대해주겠다!”
옥룡 뒤에 서 있던 윤창호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
진가린에게 당한 망신을 만회하려던 것인데, 옥룡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윤 사제. 자네는 물러서 있게.”
“하지만, 사형! 이런 젊은 놈을 상대로 어찌 존엄하신 사형께서….”
—쯧쯧. 보는 눈이 그리 없어서야. 저 젊은이는 이미 절대의 경지에 들었다. 망신당하기 싫으면 가만히 있게.
옥룡은 전음으로 말했지만, 경악한 윤창호는 전음을 쓸 정신도 없었다.
“사… 사형. 지금… 무슨 말씀을…?”
“됐다. 강호란 이런 곳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곳이지. 좋은 공부가 될 터이니 사제는 잘 지켜보거라. 그리고 손 방주. 자네는 수하들을 데리고 멀찍이 물러서게. 자칫 위험할 수 있으니.”
옥룡이 진지하게 싸울 준비를 하자 진가린은 괜스레 걱정이 됐다.
젊은 강한월을 얕잡아보고 방심하면 좋으련만, 이 승려는 수양이 깊은지 그런 모습이 없었다.
게다가 대리국 천룡사에 대한 소문은 그녀도 숱하게 들어온 터.
—대장. 괜찮겠어요? 천룡사의 고승들은 소림사 못지않다던데….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는 사부님과 사제들을 잘 지켜.
안심시키는 말이었지만 진가린은 오히려 불안해졌다.
강한월이 그들까지 보호할 겨를은 없을 거라는 뜻일까?
대장이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이럴 때는 답답하다는 말이야….
“자, 무대는 마련되었으니 제대로 한판 붙어 볼까….”
연장자의 체면도 무시하고 옥룡이 선공을 가했다.
핑!
번갯불이 번뜩였다.
사천당문의 그 어떤 암기보다도, 산동 신궁문(神弓門)의 벽력시(霹靂矢)보다도 빠른 지기(指氣)가 쏘아졌다.
긴장하고 지켜보던 윤창호조차 흠칫 몸을 떤 전광석화의 공격이었지만, 강한월은 검을 슬쩍 움직이는 것만으로 쏘아진 기운을 흘려냈다.
“하하, 편히 가볼까 했는데 역시 잔재주는 안 통하는군. 오랜만에 근접전을 펼치게 생겼구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옥룡이 쇄도했다.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승복을 펄럭이며 날아드는 그.
사방 삼 장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곧게 세운 검지에서 검의 날 같은 기운이 쭉 뻗어 나왔다.
샤아악.
밤공기를 가르며 목을 베어오는 지검(指劍).
강한월은 금빛 광채를 뿜는 검으로 날카로운 검기를 튕기듯 쳐냈다.
하지만 옥룡의 진짜 공격은 이것이 아니었다.
강한월이 수비하는 사이 가슴, 옆구리, 배로 동시에 날아드는 세 줄기 기운.
불과 석 자도 안 되는 거리에서 쏘아진 기운은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탕, 탕, 탕!
헛, 짧은 침음을 토하며 옥룡이 훌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정말로 의외였다.
그 짧은 순간, 강한월의 손가락에서도 기운이 쏘아져 자신의 공격을 소멸시킨 것이다.
“탄지신통? 너는 소림의 제자냐?”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
강한월은 반격을 가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이형환위와 궁신탄영이 혼합된 신법으로 쇄도하는 그의 검엔 어느새 은은한 금광을 띈 묵빛 검기가 줄기줄기 흐르고 있었다.
“묵빛? 이건 소림의 기운은 아닌데?”
의아함을 느꼈지만 딴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재확인한 옥룡은 힘을 끌어올렸고, 손가락 끝에 맺혀 있던 기운이 몇 배로 굵어지며 단단히 실체화되었다.
타앙~
기운이 충돌하는 여파에 땅이 들썩거렸다.
전해지는 충격으로 강한월과 옥룡 모두 대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상대가 어느 수준의 고수인지를.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경지를 넘었군. 생각지도 못했어, 이런 외진 곳에서 절대경을 돌파한 젊은이를 만날 줄이야.”
극찬을 늘어놓으면서도 옥룡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오른손에 이어 왼손 검지에서도 굵은 빛이 쭉 뻗어 나오며 실체화되었다.
쌍검술을 펼치는 것 같은 옥룡의 공격.
탕, 타앙, 타앙~
강한월의 검이 잔영을 흩뿌리며 공격을 막아냈다.
옥룡의 강기화 된 지검은 무시무시했지만, 검술에 대한 조예는 강한월이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게다가 어떤 재주를 부리는 것인지, 강기를 뽑아내느라 막대한 공력을 소모하고 있는 옥룡과 달리 강한월은 크게 힘든 기색이 없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내 강기를 저리 수월하게 막는 것이지?’
이것은 젊은이가 절대의 공력을 갖고 있다는 것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공력이야 영약을 먹던 격체전공을 받던 비정상적으로 늘릴 방법이 있지만, 무공에 대한 깊은 이해는 억지로 늘릴 수 없는 법.
‘이 젊은이가 백 년에 한 명 날까 말까 한 천재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 아무리 천재라도 스스로 모든 것을 깨우칠 수는 없다.
분명 초월의 경지에 오른 스승에게서 엄한 교육을 받았음이 분명할 텐데….
누구일까, 이 젊은이를 키운 사부는?
의문이 구름처럼 일었다.
하지만 우선은 상대를 굴복시키고 볼 일이었다.
강한월이 만만치 않았지만, 천재 소리라면 자신도 숱하게 들어온 터.
게다가 그분에게 배운 그 무공이라면….
옥룡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졌다.
핑, 핑핑~
손가락에서 화살 같은 기운을 쏘아내 강한월을 물러서게 만든 옥룡이 뒤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윤창호의 허리에 달려있던 검이 저절로 뽑혀 나와 옥룡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대단한 허공섭물의 수법.
하지만 정작 강한월을 놀라게 한 것은 신묘한 허공섭물이 아니라 검 그 자체였다.
대리국 천룡사의 고승이 검을 쓴다고?
“모든 사물은 특정한 파동을 내뿜는다. 겉보기엔 단단하기 그지없는 이 철검도 예외는 아니지.”
손에 익히려는 듯 허공을 향해 검을 가볍게 휘두른 옥룡이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힘의 순수한 결정체인 검강(劍罡)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기운이라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강(罡) 또한 하나의 떨림이며, 상응하는 무엇에 반응하는 울림일 뿐인데.”
자신이 펼칠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던 것일까?
마치 신성한 무엇이라도 되는 듯 경외감 어린 목소리로 옥룡이 중얼거렸다.
“무인은 패배를 통해 성장하는 법. 오늘 네 검은 부러지겠지만, 이 쓰라린 패배를 통해 천외천의 세계가 있음을 엿본다면 너에겐 오히려 득이 될 터.”
할 말은 충분히 했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며 옥룡이 검을 휘둘렀다.
강한월을 향해 뻗어오는 검.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검기를 두른 것도, 맹렬한 검강을 뿜어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옥룡의 담담한 눈빛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검강으로 상대해도 막을 수 없고, 사량발천근이나 이화접목의 수법으로도 흘려낼 수 없을 것이라고.
강한월은 당황했다.
설사 옥룡이 갑자기 혈승의 무공을 펼쳤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극도로 혼란스러웠지만 가만히 검에 맞아 줄 수는 없는 법.
강한월이 검을 들어 마주쳐갔다.
옥룡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검은 응집력을 분쇄하는 파동을 뿜고 있었다.
강한월이 검강을 일으키면 그에 맞는 울림을, 철에 맞닿는 순간엔 쇠를 부수는 떨림을 일으킬 터였다.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옥룡의 미소와 당황한 강한월의 표정 속에 검과 검이 맞부딪혔다.
샤아악.
챙그랑.
부러진 검날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강한월의 당혹스런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옥룡의 자신만만했던 미소는 불신과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내 파동검이… 너, 무슨 사술을 쓴 것이냐?”
“모든 사물은 파동을 내뿜는다고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소? 내 검도 파동을 일으켰을 뿐이오.”
“아니! 그럴 리 없어! 파동과 울림은 천지를 구성하는 지고한 원리. 이것을 검에 접목한 분은 천하에 오직 한 분뿐이란 말이다!”
강한월이 혼란스러운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검강마저 가르는 파동을 뿜는 검.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신주의협이 창안한 무공인 것이다.
게다가 은거하다시피 한 말년에 만든 것이기에 강한월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데….
강한월과 옥룡이 각자의 혼란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던 그때, 퍼엉 하는 벽이 부서지는 소리와 날카로운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아앗!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대결의 결과를 놓고 모두가 당황하던 그 틈에 윤창호가 과감한 행동을 개시한 것이었다.
방문을 지키고 있던 진가린을 피해, 아예 한쪽 벽을 부수고 장학송 문주가 있는 방안으로 뛰쳐 들어간 것.
진가린이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방문을 열었을 땐, 윤창호는 이미 장학송 문주의 목을 움켜잡고 비수를 들이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