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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66화 (66/210)

066화. 시간의 돌

* * *

장학송의 목에 비수를 겨눈 채 윤창호가 천천히 방문 밖으로 나왔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죠?”

손에 든 백학이 눈에 띄게 떨릴 만큼 진가린은 분노했다.

“솔밭을 차지하려 무리수를 두고 있지만 그래도 근본은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본 건가요?”

이번 말은 옥룡을 향한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가득 담긴 경멸은 부러진 검의 충격에서 헤매고 있던 옥룡의 정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윤 사제! 어서 그 노인을 놓아주게!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왜 안 됩니까? 시간의 돌을 확보하기 위해 청송문의 멸문까지 고려했던 것 아닙니까?”

“그랬지. 하지만 멸문을 시키더라도 정면 대결로….”

“이미 충분합니다. 제가 진가린 저 아이와 비겼고 사형의 검은 부러졌습니다. 무슨 정면 대결을 또 펼친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옥룡 사형. 이번에는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악역을 맡을 테니 사형은 못 본 척해주세요. 임무는 완수해야 할 것 아닙니까?”

마음에 안 드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렸지만, 임무라는 단어 앞에서 옥룡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가린이 간절한 마음으로 강한월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역시 쉽게 손을 쓸 수는 없는 상황.

탄지신통을 날려 제압해볼까 생각했지만, 윤창호가 장학송 문주를 방패 삼아 몸을 숨기고 있는 탓에 여의치 않았다.

“문주. 길게 설명 안 해도 알겠지? 어서 시간의 돌이 숨겨진 장소로 안내하시오!”

“시간의 돌이라… 도무지 무슨 말인지….”

“시치미 떼지 마시오!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이나? 솔밭에 숨겨진 바위로 안내하라는 말이오. 확 그어 버리기 전에.”

비수를 쥔 윤창호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고, 붉은 핏물이 가늘게 흘렀다.

충분히 죽음을 떠올릴 상황이었지만 장학송 문주는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솔밭은 우리 청송문의 것이지만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막은 적이 없소. 뭔가 찾고 싶은 것이 있다면 들어가 보시구려. 그곳에 담장 같은 것은 없으니.”

알아서 찾아보라는 문주의 말을 윤창호는 다르게 해석했다.

이처럼 태평한 것을 보니 바위는 찾기 힘들게 꽁꽁 숨겨둔 것이 분명하다 생각한 것이다.

혹은 엄청난 진법과 기관장치로 보호되어 있거나.

“문주. 정말 보물 때문에 목숨을 버릴 작정이요? 당신 목숨은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제자들은 뭔 죄요?”

“제자들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소!”

처음으로 장학송 문주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리고 윤창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손 방주! 흑수방 무사들을 데리고 이리로 오시오!”

먼발치서 숨죽이며 구경만 하던 흑수방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윤 호법. 제가 뭐 도울 일이라도…?”

“손 방주. 지금부터 열을 세겠소. 만약 그사이 장 문주가 입을 열지 않으면… 청송문 제자 하나의 목을 베시오!”

“네? 아… 알겠습니다.”

손 방주와 무사들이 달려가 막내 제자 송윤을 붙들었다.

윤창호가 장학송 문주의 목을 겨눈 비수에 힘을 주는 통에 진가린과 영근은 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문주. 나도 이제 이판사판이오! 제자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돌의 정확한 위치를 말하시오. 하나!”

윤창호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였다.

입술을 질끈 깨문 진가린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강한월은 생각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하면 윤창호를 막을 수 있을까?

장학송 문주의 목에 붙어있는 비수보다 더 빠르게 윤창호를 제압할 수 있을까?

“셋… 넷….”

지금 이 순간, 가장 괴로운 것은 장학송 문주 본인이었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목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제자들의 죽음에 태연할 만큼 마음이 모질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손으로 바위를 넘길 수도 없는 일.

선대의 유훈에 집착하기 때문은 아니었고, 이 바위가 악인들의 손에 들어갈 경우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가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다섯… 여섯….”

진가린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사부님이나 사제의 죽음을 대장이 못 본 척할 리 없다.

아마도 숫자 열을 세기 전 윤창호를 제압하려 할 것이고, 그 순간 송윤을 구하는 것은 자신의 몫.

“일곱… 여덟….”

윤창호가 여덟을 세는 순간이었다.

오직 이 한순간을 위해 기를 응축하고 있던 강한월이 행동에 나섰다.

목에 대어진 비수보다 빠르긴 힘들었으니 어차피 성공 확률은 절반 이하.

윤창호가 찰나라도 주춤해주길 기대하며, 강한월은 모든 진력을 뽑아내어 탄지신통을 날렸다.

피이잉!

그런데… 강한월보다 먼저 행동한 사람이 있었다.

탄지신통이 막 쏘아지기 직전, 사부의 곁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영근이 윤창호를 향해 몸을 던진 것이다.

“안 돼!”

사제의 섣부른 행동에 놀란 진가린은 안타까운 비명이 터졌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영근이 뛰어드는 탓에 윤창호는 흠칫 몸을 움직였고, 그 때문에 관자놀이를 노리고 날아오던 탄지신통은 머리카락 몇 개만 베어낸 채 빗나가고 말았다.

강한월이 재차 탄지신통을 쏘려고 했지만, 옥룡이 덮쳐 오는 탓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진가린은 송윤이라도 구하기 위해 흑수방 무사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정녕 피를 보자는 뜻이냐?”

이것들이 정말…!

한순간 혼돈에 빠진 광경을 보며 윤창호의 분노가 끓어올랐고, 애써 붙들고 있던 인내심의 끈이 뚝 하고 끊어졌다.

자신의 경고가 빈말이 아님을 보여줘야 할 때였다.

윤창호는 비수를 깊이 박아 넣기 위해 손에 힘을 가했다.

어?

놀란 윤창호가 다시 한번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단단한 바위에 박혀있는 것처럼 비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놀란 것은 윤창호 혼자만이 아니었다.

치열하게 다투고 있던 강한월과 옥룡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결을 멈췄다.

그들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앙상한 손가락으로 비수의 날을 짚고 있는 장학송 문주의 몸으로 반딧불처럼 깜박이는 주변의 천지원기가 물밀 듯이 흘러들고 있는 신비한 광경이.

“사부님!”

흑수방 방주와 무사들을 몰아붙이며 송윤을 구해낸 진가린이 기뻐 소리쳤다.

그때까지도 비수를 찔러 넣기 위해 용을 쓰던 윤창호는 장학송 문주가 상상도 못 할 고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주! 지금까지 우리를 속인 것이요?”

재빨리 몇 걸음 물러서며 윤창호가 물었지만, 장학송 문주는 대답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애잔한 눈빛을 던질 뿐이었다.

“가린아… 영근, 송윤아. 못난 사부 때문에 너희가 고생이 많구나.”

제자들이 달려가 사부를 얼싸안았다.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안도와 함께 사부가 병을 이겨낸 것 같다는 희망이 동시에 찾아왔다.

의아한 것은 장학송 문주의 표정엔 전혀 기쁜 기색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사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탓에 제자들은 알 수 없었다.

“자네는… 알고 있었나?”

허탈한 표정의 옥룡이 강한월에게 물었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던 노인이 천지원기를 마음대로 끌어 쓰는 초월자였다니.

잠시 답변을 기다렸으나 강한월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이미 패배를 인정한 옥룡이 이번엔 장학송 문주를 향해 물었다.

“문주. 우리를 어쩌시겠소?”

“내가 무얼 어쩐다는 말이오? 솔밭을 내놓으라 윽박지른 것도 그대들이고, 이 몸을 인질로 잡고 협박한 것도 그대들인 것을.”

“우리가 물러선다면… 보내주시겠소?”

“간다는 손님을 주인이 만류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치욕적이지만 그래도 목숨은 건지겠구나.

옥룡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창호는 창백한 표정을 한 채 흑수방 무사들을 이끌고 청송문 밖으로 급히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옥룡은 강한월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 파동검을 베어버린 자네의 그 검. 어느 분께 사사한 것인지 물어도 되겠나?

외려 강한월이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궁금증을 풀기엔 적당한 자리가 아니었고, 강한월은 침묵을 지켰다.

—말하기 곤란한가 보군. 어쨌든 자네와 난 연이 있는 듯하여 충고 한마디 하겠네. 오늘은 이렇게 물러나지만 우리 조직은 시간의 돌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장 문주의 경지가 대단하지만 우리에게도 못지않은 고수들이 있다네. 청송문을 지키려면 어찌해야 할지 고민해 보게나

* * *

강한월과 진가린은 장학송 문주를 모시고 솔밭으로 향했다.

차가운 달빛을 맞으며 한참을 걸어가니 조그마한 사당이 나타났다.

“청송문의 개파조사께서 만드신 사당이오. 하지만 실제 위패를 모시는 것은 아니고….”

“바위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곳이군요.”

“그렇소. 여기 지하에 그것이 있소.”

사당 안은 어두웠지만 장학송 문주는 익숙하게 걸음을 옮겨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매캐한 먼지를 뚫고 지하로 내려가니 답답한 공기 사이로 한줄기 청명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곳에 그리 크지 않은 바위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보물을… 아무 안전장치도 없이 그냥 이렇게 보관한 거예요?”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바위를 보고 진가린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개파조사님의 명이셨지. 영성(靈性)이 있는 물건이라서 억지로 봉인해두면 오히려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며….”

“옥룡 대사가 알면 거품을 물겠네요.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줄 알았다면 굳이 솔밭을 빼앗는다고 그 난리를 안쳐도 되었을 텐데….”

“생각이 너무 많았던 거고, 또한 연이 없던 것이지.”

“사부님. 그런데 이 바위가 왜 중요한 건데요? 제가 보기엔 그냥 평범한 돌인데… 조사님이 이걸 보관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장학송 문주에게 한 질문이었지만 답은 강한월에게서 나왔다.

지하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뚫어져라 바위만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무엇에 홀린 듯 나지막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이건… 십이신석(十二神石). 시공간을 초월하는 기이한 능력을 발휘하는 기물(奇物). 혈승들이 과거로 회귀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다.”

“십이신석? 이 바위의 이름이 그것이오? 옥룡 대사의 조직은 시간의 돌이라 부르더니. 아니, 그보다 강 소협이 이것에 대해 어찌 아는 거요? 우리 청송문의 장문인에게만 비밀스레 전해오는 내용인데….”

“역시 청송문의 개파조사께서는 이 물건의 효용에 대해 알고 계셨군요. 그분께서 어떤 말을 남기셨는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오. 그저 이런 바위 열두 개가 모이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역천의 이적이 일어난다 하셨지.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고 왜곡된다고….”

“그렇게 우려를 하셨다면 차라리 파괴하지 않으시고…?”

“허허허, 그건 이상할 것이 없소. 청송문의 선조께선 원래 그런 분이시니까. 세상일 흘러가는 대로 그냥 지켜보는 분이셨지. 능력이 하늘에 닿은 분이셨지만 본인 힘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평생 경계하며 사셨소. 이 바위를 방치하듯 놔두신 것도, 연이 닿는 누군가가 가져가도록 하신 거겠지.”

“연이 닿는 사람이요?”

“바로 강 소협 당신 같구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바위들을 알아보는 것도 그렇고, 적절한 시점에 나타나 옥룡과 흑수방을 물리친 것도.”

“이걸 저에게 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오늘은 운이 좋았지만 옥룡의 조직이 다시 들이닥친다면 결국 빼앗기게 되겠지. 청송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앞으론 강 소협이 맡아주면 좋겠소.”

강한월이 바위 앞에 섰다.

비록 오늘 처음 본 것이지만,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만감이 교차했다.

이것 때문에… 바로 이 바위들 때문에 혈승들의 회귀가 이뤄진 것이다.

검을 뽑아 든 강한월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위를 향해 휘둘렀다.

샤아악.

단단한 바위가 무 썰 듯 둘로 갈라졌다.

장학송 문주와 진가린이 놀라며 숨을 삼킬 때, 강한월이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갈리진 바위 속에 숨겨져 있던 조그마한 붉은 보석.

현란한 핏빛 광채를 뿌리던 보석은 강한월의 손에 잡히자 빛 뿌리기를 멈추고 잠잠해졌다.

마치 잠이 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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